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첫 문장은 너무도 유명하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닮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All happy families are alike; each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이 문장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그것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적 명제다. 행복에는 하나의 길이 있고, 불행에는 무한한 갈림길이 있다. 그리고 자유란 그 갈림길로 걸어 들어가는 행위다.
레프 톨스토이(Lev Tolstoy, 1828~1910)가 『안나 카레니나』를 쓴 1870년대의 러시아는 격변의 시대였다. 농노해방령(1861)이 발효된 지 15년이 지났고, 서구화 논쟁이 지식인 사회를 달구고 있었으며, 여성의 사회적 위치에 관한 물음이 처음으로 공론의 장에 올라오고 있었다. 안나는 이 시대의 균열을 몸으로 통과한 인물이다.
그녀는 왜 죽었는가. 이 물음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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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회라는 감옥 — 뒤르켐의 아노미와 19세기 러시아
안나가 살았던 19세기 후반 러시아 상류 사회는 철저한 규범의 세계였다. 결혼은 성사가 아니라 계약이었고, 계약은 공개적으로 파기될 수 없었다. 간통은 비밀이기만 하면 묵인되었지만, 공개되면 사회적 사형이었다.
안나가 선택한 것은 비밀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브론스키와의 관계를 숨기는 대신 공개했다. 카레닌과의 결혼에서 법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녀는 자신의 욕망과 선택을 숨기지 않기로 했다. 그 순간부터 사회는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 1858~1917)은 『자살론』(Le Suicide, 1897)에서 자살의 유형을 분류하면서 아노미적 자살(anomic suicide)을 제시한다. 아노미(anomie)란 규범이 해체되거나 개인이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이탈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 개념을 안나에게 적용하면 역설이 생긴다. 안나를 죽인 것은 아노미, 즉 규범의 부재가 아니라 규범의 과잉이었다. 사회는 너무 촘촘하게 짜여 있어서, 그 망 밖으로 나간 사람을 다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직장을 그만두고 자기 일을 시작한 사람, 이혼을 선택한 사람, 주류의 길을 거부한 사람에게 사회가 보내는 시선을 생각해보라. 제도 밖으로 나간 선택은 자유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보호막의 상실이다. 안나는 그 상실의 극한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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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유의 역설 — 사르트르의 '선고된 자유'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L'homme est condamné à être libre)."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가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 1943)에서 던진 이 명제는 안나 카레니나의 삶을 설명하는 데 놀라울 만큼 정확하다. 사르트르에게 자유는 축복이 아니라 형벌이다.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온전히 감당해야 하며, 선택하지 않는 것조차 하나의 선택이다. 선택의 포기는 자기기만(mauvaise foi, bad faith)이다.
안나가 처음 브론스키를 만난 순간을 떠올려보자. 기차역에서의 첫 만남, 무도회에서의 왈츠. 그녀는 분명히 무언가를 느꼈다. 그런데 느낌이 있다는 것과 그 느낌에 따르는 것은 다르다. 수천 명의 여성들이 같은 감정을 느끼고도 선택하지 않았다. 안나는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되돌릴 수 없었다.
사르트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안나는 자신의 실존에 충실했다. 사회적 역할(카레닌의 아내, 세료자의 어머니, 상류사회의 구성원)이라는 기성복 대신, 자신이 직접 재단한 옷을 입으려 했다. 그러나 그 옷은 사회가 받아들이지 않는 재단이었다.
자유로운 선택은 자유로운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 안나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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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카레닌이라는 인물 — 시스템이 인간의 얼굴을 할 때
카레닌은 악인이 아니다. 톨스토이는 그를 악인으로 그리지 않았다. 그는 유능한 관료이고, 도덕적으로 엄격하며, 안나를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했다. 안나가 브론스키와의 아이를 낳을 때, 자신이 아버지가 아님을 알면서도 용서하려 했다. 그 장면은 소설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다.
그렇다면 왜 카레닌은 안나를 죽인 시스템의 일부인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법철학』(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1820)에서 인륜(Sittlichkeit)의 개념을 제시한다. 가족, 시민사회, 국가로 이어지는 인륜적 질서 안에서 개인은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다. 추상적 개인의 자유(자의)는 참된 자유가 아니고, 공동체의 법과 관습 안에서 실현되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라는 논리다.
