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문장으로 보르헤스의 단편 「바벨의 도서관」(La Biblioteca de Babel, 1941)은 시작된다. 우주와 도서관을 등치시키는 이 선언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형이상학적 테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어로 이루어져 있고, 언어로 이루어진 모든 것은 이 도서관 안에 있다.
도서관의 구조는 이렇다. 무한히 이어지는 육각형 방들. 각 방에는 32권의 책이 있다. 각 책은 410페이지, 각 페이지는 40줄, 각 줄은 80개의 문자 기호로 이루어져 있다. 문자 기호는 25개다. 그러므로 이 도서관에는 25의 거듭제곱으로 조합 가능한 모든 책이 존재한다. 의미 있는 책도, 의미 없는 책도, 당신의 삶을 예언한 책도, 그 예언을 반박하는 책도, 이 에세이의 정확한 텍스트도, 그 텍스트의 모든 오류 버전도.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의 작가다. 평생 도서관 사서로 일했고, 말년에는 시력을 거의 잃었다. 역설적이게도, 눈이 먼 사람이 도서관장이 되었다. 그는 이 아이러니를 유머로 받아들였다. "신은 동시에 밤과 책을 나에게 주었다"고 그는 썼다.
그러나 「바벨의 도서관」이 제기하는 물음은 유머를 넘어선다. 모든 것이 존재하는 곳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무한한 가능성은 자유인가, 감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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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한의 역설 — 전부를 담으면 아무것도 없다
바벨의 도서관이 가진 첫 번째 철학적 충격은 전체성(totality)의 역설이다.
도서관에는 모든 책이 있다. 진리를 담은 책도 있다. 그러나 그 진리를 반박하는 책도 있고, 그 반박을 재반박하는 책도 있고, 같은 내용을 다른 언어로 표현한 책도 있다. 그리고 의미 없는 문자들의 나열로 이루어진 책이 압도적 다수다. 당신이 찾는 단 한 권의 진리의 책을 찾아내려면, 그보다 무한히 많은 가짜 책들을 헤쳐 나가야 한다.
여기서 전체성은 오히려 허무를 낳는다.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은 어떤 것도 특별하지 않다는 뜻이 된다. 탐색의 방향을 잃어버린다. 도서관의 주민들—이 단편에서 인류는 도서관 속에서 살아간다—은 이 무한함 앞에서 광기에 빠지거나 종교적 황홀경에 빠진다.
수학자 게오르크 칸토어(Georg Cantor, 1845~1918)는 무한집합의 이론을 정립하면서 비슷한 아이러니를 발견했다. 그는 무한에도 크기의 차이가 있음을 증명했다. 자연수 전체의 무한보다 실수 전체의 무한이 더 크다. 무한은 단일하지 않다. 이 발견은 동료 수학자들로부터 광기라는 비난을 받았고, 칸토어는 실제로 반복적인 신경쇠약을 겪었다. 무한을 직접 다룬 사람의 대가였다.
보르헤스의 도서관 주민들이 겪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들은 무한 속에서 방향을 잃은 존재들이다. 우리는 인터넷 시대에 이것을 조금 안다. 검색창에 무언가를 쳐 넣는 순간 쏟아지는 수백만 개의 결과물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게 되는가. 오히려 아무것도 모른다는 감각이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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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언어가 곧 세계다 — 비트겐슈타인과의 만남
「바벨의 도서관」의 핵심 전제는 이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25개의 문자 기호로 표현 가능하다. 그 조합의 전체가 도서관이다. 달리 말하면, 세계는 언어로 남김없이 포착된다.
이 전제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의 전기 철학, 즉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1921)와 놀랍도록 맞닿아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책의 유명한 명제에서 이렇게 썼다. "언어의 한계가 곧 내 세계의 한계다(Die Grenzen meiner Sprache bedeuten die Grenzen meiner Welt)."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언어관에 따르면, 언어는 세계의 사실들을 그림처럼 묘사한다.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고, 사실들의 총체가 세계다.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신, 윤리, 삶의 의미—은 보여질 수는 있어도 말해질 수는 없다. 그것들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보르헤스의 도서관은 이 비트겐슈타인적 세계의 공간화다. 25개 기호의 조합으로 표현 가능한 모든 것이 책이 되어 도서관 선반에 꽂혀 있다. 그러니까 도서관은 언어의 총체이고, 언어의 총체가 세계다. 도서관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니, 도서관 밖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언어 밖을 언어로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 즉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1953)에서 그는 이 그림을 수정한다. 언어는 세계를 단일하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형태(Lebensform)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된다. 같은 단어도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다. 언어는 하나의 체계가 아니라 수많은 언어 게임(Sprachspiel)들의 집합이다.
이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시각에서 바벨의 도서관을 보면 다른 문제가 드러난다. 책들이 의미를 가지려면 그것을 읽는 맥락이 필요하다. 삶이 필요하다. 모든 책이 존재한다고 해서 모든 의미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의미는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는 행위 속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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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을 찾아서 — 황금책의 신화와 인간의 욕망
도서관의 주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무한에 반응한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른바 '황금책(el libro total)'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다.
