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0월이 되면 노벨문학상 발표를 둘러싼 관심이 뜨겁다. 수상자가 발표되는 순간, 그의 작품은 서점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고, 언론은 앞다투어 작가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조명한다. 국내 문학상도 마찬가지다.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의 수상작은 '주목해야 할 작품'으로 자동 분류되며, 수상 경력은 작가의 이력서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이 된다.
그런데 한 번쯤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왜 특정 작품은 '훌륭한 문학'으로 인정받고, 다른 작품은 그렇지 못한가? 문학적 가치는 정말 텍스트 자체에만 내재된 것일까?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런 질문에 명쾌한 답을 제시한다. 문학적 가치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되는 것이며, 문학상은 바로 그 생산 장치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문학장과 정당성의 투쟁
부르디외는 『예술의 규칙』(Les Règles de l'art, 1992)에서 문학이 생산되고 유통되며 평가받는 공간을 '문학장(literary field)'이라 불렀다. 이 장은 단순히 작가들이 작품을 쓰는 공간이 아니다. 출판사, 비평가, 문학상 심사위원, 문예지 편집자, 대학 교수 등 다양한 행위자들이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무엇이 좋은 문학인가'를 둘러싼 투쟁을 벌이는 전장이다.
문학장 내에는 두 가지 상반된 가치 체계가 존재한다. 하나는 '순수예술' 또는 '자율예술'의 원리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방하며 상업성을 거부하고 형식 실험과 미학적 혁신을 추구하는 입장이다. 다른 하나는 대중성과 경제적 성공을 추구하는 '이종적(heteronomous)' 원리다.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여기 속한다.
흥미로운 점은 문학장에서 진정한 '문화적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은 전자, 즉 순수예술의 논리를 따르는 작품들이라는 사실이다. 밀리언셀러를 찍은 장르소설보다 난해한 순문학이 더 높은 문학적 지위를 얻는 이유가 여기 있다. 부르디외는 이를 '경제자본의 부정'이라 표현했다. 역설적이게도 문학장에서는 돈을 벌지 못한 작품이 더 '순수하고' '진정한' 문학으로 인정받는 구조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문학상 - 정당성을 주조하는 공장
문학상은 바로 이 문화적 정당성을 공식적으로 생산하고 배분하는 핵심 기제다. 수상은 단순히 뛰어난 작품을 발굴하는 중립적 행위가 아니다. 특정한 미학적 기준을 옹호하고, 특정한 문학적 세계관을 정당화하며, 궁극적으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재생산하는 권력 행사다.
심사위원단의 구성을 보면 이 메커니즘이 명확해진다. 대부분의 권위 있는 문학상 심사위원은 기성 문인, 문학평론가, 대학 교수 등 이미 문학장에서 '정당성을 인정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몸담은 문학 전통과 미학적 취향에 따라 심사한다. 이상문학상이 주로 모더니즘 계열의 실험적 작품을 선호하고, 김정한문학상이 리얼리즘 전통을 중시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각 문학상은 특정한 '문학적 아비투스'를 체화한 심사위원들에 의해 운영되며, 그들의 미학적 성향이 상의 정체성을 만든다.
2016년 한강이 맨부커상을 수상했을 때를 떠올려보자. 『채식주의자』는 수상 전에도 좋은 작품이었지만, 수상 이후 완전히 다른 차원의 '정당성'을 획득했다. 단순한 한국 소설에서 '세계문학'의 반열에 올라선 것이다. 이는 맨부커상이라는 제도가 지닌 '상징자본'이 작품에 전이된 결과다. 부르디외의 용어로 말하면, 문학상은 상징자본의 '성별화(consecration)' 기능을 수행한다. 평범한 금속에 도장을 찍어 화폐로 만들듯, 문학상은 작품에 '문학적 가치'라는 인장을 찍는다.
보이지 않는 배제의 메커니즘
문제는 이 과정에서 특정한 목소리들이 체계적으로 배제된다는 점이다. 문학상 제도는 겉으로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심사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특정 계급, 젠더, 세대의 미학을 특권화한다.
1990년대까지 한국의 주요 문학상 수상자는 압도적으로 남성이었다. 여성 작가의 작품은 "섬세하지만 무게감이 부족하다"거나 "사적 영역에 머문다"는 평가를 받곤 했다. 이는 여성 작가가 실제로 덜 재능 있어서가 아니다. 문학장을 지배하던 남성 중심의 미학적 기준, 즉 '거대담론'과 '역사의식'을 중시하는 잣대가 여성 작가의 글쓰기를 평가절하했기 때문이다. 부르디외는 이를 '상징폭력'이라 불렀다. 지배 집단의 문화적 기준이 보편적 가치인 양 받아들여지면서, 다른 방식의 글쓰기는 자연스럽게 열등한 것으로 분류되는 메커니즘 말이다.
