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겨울, 파두아 외곽의 작은 아파트. 안토니오 네그리는 창밖으로 눈 덮인 알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순여섯의 나이, 칠십 년대 '붉은 여단' 사건으로 십사 년을 감옥에서 보낸 뒤, 프랑스 망명 생활을 거쳐 자진 귀국해 다시 복역한 그는 이제 막 석방되어 가택연금 상태였다. 발목에는 전자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책상 위에는 스피노자의 『에티카』가 펼쳐져 있었다. 감옥에서 수없이 읽고 또 읽었던 책. 네그리는 연필로 여백에 빼곡히 적힌 자신의 메모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코나투스(conatus) - 존재하고자 하는 힘'. '다중(multitudo) - 단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복수성'. 이 개념들이 지금, 이 시대에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미국 듀크 대학에서 걸려온 국제전화였다.
"안토니오, 나야, 마이클."
마이클 하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그리보다 스무 살 가까이 젊은 미국의 정치철학자. 그들은 지난 몇 년간 서신과 이메일을 통해 하나의 책을 함께 쓰고 있었다. 『제국(Empire)』이라는 제목의, 세계화 시대의 권력구조를 분석하는 책.
"마이클, 들어봐. 나는 지금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목격하고 있다고 확신해. 이건 단순히 자본주의가 국경을 넘어 확장된 게 아니야. 주권의 형태 자체가 변화하고 있어."
네그리의 목소리에는 흥분이 섞여 있었다. 발목의 전자 팔찌가 그의 물리적 이동을 제한하고 있었지만, 그의 사유는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세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나도 동의해. 냉전 종식 이후 십 년, 우리가 보고 있는 건 전통적 의미의 제국주의도, 단순한 세계화도 아니야. 네트워크화된, 탈중심적인 권력구조지."
하트가 말을 이었다. 그는 자신의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었다. 시애틀 WTO 반대 시위, 인터넷을 통해 조직된 전 지구적 저항운동들, 국경을 넘나드는 이주노동자들의 흐름. 데이터들이 스크롤되어 내려갔다.
"스피노자가 말한 다중 개념을 다시 봐. 홉스는 다중이 하나의 인민(people)으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했지. 그래야 주권이 작동한다고. 하지만 스피노자는 다중이 다중 그 자체로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본 거야."
네그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눈앞에는 파두아 대학교의 첨탑들이 보였다. 십삼 세기부터 이어져 온 이 대학에서 그는 한때 교수로 재직했었다. 갈릴레오가 가르쳤던 바로 그 강단에서.
"그런데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건 뭐지? 전통적 노동계급은 해체되고 있어. 공장은 제삼세계로 이전되고, 선진국에서는 비물질노동이 지배적이 되고 있지. 프로그래머, 디자이너, 서비스 노동자들. 이들은 마르크스가 상상했던 프롤레타리아트와는 다른 존재야."
하트의 말에 네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감옥 체험을 떠올렸다. 레비아 감옥의 독방에서, 그는 수많은 죄수들을 만났다. 정치범, 마피아, 이주노동자, 마약중독자. 그들 모두는 시스템의 바깥으로 밀려난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시스템이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존재들이기도 했다.
"제국은 더 이상 로마제국이나 대영제국 같은 게 아니야. 지리적 중심이 없어. 워싱턴이 제국의 수도인가? 아니야. IMF가 있는 곳인가? 그것도 아니지. 제국은 도처에 있고 동시에 어디에도 없어."
네그리는 책상 위의 지도를 펼쳤다. 그 위에는 세계 주요 도시들을 연결하는 금융 네트워크, 생산 체인, 정보 흐름이 복잡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권력의 작동방식도 달라졌어. 전통적 제국주의는 직접적 폭력과 착취로 작동했지. 식민지를 점령하고, 원료를 수탈하고. 하지만 지금의 제국은 더 교묘해. 인권, 민주주의,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이름으로 작동하지."
하트가 끼어들었다. "코소보 사태를 봐. NATO의 개입은 명백히 주권 침해야. 하지만 그들은 인권 보호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했어. 이게 제국의 새로운 통치술이야. 푸코가 말한 생명권력의 전 지구적 확장이지."