황금책이란 다른 모든 책의 요약본이다. 도서관의 비밀을 담고 있는 단 한 권의 완전한 책. 그 책을 찾으면 도서관의 의미가 밝혀지고, 혼돈이 질서가 되며, 방랑이 끝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을 찾기 위해 평생을 헤맨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신이 쓴 책이라고 믿는다.
이 탐색은 철학적으로 인류의 오래된 욕망과 닮아 있다. 완전한 지식, 세계를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는 대이론, 신의 눈으로 바라본 전체성—이것들은 철학과 신학이 오랫동안 추구해온 것이다.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348경)의 이데아론은 이 욕망의 고전적 형식이다. 감각으로 지각되는 개별 사물들 너머에 영원하고 완전한 이데아가 있다. 그림자 같은 현실 세계를 넘어서 이데아를 인식하는 것이 참된 철학이다. 플라톤의 『국가』(Politeia)에 등장하는 유명한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안에 갇혀 그림자를 실재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고, 동굴 밖으로 나가 태양—이데아의 원천—을 직접 보는 사람이 있다. 황금책을 찾는 도서관 주민들은 동굴 속에서 동굴 밖을 상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황금책이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 더 교묘하게, 황금책은 반드시 존재한다고 말한다. 25개 기호의 모든 조합이 도서관에 있다면, 도서관의 완전한 카탈로그도 그 안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카탈로그를 정확하게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만 찾을 수 없는 것. 이것이 신에 대한 가장 철학적인 정의 중 하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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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바벨탑의 기억 — 언어의 분열과 불가능한 소통
작품의 제목 '바벨(Babel)'은 구약성경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이야기를 가리킨다. 인류가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 하자 신이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만들어 서로 소통할 수 없게 했다는 이야기.
바벨의 어원은 히브리어로 '혼돈(balal)'과 연결된다. 도서관의 이름이 바벨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도서관에는 모든 언어로 쓰인 모든 책이 있다. 그러나 그 언어들은 서로 소통하지 않는다. 어떤 책이 어떤 언어로 쓰여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도 없다. 진리처럼 보이는 문장이 사실은 무작위적 문자 배열일 수 있고, 무의미하게 보이는 기호 나열이 어떤 알려지지 않은 언어로는 심오한 진리일 수도 있다.
이것은 현대 언어철학이 발견한 근본적 문제와 맞닿는다.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는 『일반언어학 강의』(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 1916)에서 언어 기호는 자의적(arbitraire)이라고 주장했다. '나무'라는 소리와 실제 나무 사이에는 필연적 연결이 없다. 한국어 사용자가 '나무'라고 부르는 것을 영어 사용자는 'tree'라고 부른다. 어느 쪽도 더 본질적이지 않다. 기호와 의미의 관계는 사회적 합의일 뿐이다.
바벨의 도서관에서 이 자의성은 극단화된다. 25개 기호의 조합이 의미를 갖는지 갖지 않는지는 어떤 언어 공동체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 도서관에는 알려진 언어들뿐만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언어들로 쓰인 책도 있다. 우리가 해독하지 못한 기호 체계, 존재했지만 사라진 언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언어. 그 의미는 누가 보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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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거울과 미로 — 보르헤스 세계의 구조
보르헤스의 문학에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미지들이 있다. 거울, 미로, 무한, 꿈, 시간, 이중성. 「바벨의 도서관」은 이 중에서 특히 미로의 이미지를 공간화한 작품이다.
미로(labyrinth)는 단순히 복잡한 통로가 아니다. 그것은 인식론적 상황의 은유다. 길이 있다는 것은 안다. 출구가 있다는 것도 (아마) 안다. 그러나 지금 어디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는 모른다. 지도 없는 공간. 기준 없는 탐색.
도서관은 이 미로의 완성된 형태다. 육각형 방들이 무한히 이어진다. 모든 방은 같은 구조다. 방향을 잃기 쉽고, 이전에 지나쳤던 방인지 새로운 방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도서관 주민들은 이 구조 안에서 태어나 늙고 죽는다. 출구를 찾으려는 사람도 있고, 출구 따위는 없다고 절망하는 사람도 있으며, 도서관 자체가 의미이므로 출구가 필요 없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실존주의 철학, 특히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의 부조리(absurde) 개념은 이 상황을 철학적으로 정확하게 포착한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1942)에서 부조리를 이렇게 정의한다. 의미를 갈망하는 인간과 의미를 제공하지 않는 세계 사이의 충돌. 인간은 이유를 묻지만 세계는 침묵한다.
바벨의 도서관은 이 부조리의 건축적 형상이다. 모든 답이 어딘가에 있다. 그러나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찾을 방법도 없다. 그러면서도 살아가야 한다. 도서관의 주민들은 카뮈의 시지프다. 매일 언덕을 구르는 바위를 밀어 올리지만,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한다.