카레닌은 헤겔적 인간이다. 그는 결혼이라는 인륜적 제도를, 사회적 체면이라는 규범을, 법적 절차라는 형식을 성실하게 따른다. 그에게 안나의 이탈은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공동체 질서에 대한 위반이다. 그래서 그는 이혼을 거부한다. 이혼은 안나의 자유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수치를 공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스템이 인간의 얼굴을 할 때가 가장 무섭다. 카레닌은 나쁜 의도 없이, 선한 감정조차 지니면서, 안나를 철창 안에 가뒀다. 이것이 구조적 억압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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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레빈이라는 거울 — 또 다른 삶의 가능성
『안나 카레니나』는 안나만의 소설이 아니다. 콘스탄틴 레빈(Konstantin Levin)이라는 인물이 소설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리고 많은 독자들이 레빈이 톨스토이 자신의 분신이라고 읽는다.
레빈은 안나와 정반대의 인물처럼 보인다. 그는 모스크바 사교계를 떠나 농촌에서 직접 땅을 일구며 산다. 키티와의 사랑에서도 처음에는 거절당하고, 돌아오는 길에 눈 속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는 결국 키티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
레빈이 소설 말미에서 경험하는 깨달음의 장면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우연히 만난 농부의 말에서 "신을 위해, 영혼을 위해 산다"는 것의 의미를 갑자기 이해한다. 이 장면은 러시아 정교회적 맥락이 강하지만, 철학적으로는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의 실존의 단계론과 닮아 있다.
키르케고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Enten-Eller, 1843)와 『불안의 개념』(Begrebet Angest, 1844)에서 실존의 세 단계를 제시한다. 미학적 단계(쾌락과 감각적 즐거움의 추구), 윤리적 단계(의무와 도덕적 책임의 수용), 종교적 단계(신 앞의 단독자로 서는 것)가 그것이다. 레빈은 이 세 단계를 소설 안에서 차례로 통과한다. 그리고 안나는 미학적 단계에서 윤리적 단계로의 이행을 거부하다가 파멸한다.
그러나 여기서 섣불리 안나를 실패로, 레빈을 성공으로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 톨스토이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레빈의 깨달음도 완전하지 않고, 안나의 선택도 단순한 충동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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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질투와 소유 — 사랑이 집착이 되는 순간
안나의 죽음은 브론스키의 배신 때문이 아니다. 브론스키는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그녀 곁에 있으려 했다. 그렇다면 안나를 파괴한 것은 무엇인가.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안나는 질투에 잠식된다. 브론스키가 외출하면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난다고 확신한다. 그가 돌아오면 사랑을 확인받으려 하고, 확인을 받아도 다시 의심한다. 이 악순환은 안나 스스로도 인식하지만 멈출 수 없다.
프리드리히 헤겔이 『정신현상학』(Phänomenologie des Geistes, 1807)에서 분석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사랑 관계에 적용해보면 흥미롭다. 인정(Anerkennung)을 둘러싼 투쟁에서, 타인의 인정을 갈망할수록 스스로 노예가 된다. 안나는 브론스키의 사랑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했다. 사회에서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그에게 남은 유일한 정체성의 근거가 브론스키의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사랑이 흔들린다는 의심은 곧 자신의 존재가 소멸한다는 공포였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은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 1956)에서 사랑과 집착을 구분한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소유하려 하지 않고, 상대의 성장을 바란다. 집착은 상대를 통해 자신의 공허를 채우려 한다. 안나의 사랑은 처음에는 전자였으나, 사회적 고립이 깊어지면서 후자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 변화는 안나의 탓이 아니라 그녀를 고립으로 몰아넣은 사회 구조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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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톨스토이의 시선 — 작가는 안나를 심판했는가
여기서 불편한 질문 하나를 해야 한다. 톨스토이는 안나에 대해 공정했는가.
소설의 제사(題詞)는 이것이다. "복수는 내 것이니 내가 갚으리라(Vengeance is mine; I will repay)." 로마서 12장 19절이다. 이 성경 구절은 안나의 운명에 대한 작가의 주석처럼 읽힌다. 간통과 사회 규범의 이탈은 신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
실제로 톨스토이는 안나를 처음 구상할 때 매우 적대적인 시선을 가졌다고 알려진다. 그러나 소설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안나는 점차 복잡하고 매력적인 인물로 진화했다. 많은 독자들이 안나에게 동정과 공감을 느끼는 것은, 톨스토이의 의도를 거슬러서가 아니라 그의 서술 자체가 그것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학의 역설이다. 위대한 작가는 자신의 도덕적 판단을 인물에게 온전히 관철시키지 못한다. 인물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는 『제2의 성』(Le Deuxième Sexe, 1949)에서 안나 카레니나 류의 여성 인물들이 남성 작가의 시선 안에서 어떻게 대상화되는지를 분석한다. 톨스토이의 안나 역시 어느 정도는 19세기 남성의 시선으로 창조된 여성이다. 하지만 그 시선을 뚫고 나오는 안나의 생생함이 이 소설을 고전으로 만든다.
