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쓰는 자는 따로 떨어져 있고, 작품을 쓴 자는 해고된다. 해고된 자는 더욱이 그것을 알지 못한다. 이 무지가 그를 보호하고, 그를 즐겁게 하여 계속 버틸 수 있게 한다. 작가는 결코 작품이 완성되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려고' 한다.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을 세우며, 성취를 향해 달려간다. 하지만 모리스 블랑쇼가 제시하는 문학의 세계는 이런 목적 지향적 삶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다. 그가 말하는 désoeuvrement(무위)는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작품이 작가의 의도를 벗어나 스스로 존재하게 되는, 그 신비로운 순간을 가리킨다.
생각해보자. 당신이 어떤 글을 쓸 때, 처음 의도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마치 펜이 제 멋대로 움직이는 듯한, 그런 순간 말이다. 바로 그때 당신은 블랑쇼가 말하는 무위의 공간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것이다.
릴케의 표현처럼 "과일 속의 씨앗"처럼 완전히 혼자가 되는 순간
작품이 작가를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시작하는 순간
폴 발레리의 "모든 것에 대해 말하고 쓰기"의 충동
블랑쇼에 따르면, 진짜 글쓰기는 나(Je)에서 그것(Il)으로 넘어가는 순간에 시작된다. 즉, 개인적인 '나'의 경험이 익명의 무엇으로 변화하는 순간이다. 마치 릴케가 몇 주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글쓰기에 몰입했을 때처럼, 작가는 일상의 자아를 벗어나 다른 차원으로 들어간다.
"여름은 너의 집과 같아, 거기엔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이제 평원으로 들어서듯이 네 가슴속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구절에서 보듯, 진정한 창작은 자기 내면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여행이다. 하지만 이는 자기만족적인 내성이 아니라, 오히려 자아의 경계를 허무는 경험이다. 작가는 쓰는 순간 더 이상 자신이 아니게 된다.
발레리의 「에우팔리노스」는 이 딜레마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의 건축가 에우팔리노스가 파헤친 터널은 양쪽에서 동시에 시작해서 정확히 가운데서 만났다. 이는 불가능에 가까운 정밀함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마찬가지로 예술가는 무한한 것을 유한한 형식으로 담으려는 모순된 시도를 계속한다.
작품이 무위라는 것은 작가가 끝낼 수 없기에 무한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무한함은 정신의 지배력을 표현하고 발전시키는 닫힌 작업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발레리와 블랑쇼가 공유하는 창작의 역설이다.
부활한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한 말 "나를 만지지 마라"는 문학에 대한 완벽한 은유다. 진정한 작품은 우리가 완전히 소유하거나 해석으로 고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만질 수 없는 채로만 만날 수 있다.
이는 우리 시대의 정보 소비 문화와 정반대되는 태도다. 우리는 모든 것을 빠르게 이해하고, 정리하고, 활용하려 한다. 하지만 진짜 문학은 그런 식으로 접근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확실성을 흔들며, 기존의 사고틀을 해체한다.
작품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버려야 한다
낯선 것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불확실성 속에서도 머물 수 있어야 한다
고정된 해답이 아닌 끊임없는 질문이다
SNS와 유튜브로 가득한 우리 시대에 블랑쇼가 말하는 본질적 고독은 더욱 절실해 보인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고 하지만, 정작 우리는 진정한 만남을 경험하지 못한다. 블랑쇼의 고독은 외로움이 아니라 recueillement(수렴, 집중)이다. 자기 내면의 가장 깊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능력이다.
아르뜨앙 스튜디오 김재혁의 표현을 빌리면, "문학이 어느 작가의 것이 아니라, 어느 주인공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나 자신의 삶에 호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무위의 힘이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갖지 못하고, 어떤 날도 일어나지 않으며,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그를 속일 뿐이다. 나의 신이여,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매일 그를 심연으로 꿈꾸게 하는 동과 같습니다."
결국 블랑쇼의 무위는 현대인들에게 멈춤의 철학을 제안한다.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존재하는 경험을 회복하는 것이다. 작품이 완성되지도 미완성되지도 않고 그냥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태도일지도 모른다.
파스칼 키냐르가 「성적인 밤」에서 지적했듯, 우리는 "드러내기와 감추기"의 이중 명령 속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을 투명하게 공개하라고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것은 숨겨야 한다고 한다. 블랑쇼의 무위는 이런 이분법을 넘어서는 제3의 공간을 제시한다.
블랑쇼에 따르면, 글쓰기의 진정한 행복은 성공이나 인정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아의 경계가 사라지고 언어 자체와 만나는 순간의 경험이다. 작가는 이 순간 더 이상 자신이 아니면서, 동시에 가장 자기다운 존재가 된다.
이것이 바로 désoeuvrement, 무위의 역설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하게 되고, 모든 것을 포기함으로써 진정한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