네그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천천히 걸었다. 발목의 전자 팔찌가 희미한 불빛을 깜박였다.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우습지 않아? 나는 지금 이 작은 방 안에 갇혀 있어. 하지만 우리의 대화는 대서양을 가로지르고 있지. 이게 바로 제국의 역설이야. 제국은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소통과 연결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어."
"맞아. 인터넷을 봐. 원래는 군사 목적으로 개발됐지. 하지만 지금은? 시애틀 반WTO 시위를 조직한 건 바로 그 인터넷이었어. 제국이 만든 도구가 제국에 저항하는 도구가 된 거야."
하트의 목소리에 희망이 묻어났다. 그는 젊은 학생들이 인터넷으로 전 세계의 운동가들과 연결되는 모습을 봐왔다.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
"그래서 우리는 다중이라는 개념이 필요한 거야. 노동계급이라는 개념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아. 공장 노동자만이 혁명의 주체가 아니지.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실업자, 학생, 주부, 프로그래머. 이들 모두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안에서 착취당하고 있어. 하지만 그들은 단일한 정체성으로 환원되지 않아."
네그리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스피노자의 『에티카』 3부가 펼쳐져 있었다. '각각의 사물은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 노력한다. 이것이 사물의 현실적 본질이다.'
"코나투스. 존재하려는 노력. 스피노자는 이걸 모든 존재의 본질이라고 봤어. 돌멩이도, 식물도, 동물도, 인간도. 그리고 집단적 신체도 코나투스를 갖지. 다중의 코나투스, 그게 바로 저항의 원천이야."
"하지만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은 우리를 비판할 거야. 계급투쟁을 버리고 포스트모던한 다원주의로 빠졌다고."
하트의 우려 섞인 목소리에 네그리는 단호하게 답했다.
"그들은 착각하고 있어. 우리는 계급투쟁을 버리는 게 아니야. 계급투쟁의 형태가 변했다는 걸 인식하는 거지. 이제 착취는 공장 안에서만 일어나지 않아. 삶 전체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 포섭되고 있어. 네가 페이스북에 올리는 글, 그게 데이터가 되고 상품이 돼. 네가 아침에 커피를 마시는 순간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너의 삶 자체가 가치를 생산하고 있어."
"생명정치적 생산이지. 푸코와 들뢰즈가 통찰한 그것."
"맞아. 그리고 이게 중요한 지점이야. 만약 삶 전체가 생산과정에 포섭되고 있다면, 저항도 삶 전체를 통해 일어나야 해. 우리는 더 이상 노동조합의 파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새로운 삶의 형태,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공통적인 것(the common)의 생산이 필요해."
네그리는 자신이 감옥에서 경험한 것들을 떠올렸다. 죄수들 사이의 연대, 간수의 눈을 피해 만들어낸 작은 자유의 공간들, 금지된 책들을 돌려보며 형성된 비밀스러운 지적 공동체. 제국은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지만, 삶은 끊임없이 제국의 틈새를 비집고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다중이 어떻게 조직될 수 있지? 그들은 너무 이질적이잖아."
하트의 질문에 네그리는 잠시 침묵했다. 창밖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알프스의 설산이 석양에 붉게 물들었다.
"그게 바로 핵심이야, 마이클. 우리는 다중이 하나의 인민으로 통합되기를 기대하지 않아. 그들의 차이, 이질성, 특이성이 바로 힘의 원천이야. 공장 노동자의 논리로만 봤을 때, 프리랜서 디자이너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지. 하지만 둘 다 불안정한 삶, 프레카리아트의 조건 속에 있어. 이주노동자와 실업자는 전혀 다른 위치에 있지만, 둘 다 사회적 배제의 경험을 공유해."
"그러니까 공통적인 것은 동일성이 아니라 특이성들의 네트워크라는 거지?"
"정확해. 스피노자가 말한 것처럼, 개별 신체들은 각자의 코나투스를 갖고 있어. 하지만 그들이 만날 때, 더 강력한 집합적 신체가 형성될 수 있어. 이건 개별성의 소멸이 아니라, 개별성들이 서로를 강화하는 과정이야."