장르문학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판타지, SF, 로맨스 소설은 아무리 정교하게 쓰여도 '순문학' 중심의 문학상에서 배제된다. 장르적 관습을 따른다는 이유로, 대중성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진지한 문학'의 범주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 SF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고 관련 문학상이 생겼지만, 이는 문학장의 위계 자체가 변한 것이 아니라 SF 작가들이 오랜 투쟁 끝에 제한적인 정당성을 획득한 결과다.
신인상의 역설
신인 작가를 위한 등용문인 신춘문예와 각종 신인상도 부르디외의 시각으로 보면 흥미롭다. 이 제도는 재능 있는 신인을 발굴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동시에 '올바른' 문학적 아비투스를 검증하는 관문이기도 하다.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분석해보면 특정한 패턴이 발견된다. 지나치게 실험적이지도, 그렇다고 상투적이지도 않은, "적절히 새로우면서도 문학적 전통 안에 있는" 작품들이 선호된다. 심사평을 보면 "완성도", "절제된 문체", "깊이 있는 통찰" 같은 추상적 기준이 반복된다. 이 기준들은 얼핏 보편적인 것 같지만, 실은 문학장의 지배적 세력이 오랜 시간 구축해온 미학적 취향을 반영한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누가 이 경쟁에 참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신인상에 응모하려면 최소한 문학적 글쓰기의 규칙을 익혀야 하고, 그러려면 대학의 문창과나 사설 문학 아카데미에서 훈련받아야 한다. 이 과정에는 시간과 돈이 든다. 결국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을 가진 사람만이 문학장의 진입을 시도할 수 있는 구조다. 부르디외가 『재생산』(1970)에서 분석한 교육 제도의 계급재생산 메커니즘이 문학 제도에서도 그대로 작동하는 셈이다.
정당성의 변동과 새로운 전장
그렇다면 문학상 제도는 영원히 고정된 것일까? 부르디외는 장이 정태적이지 않다고 강조했다. 새로운 행위자들이 진입하고, 새로운 미학이 등장하면서 권력관계는 끊임없이 재편된다.
최근 한국 문학장의 변화가 이를 보여준다. 온라인 플랫폼의 등장으로 기성 출판사와 문학상을 거치지 않고도 독자를 만나는 경로가 생겼다. 웹소설, 브런치 작가, 독립출판 등이 새로운 정당성의 원천으로 부상하고 있다. '좋아요' 수와 조회수라는 새로운 형태의 자본이 전통적인 문학상의 권위에 도전한다.
하지만 부르디외라면 이렇게 경고할 것이다. 새로운 플랫폼이 등장한다고 해서 권력 구조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단지 정당성을 생산하는 메커니즘이 변할 뿐, 누군가는 여전히 '무엇이 좋은 문학인가'를 정의하는 권력을 행사한다고 말이다. 지금은 알고리즘이 그 역할을 일부 수행하고 있지만, 알고리즘 역시 중립적이지 않다. 개발자의 가치관과 플랫폼의 수익 구조가 반영된 또 다른 형태의 선별 장치일 뿐이다.
비판적 읽기를 위하여
부르디외의 관점은 허무주의로 이어지지 않는다. 문학적 가치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모든 작품이 똑같이 가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더 섬세하게 질문할 수 있다. 이 작품이 수상한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미학적 기준이 작동했는가? 누구의 목소리가 대표되고 누구의 목소리가 배제되었는가?
다음에 문학상 발표 소식을 접할 때, 단순히 "좋은 작품이 상을 받았구나"로 끝내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심사위원은 누구인가? 그들은 어떤 문학적 배경을 가졌는가? 이 상은 어떤 문학적 전통과 연결되어 있는가? 수상작이 대변하는 세계관은 무엇이고, 그것이 보편적인 것처럼 제시되는 과정에서 무엇이 은폐되는가?
이런 질문들은 문학상을 폐지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다만 문학상이 단순한 '발견'이 아니라 '생산'이라는 점, 문학적 가치의 판정이 권력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의식하자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수동적 소비자가 아니라 능동적 독자가 된다. 주어진 문학적 정당성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누가, 왜, 어떻게 그 정당성을 생산하는지 들여다보는 독자 말이다.
부르디외는 『파스칼적 명상』(Méditations pascaliennes, 1997)에서 이렇게 썼다. "사회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유의 시작이다." 문학상이라는 제도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그 이면의 권력 메커니즘을 파악한다는 것은 곧 우리 스스로 '좋은 문학'이 무엇인지 더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