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적 이미지를 위하여

장치와 인간의식 사이의 새로운 권력게임
빌렘 플루서 (Vilém Flusser, 1920-1991)
"Für eine Philosophie der Fotografie" (1983)
1
문명사적 전환점으로서의 사진

플루서는 인류의 커뮤니케이션 역사를 세 시대로 구분했다. 전역사시대(이미지 중심), 역사시대(문자 중심), 그리고 현재 진입하고 있는 탈역사시대(기술적 이미지 중심)이다.

전역사시대
동굴벽화, 우상
마술적 세계관
역사시대
문자, 책
선형적 사고
탈역사시대
사진, 디지털
네트워크적 사고

사진은 단순한 기록 매체가 아니라 인류 의식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상징한다. 전통적 그림이 세계를 직접 추상화한 것이라면, 사진은 이미 텍스트로 개념화된 세계를 다시 이미지로 번역한 것이다.

2
장치(Apparatus)의 철학

플루서 이론의 핵심 개념은 '장치'다. 카메라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특정한 프로그램을 내장한 복합적 시스템이다. 이 장치는 사진가가 무엇을 어떻게 찍을 수 있는지를 미리 결정해놓는다.

📷 카메라 장치
사진가의 선택을 미리 프로그래밍하는 시스템. 겉보기에는 도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용자를 조종한다.
🎯 프로그램
장치에 내장된 가능성의 집합. 사진가는 이 범위 내에서만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 게임
사진가와 장치 사이의 상호작용. 사진가는 장치의 규칙을 이용하면서도 그것을 교묘하게 비튼다.
사진가는 카메라를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 안에서 노는 것이다.

이는 현대 디지털 시대의 알고리즘 지배와 놀랍도록 유사한 통찰이다. 우리가 스마트폰이나 소셜미디어를 사용할 때도 플랫폼의 알고리즘이 우리의 행동과 인식을 은밀하게 조형하고 있다.

3
사진 문맹과 마술적 사고의 복귀

플루서는 현대인의 '사진 문맹' 현상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사람들은 사진을 보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읽지 못한다.

📖 텍스트 수용
역사적, 비판적 방식. 순서대로 읽어가며 논리적으로 사고한다. 시간이 일직선적이고 공간이 인과적이다.
🖼️ 이미지 수용
마술적, 제의적 방식. 전체를 동시에 보며 감정적으로 반응한다. 시간이 순환적이고 공간이 상호적이다.

특히 현대 미디어 환경에서는 텍스트의 설명적 기능이 이미지의 마술적 기능에 종속되어 있다. 사람들은 뉴스에서도 기사보다는 사진과 영상에만 주목하며,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이미지로 환원해서 이해하려 한다.

기술적 이미지들은 마술적 의식을 만들어낸다. 그것들은 그 수용자들을 마술적 의식 상태로 프로그래밍한다.
4
저항으로서의 실험 사진

그렇다면 장치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플루서는 '실험 사진'에서 그 가능성을 찾았다.

실험 사진가의 저항 전략

• 카메라 장치의 프로그램에 반하는 사진 생산
• 장치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의 카메라 사용
• 장치의 한계를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작업
• 기술 결정론에 대한 창조적 저항

이는 단순한 예술적 실험을 넘어서 인간의 자유와 창의성을 지키는 정치적 행위이기도 하다. 진정한 사진가는 장치와 '게임'을 벌이며, 장치의 규칙을 이용하면서도 교묘하게 비틀어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실험 사진가만이 사진 장치에 대항하여 인간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
🚀 현재적 의미와 전망
플루서의 통찰은 40년이 지난 지금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AI, VR, 메타버스로 이어지는 기술 발전은 플루서가 예견한 탈역사 시대의 완성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제 텍스트보다 이미지와 영상으로 소통하고, 알고리즘이 우리의 관심사와 행동을 예측하고 조형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중요한 것은 기술적 이미지를 맹목적으로 거부하거나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
핵심 메시지
기술적 이미지의 본질
사진은 현실의 복사가 아니라 개념의 번역이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투명성'은 사실 복잡한 코드 체계의 결과다.
장치와 인간의 관계
카메라는 도구가 아니라 사용자를 프로그래밍하는 시스템이다. 진정한 자유는 이 프로그램을 이해하고 창조적으로 비트는 데서 나온다.
미래를 위한 교훈
디지털 시대의 알고리즘 지배에 대한 예언적 통찰. 기술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의 필요성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