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이 독일을 점령한 후, 텅 빈 대학에서 홀로 촛불을 켜고 앉은 37세 철학자 헤겔. 그는 인류 정신의 발전사를 하나의 거대한 서사시로 완성하려 하고 있었다.

이 책은 단순한 철학서가 아니다. 인간 의식이 어떻게 발전하는지를 보여주는 정신적 모험담이다. 감각적 확신에서 시작해서 지각, 오성을 거쳐 마침내 절대정신에 도달하는 긴 여정을 그려낸다.

두 자기의식이 만나면 생사를 건 투쟁이 벌어진다. 한쪽은 죽음을 무릅쓰고 인정을 요구하는 주인이 되고, 다른 한쪽은 생명을 택하고 복종하는 노예가 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노예는 노동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실현한다.

정(正)과 반(反)이 충돌하여 합(合)을 이루는 과정. 이것이 바로 세계 전체를 움직이는 원리다. 역사도, 사회도, 인간의 사유도 모두 이 변증법적 운동을 따라 발전한다.

의식은 마침내 자신이 곧 절대정신의 한 모습임을 깨닫는다. 주체와 객체, 사유와 존재, 개별과 보편이 하나로 통합되는 순간이다. 정신은 스스로를 아는 정신이 된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어려워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의 길이다. 안일한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철학의 역할이다.

새벽 햇살이 서재로 스며들 때, 헤겔은 원고를 완성했다. 이 책은 훗날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변증법, 사르트르의 타자 철학, 20세기 프랑스 철학계의 헤겔 열풍으로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