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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미학포스트구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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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의 정의에서 문화비평의 실제까지, 문화비평의 기원과 좋은 문화비평의 실례를 따져보면서 문화비평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정립을 알기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 이택광의 저서 『무례한 복음』서문의 첫 구절을 소개한다.
"내게 문화비평은 생선회를 뜨는 '일'같다. 뼈에서 살을 발라내 한 겹씩 물기를 제거하고 배열하는 것, 거기에 문화비평의 묘미가 있다. 쟁반 위에 놓인 살은 더 이상 '생선'이 아니라 '회'로 거듭난다. 생선은 사라지지만 입을 즐겁게 하는 맛이 태어난다. 회가 살아 있지 않다고 투정부리는 사람은 없을 테다. 문화비평은 간장과 초장을 버무린 알싸하고 고소한, 죽은 생선의 맛을 위해 칼끝을 겨누는 행위이다."

가히 장인의 내공이 느껴지는 글이다. '문화'를 뜨는 그의 칼은 끊임없이 벼려졌고, 현재도 벼려지고 있다. 그의 블로그(http://wallflower.egloos.com)에는 거의 날마다 글이 한 편 이상씩 올라온다. 맑스주의와 정신분석 그리고 영미의 다양한 이론을 섭렵했지만 한국의 언어로 한국 사회의 문화를 논하는 그의 글들은 진정 촌철살인이라 할 만하다.




문화비평가에 대한 정의는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영어판 위키피디아(Wikipedia)에 나오는 정의를 참조한다면, “문화비평가는 기존의 문화를 전체적인 관점에서 급진적으로 비평하는 비평가”이다. 이런 비평행위는 사회비평과 사회철학과 많은 부분에서 겹친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이 용어의 쓰임새는 문화에 관한 전반적인 비평행위를 모두 지칭하는 것으로 폭이 넓어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문화에 들어가는 것은 다양하다. 문학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고, 영화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문화비평이란 기존에 있는 ‘장르비평들’그냥 모아놓은 컬렉션인가?

물론 이런 오해를 살 수도 있지만, 그냥 기존의 장르비평을 모아놓는다고 문화비평이 되는 건 아닐 것이다. 문화비평의 핵심은 장르비평의 경계를 넘어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문화비평은 장르비평과 다른 비평이라고 할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문화비평은 장르비평에서 다룰 수 없는 주제의식들을 다루고, 궁극적으로 문화의 비평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지적하고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맑스와 루카치의 물화

맑스주의 비평에서 페티시즘에 대한 맑스의 통찰을 빼놓는다는 것은 앙꼬 빠진 찐빵 같은 것이다. 페티시즘에 대한 맑스의 견해는 그가 언급하는 과학적이거나 비판적인 작업의 일종이라기보다 넓은 의미에서 이론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페티시즘에 대한 맑스의 생각은 그의 저술에서 지엽적이긴 하지만, 비평이론으로서 지위를 충분히 부여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맑스의 페티시즘 이론에 근거해서 루카치는 물화(reification)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루카치는 “사회가 상품 교환을 통해 욕구를 충족시키는 법을 배우기를 요구하는 것이 물화”라고 진술한다.


제임슨과 포스트모더니즘

미국의 맑스주의 문화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포스트모더니즘 논자 제임슨과 구분되어야 했지만, 제임슨 자신은 이 둘을 서로 연결시키면서 새로운 인식을 얻고자 한다. 물론 제임슨 자신도 맑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조우를 일컬어 “기이하거나 모순적”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포스트모던 맑스주의라는 조합이 “철 지난 기념품점”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제임슨이 맑스주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서로 결합시키는 까닭은 “탈맑스화”의 국면에서 맑스주의의 방법론을 새롭게 갱신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제임슨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은 후기 자본주의의 징후이고, 다양한 포스트구조주의 이론들은 이런 징후를 설명하기 위한 서사 전략이다. 이런 관점에서 제임슨은 탈역사적인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을 교정할 절대적 지평으로서 맑스주의를 채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임슨의 맑스주의는 독자적 체계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론 속으로 개입해 들어감으로써 현신하게 된다.


데리다와 차이

데리다는 『차이』(“Differance”)에서 차이와 힘(force)의 연결을 강조하고 있다. 니체를 참조하면서, 데리다는 차이를 “제각기 노는 활동적인 불협화음의 힘에게 부여해야하는 이름”이라고 정의한다. 이 힘은 바로 곳곳에서 “문화, 철학, 과학을 지배하는 형이상학적 문법의 체계”에 대항하는 범주이다. 체계에 대해서 데리다가 강조하는 힘은 체계의 한계를 넘어가고, 그것의 강제를 해체하는 원동력이다.

이런 데리다의 언급은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데리다가 언급하는 니체의 맥락은 “거대한 원리적 활동이야말로 무의식”이고 “의식은 힘들의 효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차이는 결코 현시하지 않는 힘의 작용이다. 차이의 자리가 이동하는 것도 바로 이런 보이지 않는 힘의 작용 때문이다. 이런 차이에 대한 초기 데리다의 논의와 법의 힘에 대한 후기 데리다의 주장이 아무런 관련성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시시때때로 발생하는 문화현상을 추적하고 분석하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택광이 최고로 치는 문화비평 중 하나는 롤랑 바르트의 『신화들』이다. 냉철한 시선, 정확한 자세, 기발한 발상은 바르트의 전매특허이자 문화비평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바르트의 비평처럼 숨어 있는 문화의 구조를 드러내는 것은 즐거움이다.

그러나 이 작업에서 문화 비평이 멈춘다면, 그것은 그냥 저냥 글쓰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바르트처럼 서늘하다가도 뜨겁게 '개입'해야 할 사안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택광은 문화적인 것에서 정치적인 것을 발굴해내는 것을 문화비평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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