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사를 공부하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답답함을 느낀다. 서양철학은 체계적으로 배웠지만 동양사상은 파편적으로만 알고, 고대 그리스는 익숙한데 17세기 과학혁명기는 낯설고, 칸트는 들어봤지만 그 이후 헤겔과 셸링의 관계는 모호하다.
이정우의 세계철학사 대장정 패키지는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리스 철학의 탄생부터 칸트 이후 독일 관념론의 완성까지, 중국·인도·한국의 사상 전통까지, 지리·역사·경제·문학·예술을 넘나들며 사상사 전체를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9개 강좌가 하나의 거대한 지도를 완성한다. 들뢰즈 연구의 국내 최고 권위자이자 박홍규 사상의 계승자인 이정우 교수가 20년간 축적한 연구와 강의 경력이 이 패키지에 응축되어 있다.
대부분의 철학사 강좌는 서양 중심이거나 동양 중심이다. 이 패키지는 그리스부터 독일 관념론까지의 서양철학사 6개 강좌와 중국·인도·한국의 동양사상사 3개 강좌를 균형있게 배치했다.
더 이상 "서양철학만 알고 동양은 모른다" 혹은 그 반대의 불균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진정한 '세계' 철학사가 완성된다.
9개 강좌는 단순히 나열된 것이 아니다. 각 강좌는 시대 순서와 사상의 흐름을 따라 설계되었다.
예컨대 17세기를 다루는 두 강좌를 보자. Ⅴ강(17세기 과학기술적 사유의 탄생)에서는 데카르트, 뉴턴, 갈릴레오로 대표되는 과학혁명을 다룬다. 이어지는 Ⅵ강(17세기 표현주의 형이상학의 세계)에서는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가 그 과학적 세계관을 어떻게 철학적으로 재구성했는지를 보여준다. 과학과 형이상학이 서로 맞물리며 한 시대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18세기도 마찬가지다. Ⅶ강(18세기 근대사상과 새로운 주체의 탄생)에서 로크, 흄, 루소를 거쳐 근대적 주체 개념이 등장하는 과정을 추적하고, Ⅷ강(칸트 철학과 포스트 칸트 철학)에서 칸트가 이 모든 흐름을 종합하며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연 과정을 본다. 마지막 Ⅸ강(칸트 이후 헤겔, 셸링의 철학)에서는 칸트 이후 독일 관념론이 어떻게 완성되고 분기했는지까지 다룬다.
이런 식으로 각 강좌는 앞 강좌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다음 강좌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마치 한 권의 책을 읽듯 철학사 전체가 하나의 서사로 펼쳐진다.
철학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추상적 개념만 나열하기 때문이다. 이정우 교수는 지리, 역사, 경제, 문학, 예술을 끌어들여 철학 개념을 생생하게 설명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 철학을 다룰 때 단순히 플라톤의 이데아론만 설명하지 않는다. 지중해 무역 네트워크, 폴리스의 정치 구조, 그리스 비극과 서사시가 어떻게 철학적 사유의 토대가 되었는지를 함께 본다. 17세기 과학혁명을 다룰 때도 망원경과 현미경의 발명, 대항해시대의 항해술, 자본주의 경제의 발흥이 어떻게 새로운 세계관을 요청했는지를 추적한다.
철학은 진공 상태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시대의 물질적 조건, 사회적 갈등, 문화적 표현 속에서 철학이 어떻게 발생하고 작동했는지를 보여주는 것. 그래서 철학이 '삶과 무관한 사변'이 아니라 '시대를 이해하는 핵심 도구'가 된다.
이정우 교수는 들뢰즈 연구의 국내 1인자이자 소은 박홍규 사상의 계승자다. 『천 개의 고원』, 『차이와 반복』 같은 난해한 텍스트를 국내에 처음 소개하고 해설한 장본인이다. 20년 넘게 한국 철학계를 이끌어온 그의 통찰이 이 패키지에 집약되어 있다.
단순히 "플라톤은 이렇게 말했다"는 식의 교과서적 설명이 아니다. "왜 플라톤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의 사유는 어떤 역사적 조건에서 가능했는가?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지는가?"까지 파고든다. 박홍규의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이라는 독창적 해석틀로 서양 형이상학사를 재구성하는 대목(시리즈 Ⅰ)은 그 자체로 지적 쾌감을 선사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서양 철학의 원형.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의 논쟁, 플라톤 대화편 정독, "서양 철학사는 플라톤에 대한 각주에 불과하다"(화이트헤드)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다.
지중해 세계에서 대서양 세계로, 서구 철학의 굴절과 전개.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신플라톤주의를 거쳐 중세 스콜라철학과 르네상스 인문주의까지. 기독교가 그리스 철학을 어떻게 변형했는지, 그 과정에서 무엇을 잃고 얻었는지를 본다.
공자, 맹자, 노자, 장자부터 주희의 성리학, 왕양명의 양명학까지. 고대부터 중세까지 관류하는 동북아 사유의 핵심을 추적한다. 서양의 이원론과 다른 동양의 일원론적 세계관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이해한다.
베다 철학, 불교 철학, 인도의 육파철학을 다루고, 한국의 원효, 지눌, 퇴계, 율곡까지 조망한다. 차이의 긍정을 통해 보편 사유로 재탄생하는 아시아 철학의 깊이를 만난다.
갈릴레오, 데카르트, 뉴턴. 근대 과학혁명이 철학에 던진 충격을 다룬다. 기계론적 세계관, 수학적 자연철학, 실험 방법론이 어떻게 중세적 우주관을 해체했는지 추적한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과학혁명 이후 형이상학이 새롭게 재구성되는 과정. 스피노자의 일원론과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이 어떻게 근대 철학의 두 축을 형성했는지 본다. 들뢰즈가 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를 재해석했는지도 이해하게 된다.
로크, 흄, 루소, 볼테르. 계몽주의 시대, 경험론과 합리론의 대립, 사회계약론의 등장.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시작된 근대적 주체 개념이 어떻게 정치철학과 인식론을 재편했는지 추적한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3대 비판서를 집중 분석. 칸트가 어떻게 경험론과 합리론을 종합했는지, 그의 선험철학이 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인지 명쾌하게 정리한다.
셸링의 동일철학과 헤겔의 절대적 이념론. 칸트 이후 독일 관념론이 어떻게 완성되고, 어떻게 분기했는지. 정신과 자연이 마침내 하나 되는 순간과, 그 이후 마르크스와 키르케고르로 이어지는 분열의 씨앗까지 다룬다.
철학사는 사치가 아니다.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나침반이다.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고, 기후위기가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며, 정치적 양극화가 사회를 분열시키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이다. 그 질문에 답하려면 2,500년 동안 인류가 축적한 사유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플라톤이 왜 이데아를 상정했는지, 칸트가 왜 선험적 주체를 말했는지, 헤겔이 왜 역사의 변증법을 주장했는지 아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사고방식의 뿌리를 파악하는 일이다. 그 뿌리를 알아야 현재를 제대로 진단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