네그리는 자신의 노트에 급하게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하트는 전화 너머로 연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세 가지 권력 층위를 구분해야 해. 첫째, 군사력과 화폐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 주권 권력. 둘째, 초국적 기업과 금융자본의 네트워크. 셋째, 문화산업과 미디어를 통한 생명정치적 통제. 제국은 이 세 층위가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거야."
"그리고 각 층위에 대응하는 저항의 형태도 달라야 하고."
"그래. 군사력에 대한 저항은 직접적 불복종일 수 있어. 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처럼. 금융자본에 대한 저항은 토빈세 같은 제도적 개입일 수도 있지.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건 세 번째 층위, 생명정치적 차원의 저항이야. 새로운 주체성의 생산, 새로운 욕망의 창조, 새로운 공통체의 실험."
밤이 깊어갔다. 네그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식어빠린 커피. 그는 문득 젊은 시절, 오페라이스모(노동자주의) 운동을 하던 때를 떠올렸다. 공장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하고, 토리노의 피아트 공장 앞에서 연설하던 시절. 그때 그들은 확신에 차 있었다. 노동계급이 역사의 주체라고, 혁명은 곧 올 것이라고.
하지만 역사는 다르게 흘러갔다. 공산주의는 무너졌고, 노동운동은 쇠퇴했고, 자본주의는 오히려 더 강력해졌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것이 태어나고 있었다. 사파티스타 운동, 시애틀 시위, 인터넷 활동가들, 퀴어 운동, 환경운동. 이들은 전통적 좌파의 언어로는 포착되지 않는 새로운 정치를 실험하고 있었다.
"마이클, 우리가 낙관적이라고 비판받을 거야. 제국의 압도적 힘 앞에서 다중의 저항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나도 알아. 하지만 우리는 단순한 낙관주의자가 아니야. 우리는 현실을 직시하고 있어. 제국이 얼마나 강력한지, 얼마나 유연한지, 얼마나 침투적인지.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제국의 모순도 보고 있어."
하트의 말에 네그리가 이어받았다.
"제국은 다중을 필요로 해. 그들의 창조성, 협력, 소통. 비물질노동은 본질적으로 협력적이고 사회적이야. 프로그래머는 혼자서 코드를 짜는 게 아니라, 오픈소스 커뮤니티와 협력해. 디자이너는 고립된 천재가 아니라, 트렌드와 문화의 흐름 속에서 작업해. 이 협력과 공통성이 바로 자본주의 생산의 핵심이 됐어. 그런데 이건 역설적이야. 자본주의는 사적 소유에 기반하는데, 생산은 점점 더 공통적이 되고 있으니까."
"지적재산권 전쟁을 봐. 특허와 저작권을 둘러싼 투쟁. 제약회사들은 AIDS 치료제 특허를 지키려 하고, 아프리카 국가들은 생존을 위해 특허를 무시하려 하지. 이게 바로 공통적인 것을 둘러싼 투쟁이야."
"맞아. 그리고 인터넷도 마찬가지야. 원래는 공통적인 공간으로 시작했지. 하지만 점점 사유화되고 있어. 닷컴 기업들, 소셜미디어 플랫폼들. 하지만 해커들과 오픈소스 운동은 저항하고 있지. 공통적인 것을 공통적으로 유지하려는 투쟁."
네그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으로 갔다. 거기에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 꽂혀 있었다. 그는 들뢰즈의 책을 꺼냈다.
"들뢰즈가 말한 리좀을 기억해? 중심 없는, 위계 없는, 수평적 네트워크. 그게 바로 다중의 조직 원리야. 전통적 정당이나 노조는 나무 구조야. 하나의 뿌리, 하나의 중심. 하지만 리좀은 어디서든 연결되고, 어디서든 싹틀 수 있어."
"그런데 그게 약점이 될 수도 있지 않아? 중심이 없으면 쉽게 흩어지고, 지속성을 유지하기 어렵잖아."
하트의 우려에 네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게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야. 리좀적 조직과 지속가능한 제도 사이의 긴장. 자발성과 조직화 사이의 균형. 수평성과 효율성 사이의 타협. 쉬운 문제가 아니지."
