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하지 않았던, 그러나 누군가는 했어야 할 이야기 – 한국 공산주의 인물사
물론 김준엽, 김창순의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5권이 있었지만 이젠 찾아볼 수가 없고, 최근 개정, 완역된 스칼라피노와 이정식의 기념비적인 저서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는 불온도서로 지정된 이력이 무색하게도 시대적 한계와 반공주의적 색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이 두 책 모두 개설서를 의도한 연구서라는 점에서 일반 독자들의 눈높이로부터 벗어나 있다.
살아있는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 역사의 주역들이 살아있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말을 걸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여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결여와 공백을 채울 수 있는 강의를 들고 박노자가 오슬로에서 찾아왔다. 매년 상하반기 2강 씩, 2년에 걸친 강좌다.식민지의 모순으로부터 우리의 현재로
신남철, 박치우, 임화, 김명식, 양명, 최성우, 김만겸, 남만춘, 한위건, 허정숙. 서구나 중국의 사상사에서 볼 수 있는 이름보다 더 낯선 그들. 그러나 이제 2강만이 공개되었음에도 그 면모는 우리를 놀라게 하고 경탄하게 한다. 그들은 1930년대에 이미 하이데거 철학을 논의하며 당대의 세계 지성사에 정통한 면모를 보여주었고, 맑스주의라는 무기로 자신의 현실, 조선의 문제를 끌어안으려 하였다.
연속강의의 시작을 알리는 1강과 2강은 각각 신남철과 박치우의 생애와 사상을 다루고 있다. 둘은 경성제국대학이라는 배경, 그리고 언론과 학술의 경력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조선’이라는 구체적인 문제와 보편적인 이론을 둘 다 놓지 않으려 했다는 문제의식에 있다.
보편적 이성, 보편적 역사의 존재를 믿으면서도 철학은 당대의 구체적인 상황에 개입하는 ‘입장’이어야 한다고 요구했던 신남철, 근대주의적 태도를 끝까지 밀고 나가 부르주아적 철학을 극복하려 하며 민족주의의 모순과 파시즘의 문제를 냉철하게 해부했던 박치우. 이들의 사유와 고민은 박제된 역사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을 거는 현재적인 사유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역사의 복원과 기억의 정치학
한국의 공산주의 문화사와 그 인물들을 돌아본다는 것은 좌파의 입장에서 신자유주의적 파시즘과 대결하려는 사람들에게만 유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금기시되고 억압된 역사를 되살리는 작업은 결국 우리 자신의 온전한 정체성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의 문제와 대결하는 것은 어느 세대에나 공통된 과제이기에, 앞선 세대의 사유와 실천은 다음 세대의 출발점이자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강좌는 단지 지워진 반쪽의 초상을 복원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현재를 다시 보게 해 줄 새로운 영감과 자양분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박노자(인문학자,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한국학 교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 출신으로 본명은 '블라디미르 티호노프'이다. 영화 「춘향전」을 보고 충격을 받아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동방학부 한국사학과를 졸업,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고대 한국의 가야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러시아 국립 인문대학교 강사를 거쳐, 한국에서 학생과 강사의 신분으로 대학 생활을 보내던 중 2001년 '박노자'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귀화하였다. 여러 책이나 기고문 등을 통해 우리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한국인보다 더욱 날카롭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진단해 온 진보적 학자이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한국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