즉, 작가는 안나를 심판했다. 그러나 안나는 심판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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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기차라는 상징 — 근대성의 폭력
기차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소설은 기차역의 만남으로 시작하고, 기차 아래서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 사이에 기차는 여러 번 등장하며 매번 불길한 예감을 동반한다.
19세기 중반 러시아에 철도가 놓이기 시작했다. 기차는 근대 문명의 상징이었다. 속도, 효율, 기계, 자본. 그것은 전통적 러시아의 삶을 뒤흔드는 힘이었다. 톨스토이는 기차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이 가져오는 근대화가 러시아 농촌 공동체와 전통적 가치를 파괴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근대성을 폭주하는 기차에 빗댄 바 있다. 역사는 멈추지 않는 기차처럼 달려가고, 그 기차에 치이는 자들이 있다. 안나는 문자 그대로 그 기차에 치였다. 근대성의 이중성—해방을 약속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억압을 만들어내는 그 역설—이 안나의 몸 위에서 실현되었다.
기차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역부가 기차에 치여 죽는다. 안나는 이것을 나쁜 징조로 느낀다. 이 복선은 지나치게 명시적이지만, 톨스토이의 상징 체계 안에서 기차는 처음부터 죽음과 연결되어 있었다. 문명의 속도가 인간을 압도할 때, 그것을 거스르려는 자는 파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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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도덕의 기원 — 니체의 물음과 톨스토이의 대답
톨스토이와 니체는 거의 동시대 인물이지만, 세계관에서는 정반대에 서 있었다.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기독교적 도덕이 약자의 원한(ressentiment)에서 비롯된 노예도덕이라고 보았고, 그 도덕을 넘어서는 초인(Übermensch)을 제시했다. 반면 톨스토이는 기독교적 사랑과 도덕으로 귀환하는 것이 인류의 구원이라고 보았다.
『안나 카레니나』는 어느 편에 서 있는가. 표면적으로는 톨스토이 편이다. 도덕 규범을 어긴 안나는 파멸하고, 도덕적 각성에 이른 레빈은 구원된다. 그러나 소설의 내부에는 니체적 물음이 잠복해 있다. 안나를 심판하는 도덕은 과연 어디서 왔는가. 그 도덕은 정의로운가, 아니면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이해를 보호하는 규범인가.
사교계 여성들이 안나를 배척할 때, 그들 중 상당수는 자신도 비밀스러운 연애를 하고 있었다. 차이는 단 하나였다. 그들은 숨겼고, 안나는 숨기지 않았다. 위선을 지키면 도덕적이고, 진실을 드러내면 부도덕한 것이 된다. 이 역설은 도덕의 내용이 아니라 도덕의 수행이 중요한 사회의 본질을 폭로한다.
어빙 고프만(Erving Goffman, 1922~1982)은 『일상생활에서의 자아 표현』(The Presentation of Self in Everyday Life, 1959)에서 사회적 삶을 연극(dramaturgical model)으로 분석한다. 우리는 무대 위에서 역할을 수행하고, 무대 뒤에서 다른 얼굴을 가진다. 안나는 무대 위에서도 무대 뒤의 얼굴을 드러냈다. 그것이 그녀의 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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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지금 여기서 — 우리 시대의 안나들
『안나 카레니나』는 1878년의 소설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루는 문제는 지금도 살아 있다.
제도 안에 있으면 보호받고, 제도 밖으로 나가면 버려진다. 결혼 제도, 직업 제도, 학벌 제도, 이 모든 제도는 그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안전망이지만,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배제의 장벽이다. 안나의 이야기는 특정한 시대의 특수한 비극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구조 사이의 영구적 긴장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 시대에도 안나들이 있다. 이혼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시선, 비혼을 선택한 사람들이 받는 압력, 주류적 경력 경로를 벗어난 사람들이 경험하는 배제. 형태는 바뀌었지만 구조는 닮아 있다. 제도는 자신을 위반하는 자에게 징벌을 내린다. 그리고 그 징벌은 법률이 아니라 시선과 배제라는 형태로 온다.
철학자 마르타 누스바움(Martha Nussbaum, 1947~)은 『감정의 격동』(Upheavals of Thought, 2001)에서 문학이 도덕 철학의 실험실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소설 속 인물의 삶을 통해 실제 삶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도덕적 복잡성을 연습한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는다는 것은 안나가 되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우리가 타인의 선택을 심판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
소설은 이것을 요청한다. 판단하기 전에, 이해하라. 심판하기 전에, 느껴라. 기차는 이미 달리고 있다. 문제는 누가 그 기차 앞에 서게 되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