시계를 보니 자정이 넘었다. 하트는 내일 아침 수업이 있었고, 네그리는 통금 시간을 지켜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대화를 끝내고 싶지 않았다.
"마이클, 우리 책의 마지막 장을 어떻게 끝낼지 생각해봤어?"
"아직 확실하지 않아.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는 단순히 제국을 비판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거야. 우리는 대안을 제시해야 해. 추상적 유토피아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실천들 속에서."
"그래. 사파티스타들의 '명령하지 않고 복종하는' 원리, 아르헨티나의 노동자 자주관리 공장들, 인도의 칩코 운동, 브라질의 무토지농민운동. 이것들이 바로 다중의 실험이야. 완벽하지 않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어."
네그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파두아의 밤거리는 조용했다. 하지만 세계 어딘가에서는 누군가 깨어있을 것이다. 서울의 노동자, 상파울루의 활동가, 뉴델리의 농민, 시애틀의 학생. 그들은 서로를 모르지만, 같은 제국에 맞서고 있다. 그들의 투쟁은 고립되어 있지만, 동시에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쓰는 이 책이 그들에게 닿을 수 있을까?"
네그리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하트가 답했다.
"모르겠어. 하지만 시도할 가치는 있어. 이론이 현실을 바꿀 수는 없지. 하지만 현실을 다르게 볼 수 있게 해줄 수는 있어. 그리고 그 다른 시각이 때로는 새로운 실천의 출발점이 되지."
전화를 끊고, 네그리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는 새 종이를 꺼내 쓰기 시작했다. '제국의 시대에 민주주의는...' 아니다. 지우고 다시. '다중은 인민이 아니다. 다중은...' 이것도 아니다. 그는 연필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감옥에서 보낸 밤들이 떠올랐다. 독방의 어둠, 창살 너머 보이는 작은 하늘, 벽에 새겨진 이전 죄수들의 낙서.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도 사유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둠 속에서 더 깊이 사유할 수 있었다. 제국은 그의 몸을 가뒀지만, 그의 정신은 자유로웠다. 스피노자가 렌즈를 갈며 『에티카』를 쓰듯, 그는 감옥에서 제국을 사유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권력은 억압할 뿐만 아니라 생산한다. 제국은 단지 부정적 힘이 아니라, 새로운 주체성, 새로운 욕망, 새로운 삶의 형태를 생산한다. 그리고 바로 그 생산 과정 속에서 저항의 가능성도 태어난다. 제국은 통제하려 하지만, 삶은 넘쳐흐른다. 코나투스, 존재하려는 힘은 멈출 수 없다.
네그리는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멈추지 않았다. 단어들이 흘러나왔다. 제국, 다중, 공통적인 것, 생명정치, 코나투스. 하나의 문장이 다음 문장을 낳았다. 하나의 단락이 다음 단락으로 이어졌다. 창밖이 밝아올 때까지 그는 썼다.
새벽 여섯 시, 네그리는 마침내 연필을 내려놓았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발목의 전자 팔찌는 여전히 깜박이고 있었지만, 그는 자유로웠다. 제국은 그를 감시하고 있었지만, 그의 사유는 이미 대서양을 건너,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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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이 소설은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제국』(2000)을 집필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네그리가 1979년 이탈리아 '붉은 여단' 사건으로 기소되어 수감과 망명을 거쳐 1997년 자진 귀국한 것, 그리고 가택연금 상태에서 하트와 협업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두 사람의 구체적 대화와 네그리의 내적 독백은 소설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했다. 다만 제국, 다중(multitude), 비물질노동, 공통적인 것(the common), 생명정치 같은 핵심 개념들은 실제 그들의 저작에서 전개된 이론을 바탕으로 했다. 특히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개념과 다중 개념이 네그리 사상의 핵심이라는 점, 그리고 1999년 시애틀 WTO 반대 시위가 새로운 형태의 전 지구적 저항운동의 시작이었다는 역사적 맥락은 정확하다.
『제국』은 출간 직후 학계와 운동권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21세기 초반 반세계화 운동의 이론적 근거 중 하나가 되었다. 이들의 이론은 슬라보예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넘어서 새로운 저항 주체를 제시했고, 이후 조르조 아감벤의 예외상태론과 생명정치 논의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