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아는 '지하드=성전'이라는 등식, 사실은 십자군 시대 기독교 개념의 투영일 뿐이다'
아랍어 어원과 본래 의미
지하드(جهاد, jihad)는 아랍어 동사 '자하다(جَهَدَ, jahada)'에서 파생된 명사로, '노력하다', '애쓰다', '분투하다'를 뜻한다. 어근 j-h-d(ج-ه-د)는 근본적으로 '힘을 다하다', '최선을 다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슬람 신학에서 지하드는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된다.
첫째는 '지하드 알-아크바르(الجهاد الأكبر, jihad al-akbar)', 즉 '더 큰 지하드'로 불리는 내면의 투쟁이다. 이는 자신의 욕망, 악한 충동, 나태함과 싸우는 영적 수행을 의미한다. 이슬람 신비주의(수피즘) 전통에서는 이를 '나프스(نفس, nafs)'라 불리는 자아와의 투쟁으로 본다. 9세기 이슬람 학자 알-가잘리(Al-Ghazali)는 그의 저서 『신앙의 부흥(إحياء علوم الدين, Ihya Ulum al-Din)』에서 이 내면의 지하드를 가장 중요한 영적 수행으로 강조했다.
둘째는 '지하드 알-아스가르(الجهاد الأصغر, jihad al-asghar)', 즉 '더 작은 지하드'로, 외부의 억압이나 불의에 맞서는 물리적 투쟁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역시 무조건적인 전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 공동체(움마)를 방어하거나 부당한 박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정당방위적 성격을 지닌다.
코란과 하디스 속 지하드 개념
코란에서 지하드라는 단어는 약 35회 등장하며, 그 대부분은 '알라의 길에서 분투하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코란 22장 78절은 "그분을 위해 합당하게 분투하라(وَجَاهِدُوا فِي اللَّهِ حَقَّ جِهَادِهِ)"고 말하는데, 여기서의 분투는 신앙을 지키기 위한 총체적 노력을 뜻한다.
코란 25장 52절은 "불신자들에게 순종하지 말고, 이(코란)로써 그들에 맞서 큰 지하드를 행하라"고 기록한다. 이슬람 학자들은 이 구절을 언어와 논리를 통한 평화적 설득의 의미로 해석한다. 실제로 이 구절이 계시된 메카 시대에는 무슬림들이 군사적 행동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하디스(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록)에는 한 전투에서 돌아온 무슬림들에게 무함마드가 "너희는 작은 지하드에서 큰 지하드로 돌아왔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군인들이 의아해하자 그는 "큰 지하드는 자신의 나프스(욕망)와의 싸움"이라고 설명했다. 이 하디스는 알-바이하키(Al-Bayhaqi)의 『수난(الزهد الكبير)』에 수록되어 있다.
중세 이슬람 법학의 지하드 이론
중세 이슬람 법학자들은 지하드를 샤리아(이슬람 법) 체계 안에서 정교하게 다듬었다. 8세기 법학자 아부 하니파(Abu Hanifa)가 세운 하나피 학파는 지하드를 '파르드 키파야(فرض كفاية, fard kifaya)', 즉 공동체 전체의 의무로 규정했다. 이는 모든 개인이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수의 사람들이 수행하면 나머지는 면제된다는 뜻이다.
반면 방어 전쟁의 경우에는 '파르드 아인(فرض عين, fard ayn)', 즉 개인의 의무가 된다. 12세기 법학자 이븐 루쉬드(Ibn Rushd)는 『법학자들의 의견 차이(بداية المجتهد, Bidayat al-Mujtahid)』에서 지하드의 다양한 법적 해석을 비교 분석했다.
중세 이슬람 법학은 전쟁에도 엄격한 규칙을 적용했다. 여성, 어린이, 노인, 성직자를 공격해서는 안 되며, 농작물과 나무를 훼손해서도 안 된다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이는 오늘날 국제인도법의 선구적 형태로 평가받는다. 9세기 법학자 알-샤피이(Al-Shafi'i)는 적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전쟁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십자군 전쟁과 지하드 개념의 변화
11세기 말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면서 지하드 개념은 현실 정치와 결합하기 시작했다. 1095년 우르바노 2세 교황이 성지 탈환을 외치며 십자군을 조직하자, 이슬람 세계는 방어적 지하드를 선언했다. 12세기 시리아의 군주 누르 앗-딘(Nur al-Din)은 십자군에 맞서는 무슬림 연합을 구축하며 지하드를 정치적 동원의 도구로 사용했다.
