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들어 라캉은 단순한 정신분석 이론가가 아니라 윤리학자로 재조명되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이 라캉을 정치철학에 접속시키고, 주디스 버틀러가 퀴어 이론의 근간으로 삼으면서 라캉의 사유는 박제된 과거가 아닌 급진적 현재로 부활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라캉의 원전은 악명 높게 난해하다. 국내에는 라캉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가이드가 거의 없다. 백상현의 이 패키지는 그 공백을 메운다. 프랑스어 원전 강독, 프로이트로부터의 계보학적 추적, 임상 사례와 예술 작품을 통한 구체적 예시까지 - 라캉 사상의 뼈대와 살을 동시에 보여주는 국내 유일의 체계적 강의다.
라캉을 처음 만나는 이들을 위한 필수 관문. '증상'은 단순한 병리가 아니라 주체가 실재와 맺는 관계 방식이다. '윤리'는 도덕률 준수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배반하지 않는 것이다. '퀴어'는 성소수자 정체성을 넘어 규범적 주체성 바깥을 사유하는 개념이다. 이 강의는 라캉의 핵심 개념들이 어떻게 21세기 윤리학으로 전환되는지 보여준다.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La femme n'existe pas). 라캉의 이 악명 높은 테제는 여성 혐오가 아니라 남근 중심적 상징 질서 바깥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개념이다. 라캉은 여성적 향유(jouissance féminine)를 '팔루스적 향유'와 구별하며, 상징계로 환원되지 않는 잉여의 영역을 탐구한다. 히스테리 환자 도라의 사례 분석,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영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분석을 통해 여성적 욕망이 어떻게 창조성과 고통을 동시에 발현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세미나 7: 정신분석의 윤리』(1959-60)는 라캉 사유의 전환점이다. 여기서 라캉은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의 윤리학을 비판적으로 경유하며 욕망의 윤리학을 정초한다. "네 욕망에 양보하지 말라"는 라캉의 유명한 명제가 등장하는 곳이 바로 이 세미나다. 핵심은 '대상 a'와 '사물'(das Ding) 개념이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분석을 통해 라캉은 "윤리적 행위란 상징 질서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미나 11: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1964)은 라캉의 대표작 중 하나다. 특히 1부에서 전개되는 응시(gaze) 이론은 영화 이론, 미술 비평, 미디어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라캉의 핵심 통찰: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은 일치하지 않는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홀바인의 『대사들』 분석을 통해 라캉은 회화가 어떻게 이 분열을 드러내는지 보여준다.
세미나 11의 후반부는 환상(fantasy)과 향유(jouissance) 개념을 심화한다. 환상은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주체가 욕망의 불가능성을 감내하기 위해 구축하는 틀이다. 라캉의 유명한 환상 공식 "$◇a"가 의미하는 것은 분열된 주체($)가 대상 a와 맺는 근본적 관계다. 강박증과 히스테리 환자의 임상 사례, 사드와 마조흐의 문학 분석을 통해 향유가 어떻게 고통 속에서 쾌락을 추구하는 역설로 나타나는지 보여준다.
영미권 2차 문헌이 아닌 프랑스어 원전을 직접 독해하며 강의한다. 번역 과정에서 왜곡된 개념들을 바로잡고, 라캉 특유의 언어유희와 사유 방식을 그대로 전달한다.
입문 → 주제별 심화 → 원전 강독의 3단계 구성. 라캉을 처음 접하는 사람도, 이미 어느 정도 아는 사람도 각자의 수준에서 시작할 수 있다.
추상적 개념 설명에 그치지 않고 임상 사례, 문학 작품, 시각 예술, 영화 등을 통해 구체화한다. 라캉 이론이 실제 삶과 예술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생생하게 경험한다.
라캉을 20세기 정신분석가로 박제하지 않는다. 퀴어 이론, 페미니즘, 문화 연구와의 접속을 통해 라캉이 왜 지금 여기에서 유효한지 보여준다.
정신분석은 사치가 아니다.
자기 자신을, 그리고 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급진적인 도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