"열정이 있으면 돈은 따라온다"는 말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다. 오히려 그 열정이 착취의 도구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젊은 세대에게 '열정페이'라는 단어는 이제 냉소와 분노의 대상이다. 그들은 묻는다. 왜 우리의 노동은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가? 왜 우리의 열정은 착취당해야 하는가?
노동의 본질, 그리고 그 상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로 구분했다. 그중 노동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 활동으로, 인간이 자연의 순환 속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반복하는 행위다. 아렌트가 보기에 노동은 끝없이 소비되고 다시 생산되는 순환의 과정이며, 그 자체로는 영속적인 결과물을 남기지 못한다. 하지만 바로 그 반복성 속에서 인간은 생명의 리듬을 경험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확인한다.
문제는 현대사회에서 이 노동의 의미가 철저히 왜곡되었다는 점이다. 노동은 더 이상 생존과 공동체를 위한 활동이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 포섭된 상품이 되었다. 특히 '열정페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착취 구조 속에서, 젊은 세대의 노동은 정당한 보상조차 받지 못한 채 소진되고 있다. 한 대학생이 인턴십에서 월 50만 원을 받으며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 이것이 과연 정상인가?
열정이라는 이름의 착취
"이 일을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어요." 많은 청년들이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 발을 들이기 위해 이런 말을 듣는다. 그리고 그들은 기꺼이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감내한다. 꿈을 이루기 위한 통과의례라고 믿으면서. 하지만 그 꿈은 언제쯤 현실이 될까? 3년, 5년, 아니면 10년? 많은 경우 그 끝에 남는 것은 소진된 열정과 텅 빈 통장뿐이다.
열정페이의 기만은 바로 여기에 있다. 노동의 가치를 '열정'이라는 감정적 개념으로 대체함으로써, 정당한 경제적 보상을 회피하는 것이다. 마치 열정이 있다면 돈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하지만 열정으로 집세를 낼 수는 없다. 열정으로 밥을 먹을 수도 없다. 아렌트가 말한 노동의 본질, 즉 생존을 위한 활동이라는 측면을 생각해보면, 이는 명백한 모순이다.
노동의 존엄성 회복을 위하여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노동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노동은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며, 그렇다고 열정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노동은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이며,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모든 노동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며, 정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
제도적 차원에서도 변화가 필요하다. 인턴십과 수습 기간의 최저임금 보장, 근로시간 준수, 부당한 노동 관행에 대한 처벌 강화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열정페이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정도는 견뎌야지"라는 체념 대신, "내 노동의 가치는 이것이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노동의 의미를 찾아서
열정페이가 만연한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그것은 젊은 세대의 꿈을 착취하고, 노동의 존엄성을 훼손하며, 결국 사회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한다. 아렌트가 강조했듯, 인간의 활동은 노동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작업을 통해 영속적인 무언가를 만들고, 행위를 통해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그 속에서 인간다움을 실현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열정이 아니라 존엄이다. 정당한 대가를 받는 노동, 그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경험.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노동이며, 우리가 회복해야 할 노동의 본질이다. 열정페이라는 기만에서 벗어나, 노동의 의미를 되찾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