살라딘(Salah al-Din)이 1187년 예루살렘을 탈환한 것은 방어적 지하드의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살라딘은 도시를 함락한 후 기독교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고, 교회를 파괴하지 않았다. 이는 지하드가 무차별적 폭력이 아니라 규칙이 있는 정당방위였음을 보여준다.
십자군 시대의 지하드 담론은 이븐 타이미야(Ibn Taymiyyah, 1263-1328)에 의해 이론적으로 정립되었다. 그는 몽골의 침략과 십자군의 공격이라는 이중 위기 속에서 『샤리아 정책(السياسة الشرعية, Al-Siyasa al-Shar'iyya)』을 저술하며 방어적 지하드를 강조했다. 그러나 후대 극단주의자들은 그의 이론 중 일부를 맥락을 벗어나 해석하여 공격적 지하드를 정당화하는 데 악용했다.
식민지 시대와 저항 운동으로서의 지하드
19세기 서구 제국주의가 이슬람 세계를 침략하자 지하드는 반식민 저항의 언어가 되었다.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침략하자 압델카데르(Abd al-Qadir) 에미르는 15년간 지하드를 선언하고 저항했다. 그의 지하드는 독립투쟁이자 문화 보존 운동이었다.
인도에서는 1857년 세포이 항쟁 당시 무슬림 지도자들이 영국에 맞서 지하드를 선언했다. 그러나 동시에 인도의 이슬람 개혁가 사이이드 아흐마드 칸(Sayyid Ahmad Khan)은 『코란 주석(تفسير القرآن, Tafsir al-Quran)』에서 진정한 지하드는 교육과 사회 개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무슬림들이 서구 과학을 배우고 근대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리비아에서는 오마르 무크타르(Omar Mukhtar)가 1911년부터 1931년까지 이탈리아 식민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73세의 나이로 순교한 그는 오늘날 저항 영웅으로 기억된다. 그의 지하드는 점령군 퇴치라는 명확한 목표를 가진 해방 투쟁이었다.
20세기 정치 이데올로기화
20세기 들어 지하드 개념은 정치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이집트의 하산 알-반나(Hassan al-Banna)가 1928년 무슬림 형제단을 창설하며 지하드를 사회 개혁과 정치 참여의 개념으로 확장했다. 그는 『메시지 모음(مجموعة الرسائل, Majmu'at al-Rasail)』에서 지하드를 "개인 정화, 가정 건설, 사회 지도, 조국 해방, 칼리파 재건"의 단계로 나누었다.
1960년대 사이드 쿠트브(Sayyid Qutb)는 급진적 해석을 제시했다. 그의 저서 『길의 이정표(معالم في الطريق, Ma'alim fi al-Tariq)』는 현대 사회를 '자힐리야(جاهلية, jahiliyyah)', 즉 무지의 시대로 규정하고 이에 맞선 지하드를 촉구했다. 나세르 정권의 탄압 속에서 쓰인 이 책은 후대 극단주의 운동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지하드 담론의 전환점이었다. 압둘라 아잠(Abdullah Azzam)은 『방어(الدفاع, Al-Difa')』에서 아프간 저항을 모든 무슬림의 의무라고 선언했다. 그는 "지하드는 기도나 단식만큼 중요한 의무"라고 주장하며 전 세계 무슬림들의 참전을 독려했다. 이 과정에서 사우디와 미국의 지원을 받은 무자헤딘 운동이 형성되었다.
서구의 오해와 미디어 재현
서구에서 지하드는 1990년대 이후 '성전(holy war)'으로 번역되며 왜곡되기 시작했다. 이 번역은 십자군 시대 기독교의 '벨룸 사크룸(bellum sacrum)' 개념을 이슬람에 투영한 것으로, 원래 의미와 거리가 멀다. 성전이라는 단어는 종교적 명분으로 이교도를 무조건 공격한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지만, 이슬람의 지하드는 훨씬 복잡하고 제한적인 개념이다.
