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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근현대철학하이데거의『예술 작품의 근원』읽기

강좌정보
이 강의는 하이데거의 후기 저작 『예술작품의 근원』을 강독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 데카르트, 쉴러, 프로이트, 라깡, 가다머, 지젝, 에리히 프롬 등 고대 미학자에서부터 근현대 미학자들까지, 세기의 미학자들의 예술론과 하이데거의 예술론을 비교한다.

예술 작품의 근원을 찾아 떠나는 파란만장한 여행 


성당지기 아들에서 나치 당원까지, 하이데거의 파란만장한 삶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9.26~1976.5.26)는 독일 바덴(Baden)의 작은 마을에서 성당지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독일의 실존철학자이며, 주요 저서로는『존재와 시간』,『예술작품의 근원』등이 있다. 히틀러 통치하의 나치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탈퇴하고 말년에는 주로 집에서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다가 1975년 5월 26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선입견을 가지고 보자, '나쁜 남자'는 나쁜 남자다!

하이데거는 우리의 모든 이해는 이미 “앞서 가짐”, “앞서 봄”, “앞서 잡음”이라고 하는 선입관 구조에서 출발한다고 보았다. 즉, 우리는 선입견 없이 어떤 이해를 수행할 수 없다것이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나쁜 남자> 중 한 남자가 어느 날 대학가에서 한 여대생에 주목하는 장면이 나온다. 수 없이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그 여자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주인공 남자는 갑자기 그 여자에게 다가가서 강렬하게 키스를 한다.

그 이후로 여자의 운명이 바뀌어 버린다. 영화는 그 장면에서, 무관심에서 어느 날 어떤 한 여자에 대해 관심이 쏠림으로서 여타 다른 것들이 배경으로 처리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즉 남자는 키스하는 순간부터 세상의 중심이 되고, 여자와 그 밖의 대중들은 주변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주인공 남자가 인도하는 세계 안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나쁜 남자’를 우리는 영화의 인트로 장면에서 지당 나쁜 남자로 인식하게 되고 영화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왜 그 남자가 그렇게 행동했는지에 대해 이해를 시도한다. 이러한 이해들은 평론가들이나 네티즌들에 의해 다양한 해석으로 모아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영화평론이란 선입견들이 낳은 새로운 해석이 아닐까? 이렇게 우리의 삶은 어떤 것을 자신의 삶의 중심에 놓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는 것을 구분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종의 해석을 통해서 진행된다말할 수 있다.

  

신발은 신발일 뿐! 신는 신발, 보는 신발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도구연관 세계에 대해서 말한바 있다. 그가 말하는 도구는 유용성의 세계와 거리가 멀다. 즉 하이데거의 도구 연관 세계는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사물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반 고흐의 그림 <시골 아낙네의 구두>를 예로 들어보자. 그림에서 나오는 이 신발은 그림으로 표현되기 전 농부가 일할 때 신는 가죽으로 된 신발일 뿐이다. 이 신발 자체는 어떤 쓰임을 위한 도구 그 자체이다. 시골의 농부에게 이것은 친숙한 것이고 그래서 언제나 자신이 신고자 할 때 거기에 있는 신뢰할만한 것에 한정된다.

그러나 이 신발이 캔버스에 담겨질 때 (일상생활에서) 농부가 신는 신발이 아닌 화가의 눈에 담겨질 순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신발은 화가 반 고흐에 의해 사물의 용도성을 결핍한 작품의 도구되는 것이다.

  


E.T.를 만났을 때 우리가 대처하는 방법

영화에서 주인공 소년이 처음 E.T.와 조우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소년은 처음 이 외계 생물체에 대해 놀라움과 두려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다 이 생물체가 과연 무엇인지 다른 동물들과 비교하며 알아내려고 노력한다.

즉 자신이 경험했던 여러 동물들과 유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자신이 이미 경험했던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생명체를 규정하려고 한다.

이 장면이 시사하듯, 우리는 어떤 (낯선)사물에 대해 한 번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미 경험한 것에 입각하여 사물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근원적이고 일차적인 세계이며, 여기에서 출발해서 여타 새로운 사물이해의 조합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쓰레기에서 신성한 물건으로, 코카콜라 병의 놀라운 변신

어릴 적 재미있게 보았던 <부시맨>이라는 영화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이 영화는 어느 날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거기서 버린 코카콜라 병이 부시맨 부족에 떨어져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부시맨들에게 그 새로운 물건은 생소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유용할 수가 없었다. 밀대로… 망치로… 부족들에게 꼭 필요한 도구가 된 것이다.

내용물이 들어 있을 때, 코카콜라병은 미군병사에게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음료로 기능했다. 그러나 그 병은 콜라를 마시고 난 다음에는 쓸모없는 쓰레기가 된다. 하지만 이 부시맨들에게 떨어져 새로운 유용한 도구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 도구의 용도가 다양해지면서 수요가 많아지자 그 병을 둘러싸고 부시맨들 간의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이 병을 버리기로 작정하고 버릴 곳을 찾아 나서는 과정이 이 영화의 줄거리다.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물건은 그 자체로 중립적인 ‘사물’이 아니다. 언제나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어떤 것’으로 작용하면서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손 안의 것”으로서 파악된 도구 연관의 세계인 이다.
작품 세계는 이러한 도구 연관의 세계에서 나온다. 사물이해는 삶의 연관 속에서 드러나는 사물의 작용(사용)의 측면을 거세한 채 시각적인 측면에만 초점을 두고 추상화한 결과이다.

