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예술 작품의 근원』(Der Ursprung des Kunstwerkes)은 1935년부터 1936년 사이에 행한 강연을 토대로 1950년 『숲길』(Holzwege)에 수록된 논문이다. 이 글은 단순히 예술론을 넘어 하이데거 존재론의 핵심을 드러내는 중요한 텍스트다.
예술 작품이란 무엇인가
예술 작품의 본질을 묻는 일은 순환적이다. 작품이 무엇인지 알려면 예술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예술이 무엇인지 알려면 작품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하이데거는 이 순환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한다. 그는 구체적인 작품, 예를 들어 반 고흐가 그린 농부의 낡은 구두 그림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보통 구두를 도구로 생각한다. 도구는 쓸모 있음, 즉 유용성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반 고흐의 그림 속 구두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그림은 구두의 도구적 존재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드러낸다. 진흙 묻은 밑창, 닳아버린 가죽, 그 구두를 신고 걸었을 농부의 고된 노동, 대지와의 투쟁, 빵에 대한 걱정, 죽음에 대한 불안까지 모두 드러난다. 예술 작품은 사물이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열어 보인다.
작품과 진리
하이데거에게 예술 작품은 진리가 작품 속으로 자신을 정립하는 사건이다. 여기서 진리는 전통 철학에서 말하는 명제의 정합성이 아니다. 진리는 그리스어 알레테이아(aletheia), 즉 은폐되어 있던 것이 드러남을 뜻한다. 예술 작품은 존재자의 존재를 개시하고 비은폐한다.
그리스 신전을 생각해보자. 신전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다. 신전은 그 자리에 서 있음으로써 하나의 세계를 열어 밝힌다. 신전은 탄생과 죽음, 승리와 패배, 축복과 저주의 궤도를 열어놓는다. 동시에 신전은 대지 위에 서 있다. 바위의 견고함, 금속의 광채, 색채의 빛남을 드러낸다. 신전은 세계를 세우고 대지를 산출한다.
세계와 대지의 투쟁
예술 작품 속에서는 세계와 대지의 근원적 투쟁이 일어난다. 세계는 역사적 인간의 본질적 결정들이 펼쳐지는 열린 영역이다. 대지는 스스로를 닫고 은폐하는 것, 드러나면서도 끝내 밝혀지지 않는 것이다. 작품은 이 둘을 하나의 긴장 속에 세운다.
이 투쟁은 대립이 아니라 친밀한 소속이다. 마치 그리스 비극에서 운명과 인간의 의지가 충돌하듯, 세계의 밝음과 대지의 어두움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예술 작품은 이 투쟁을 형태 속으로 정립한다. 그렇게 진리가 작품 속에서 일어난다.
창작과 보존
예술 작품이 존재하려면 창작자와 보존자가 필요하다. 창작은 무에서 유를 만드는 행위가 아니다. 창작은 진리를 작품 속으로 산출하는 일이다. 예술가는 도구를 만드는 장인과 다르다. 장인은 정해진 목적에 따라 형식과 질료를 결합한다. 예술가는 진리의 생기를 경험하며, 그 진리가 스스로를 형태화하도록 돕는다.
보존은 단순히 작품을 곁에 두는 일이 아니다. 보존은 작품 속에서 일어나는 진리의 사건 속으로 들어서는 일이다. 우리가 신전 앞에 서고, 비극을 보고, 시를 읽을 때, 우리는 작품이 열어놓은 진리의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우리의 현존재는 변화한다.
예술과 시작
하이데거는 모든 예술의 본질을 시작(Dichtung)으로 본다. 여기서 시작은 단순히 시를 쓰는 행위가 아니다. 시작은 언어를 통해 존재자를 최초로 이름 짓고 존재를 말하는 근원적 행위다. 건축도, 조각도, 음악도 모두 넓은 의미에서 시작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존재자를 그 존재 속에서 열어 밝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시인은 존재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언어로 옮긴다. 횔덜린(Hölderlin)의 시가 그러하다. 횔덜린은 단순히 아름다운 말을 늘어놓지 않는다. 그는 신성한 것의 부재를 노래하며, 바로 그 노래를 통해 신성한 것이 다시 현존할 가능성을 연다.
현대 기술 시대와 예술
하이데거가 살던 시대는 기술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시대였다. 기술적 사유는 모든 것을 자원으로, 사용 가능한 것으로 환원한다. 숲은 목재 공급원이 되고, 강은 수력 발전소가 된다. 이런 시대에 예술은 더욱 중요하다.
예술 작품은 기술적 세계관에 저항한다. 작품은 존재자를 도구나 자원이 아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낸다. 우리가 세잔의 사과 정물화를 볼 때, 사과는 먹을거리나 상품이 아니다. 사과는 색채와 형태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발한다. 예술은 계산적 사유에 맞서 사색적 사유를 지킨다.
예술의 근원으로서의 존재
결국 예술 작품의 근원은 예술이고, 예술의 근원은 예술가도 아니고 작품도 아니다. 근원은 예술 그 자체, 더 정확히는 진리가 자신을 작품 속으로 정립하는 사건이다. 그리고 이 사건의 궁극적 근거는 존재 자체다.
존재는 스스로를 감추면서 드러낸다. 존재는 끊임없이 존재자를 통해 자신을 현현하지만, 동시에 존재자 배후로 물러난다. 예술 작품은 바로 이 존재의 이중적 운동을 보존한다. 작품은 존재의 진리가 일어나는 장소다.
우리는 일상에서 존재를 망각하며 산다. 우리는 존재자들에 매몰되어 존재 그 자체를 놓친다. 예술은 우리를 일상의 망각에서 깨운다. 릴케의 시 "고대 아폴로의 토르소"가 말하듯, "너는 네 삶을 바꾸어야 한다." 예술 작품과의 만남은 우리의 실존을 변화시킨다.
주요인용문
"도구 존재의 도구적 성격은 유용성에 있다."
"작품 존재의 작품적 성격에는 작품 안에서의 진리의 생기가 있다."
"예술은 진리가 스스로를 작품 속으로 정립함이다."
"세계와 대지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면서도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세계는 대지 위에 자신을 근거 짓고, 대지는 세계를 관통하여 솟아오른다."
"예술 작품은 존재자의 존재를 열어 밝힌다. 작품 속에서 이러한 열어 밝힘, 즉 진리가 작품 속에서 작용한다."
"아름다움은 진리가 나타나는 방식들 중 하나다."
"시작(Dichtung)은 좁은 의미에서 언어 예술인 시 창작이지만, 동시에 넓은 의미에서 예술 일반의 본질이기도 하다."
"예술은 진리의 생기며 정립임이다."
"근원은 어떤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있는가 하는 그것의 본질의 원천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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