9.11 테러 이후 서구 미디어는 지하드를 테러와 동일시했다. CNN, BBC 등 주요 언론은 '지하디스트(jihadist)'라는 용어를 테러리스트와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학자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에서 서구가 이슬람을 본질적으로 폭력적인 종교로 재현하는 담론 체계를 비판했다.
영화와 게임 산업도 이러한 고정관념을 강화했다. 할리우드 영화들은 '지하디스트'를 광신적이고 비합리적인 악당으로 그렸다. 커뮤니케이션 학자 잭 샤힌(Jack Shaheen)은 『나쁜 아랍인(Reel Bad Arabs)』에서 1896년부터 2000년까지 할리우드 영화 900편을 분석하며, 아랍인과 무슬림이 어떻게 부정적으로 재현되었는지 폭로했다.
현대 무슬림 학자들의 재해석
현대 무슬림 학자들은 지하드 개념을 본래 의미로 되돌리려 노력하고 있다. 이집트의 대무프티(이슬람 최고 법학자) 알리 고마(Ali Gomaa)는 2007년 "진정한 지하드는 빈곤, 무지, 질병과의 싸움"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알-아즈하르 대학의 파트와(법적 견해)를 통해 자살 폭탄 테러를 명백한 금지 사항으로 규정했다.
요르단의 아민 왕자는 2004년 '암만 메시지(Amman Message)'를 발표하며 200명 이상의 이슬람 학자들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이 선언은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지하드가 아니다"라고 명시했다. 2005년에는 추가 성명을 통해 무슬림 간의 타크피르(배교 선언)를 금지하고, 테러 행위를 이슬람으로 정당화할 수 없다고 천명했다.
미국의 이슬람 학자 하메드 엘-파들(Khaled Abou El Fadl)은 『이슬람과 폭력의 도전(The Great Theft)』에서 극단주의자들이 어떻게 지하드 개념을 납치했는지 분석했다. 그는 고전 이슬람 법학의 풍부한 논쟁 전통을 복원하며, 지하드가 절대 무차별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지하드와 다른 문화권의 개념 비교
지하드를 다른 문화권의 개념과 비교하면 그 특수성이 드러난다. 힌두교의 '다르마(dharma)' 개념은 우주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개인의 의무를 뜻하며, 때로 전쟁(크샤트리야의 의무)을 포함한다.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에서 아르주나는 정의로운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자신의 다르마라는 크리슈나의 가르침을 받는다.
불교의 '정진(精進, virya)' 개념은 깨달음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을 의미한다. 이는 지하드의 내면적 투쟁 개념과 유사하다. 선불교의 '마음과의 싸움'이나 티베트 불교의 '마라(mara, 마장)와의 투쟁'도 내적 지하드와 맥을 같이 한다.
기독교의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 개념도 흥미로운 비교 대상이다. 에베소서 6장 12절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말한다. 이는 이슬람의 나프스와의 싸움과 유사한 맥락이다.
결론: 복원되어야 할 진정한 의미
지하드는 본래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분투'라는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다. 자기 절제, 윤리적 성장, 정의 실현을 위한 노력이 그 핵심이다. 무슬림 인구 18억 명 중 극소수 극단주의자들의 왜곡된 해석이 전체 개념을 대표할 수 없다.
서구 사회는 '성전'이라는 오역에서 벗어나 지하드의 다층적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동시에 무슬림 사회는 극단주의자들에게 빼앗긴 언어를 되찾아야 한다. 알-가잘리가 900년 전 강조했던 내면의 지하드, 나폴레옹 시대 이집트 학자 리파아 알-타흐타위(Rifa'a al-Tahtawi)가 주장했던 교육과 계몽의 지하드가 진정한 의미다.
21세기 지하드는 기후변화, 불평등, 무지와의 싸움이어야 한다. 파키스탄의 말랄라 유사프자이(Malala Yousafzai)가 여성 교육을 위해 싸우는 것, 방글라데시의 무함마드 유누스가 빈곤 퇴치를 위해 마이크로크레딧을 만든 것, 이것이 현대적 지하드의 모범이다. 단어의 본래 의미를 복원하는 것은 단순한 언어학적 작업이 아니라, 문명 간 이해와 평화를 위한 필수적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