  

예술 작품의 근원은 무엇인가

근원에 대한 물음은 본질의 유래에 대한 물음이다. 예술의 근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무엇을 예술이라고 할 것인가? 예술가가 말하는 예술 작품의 근원은 무엇일까? 바로 작품이다. 작품은 예술가의 근원이다.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 예술가가 된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인가? 예술은 예술가와 예술 작품을 통해서 존재한다. 예술은 작품에서 추출된다. 작품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또한 예술의 본질에서 경험할 수 있다. 예술과 예술 작품과 관련해서 우리는 해석학적 순환에 빠진다.

예술 작품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질문할 때,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이 언제 시작되었는가 하는 시간의 시작점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예술작품은 여러 가지 요소의 동시적인 결합(사람/언어/이해행위, 예술가/예술작품/예술행위)을 통해서 발생한다.

  


바르샤바에 있는 레닌, 다른 남과 있는 레닌 부인

'바르샤바에 있는 레닌'에 대한 유명한 농담이 있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한 미술 전시회에 레닌의 부인이 공산당 청년동맹의 단원과 침대에 함께 있는 그림이 전시 되었다. 그 그림의 표제가 “바르샤바에 있는 레닌”이었다. 한 당황한 관광객이 가이드에게 “그런데 레닌은 어디에 있는 거죠?”라고 물었다. 가이드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레닌은 바르샤바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농담에서 재미있는 것은 지시하는 대상과 언어 사이의 역설에 있다. 이 그림은 레닌의 아내가 다른 곳에서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데 비해, 레닌은 바르샤바에 있다고 하는 것을 교묘하게 풍자한 것이다. 이 그림이 지시하고 있는 대상은 아내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레닌이고, 이 그림의 주제(혹은 내용)는 “공산청년동맹의 젊은 단원과 침대 속에 함께 있는 레닌 부인”이다. 그러나 관광객은 이 관계를 모르고 있다. 관광객은 그림의 내용 속에서 대상을 찾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드러낸 표현을 넘어서 의도하고 있는 것을 상대방이 알아차리지 못할 때 이러한 오해가 종종 일어난다. 이른바 메타커뮤니케이션(metakommunikation)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은 일상적으로 오해(誤解)라고 부른다. 이렇듯이 어떤 작품이나 말은 이해와 오해의 가능성 가운데 개방된다.

  

신성한 세계를 전시하는 전시회

하이데거는 땅을 어떤 것이 드러나는 사건에서 감춤의 계기를 땅이라고 부른다. 사원(城)과 작품은 세계를 드러냄과 동시에 자신을 감추는 부분을 가지게 된다. 사원은 어떤 것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 아니라, 신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세계를 보여준다. 혹은 신 그 자체를 나타내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신이 거주하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작품이 모아져서 전시가 되면 전시를 통해 바쳐진 것이다. 혹은 신성화 된 것이다. 전시는 이 점에서 신성화임과 동시에 추켜세움이다. 왜 작품의 전시란 바쳐진 것이고 추켜세워지는가?

그것은 바로 작품 자체가 자신의 작품 됨의 과정에서 이러한 것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작품은 작품 됨의 과정에서 스스로 하나의 (의미 있는) 세계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작품이 된다는 것은 곧 하나의 세계를 전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강좌 소개

이 강좌는 하이데거의 후기저작『예술작품을 근원』으로 수업을 진행합니다. 하이데거는 전 생애에 걸쳐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던지며, 자신이 묻고자 하는 존재는 서양의 형이상학적 전통 가운데서 망각되어 왔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이 망각된 존재를 다시 생각하도록 여러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걸어 줍니다.

『예술작품의 근원』을 통해 존재와 예술, 예술과 진리, 진리와 비진리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이 강의에서는 하이데거가 이해한 예술의 본질에 대해서, 그리고 과연 예술이 무엇인지를 우리 스스로 진지하게 묻는 기회를 마련해 드립니다.

 
강사소개
교재소개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예술이해』
서동은 지음

『하이데거의 예술철학』
폰 헤르만

- 참고문헌
『예술작품의 근원』하이데거
『철학의 여백』박이문 지음(‘하이데거의『오솔길』’ 챕터)
『마르틴 하이데거, 너무나 근본적인』티머시클라크(김동규 역)
『하이데거의 철학사상』그리스도교철학연구소 지음
『해석학이란 무엇인가』리타드 E. 팔머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슬라보예 지젝
『서양철학과 선』존 스태프니(‘하이데거와 선불교에서 초형이상학적인 사유’ 챕터)
『화엄철학』까르마 C.C.츠앙(‘하이데거와 형이상학 그리고 불교’ 챕터)
『예술이란 무엇인가』미카엘 하우스켈러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예술과 인간』어윈 에드만
『예술의 의미』허버트 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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