카뮈는 시지프가 행복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보르헤스의 도서관 주민들이 행복한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탐색한다. 그것만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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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질서의 환상 — 사서와 분류의 불가능성
도서관에는 사서가 있다. 그러나 이 도서관에서 사서는 전지전능한 지식의 수호자가 아니다. 사서 역시 도서관의 주민이다. 책들의 배치를 완전하게 파악하는 사서는 없다. 어떤 책이 어디 있는지, 그 책이 의미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것은 근대 지식 체계의 핵심 문제를 건드린다. 지식을 분류하고 체계화하려는 인간의 욕망. 도서관의 역사는 분류의 역사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사서 칼리마코스(Callimachus, 기원전 305~240경)는 최초의 서지학(書誌學) 목록인 『피나케스(Pinakes)』를 만들었다. 근대의 듀이 십진분류법(Dewey Decimal Classification, 1876)은 지식을 10개의 대분류로 나누고 각각을 세분화하는 체계다. 분류한다는 것은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고, 질서는 의미의 기초다.
그러나 보르헤스의 도서관은 이 분류의 욕망이 원칙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책들은 무작위로 배치되어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배치 자체가 어떤 원칙을 따르는지 알 수 없다. 분류 체계를 만들려 해도, 그 분류 체계 자체도 도서관 안에 책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분류 체계를 반박하는 책도 존재한다. 어떤 분류도 최종적이지 않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말과 사물』(Les Mots et les Choses, 1966)의 서문에서 보르헤스의 이 단편을 언급하며 이렇게 썼다. 보르헤스의 분류법이 우리에게 불안감을 주는 것은 그것이 혼란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분류의 공통 장소(le site commun)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분류가 가능하려면 분류하는 행위가 일어나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바벨의 도서관은 그 공간 자체를 해체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분류들—나라, 인종, 장르, 정상과 비정상—이 얼마나 임의적인지를 직시하는 것. 그것이 보르헤스가 독자에게 요청하는 철학적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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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시간의 도서관 — 기억, 망각, 그리고 정체성
바벨의 도서관에는 흥미로운 설정이 하나 더 있다. 주민들은 세대를 이어가며 도서관 안에서 살아간다. 그들에게 도서관 밖의 세계는 개념으로만 존재하거나 아예 없다.
이것은 기억과 정체성의 문제로 이어진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가 읽은 책들의 총합인가. 우리가 속한 언어 공동체의 산물인가. 도서관의 주민들은 도서관이라는 환경 안에서 도서관이 제공하는 텍스트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이해한다. 그 텍스트들이 진리인지 허구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이 그들의 세계다.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인간지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689)에서 인격적 정체성(personal identity)을 기억의 연속성으로 설명했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것들의 연속체다. 기억이 없으면 정체성도 없다.
보르헤스의 도서관에서 이 로크적 정체성은 위기에 처한다. 내가 기억하는 것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내가 읽은 책이 진리를 담고 있는지, 아니면 무작위적 기호들의 나열인지 알 수 없다. 내 기억의 원천인 텍스트들이 신뢰할 수 없다면, 그 위에 세워진 정체성 역시 흔들린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가 『성찰』(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1641)에서 모든 것을 의심한 끝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확실성에 도달했을 때, 그것은 사유하는 주체의 존재를 기초로 삼았다. 그러나 바벨의 도서관 안에서 사유하는 존재는 자신이 읽은 텍스트들로 만들어진다. 그 텍스트들이 의심스럽다면, 코기토의 기반 자체가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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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해체의 도서관 — 텍스트에는 저자가 없다
「바벨의 도서관」이 문학 이론적으로도 혁명적인 것은, 저자(author)의 개념을 무력화하기 때문이다.
이 도서관의 책들은 아무도 쓰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누가 썼는지 알 수 없다. 25개 기호의 모든 조합이 있으므로, 어떤 책도 특정한 의도를 가진 저자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없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해당하는 텍스트가 이 도서관 어딘가에 있다면, 그것은 셰익스피어가 의도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 가능한 기호 조합의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의 유명한 선언인 「저자의 죽음」(La mort de l'auteur, 1967)을 선취한다. 바르트는 텍스트의 의미는 저자의 의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읽기 행위 속에서 생성된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텍스트를 쓰는 순간 죽는다. 그 텍스트는 저자로부터 분리되어 독자에게 속한다.
보르헤스의 도서관은 이 선언을 구조 자체로 실현한다. 처음부터 저자가 없다. 기호의 조합이 있을 뿐이다. 의미는 오직 읽는 자가 부여한다. 같은 텍스트를 두 사람이 읽어도 다른 의미를 얻는다. 어느 해석이 올바른가. 도서관은 대답하지 않는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해체론(deconstruction)은 이 지점에서 보르헤스와 만난다.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De la grammatologie, 1967)에서 텍스트는 항상 자기 안에 모순과 균열을 품고 있다고 주장했다. 의미는 고정되지 않는다. 하나의 기호는 다른 기호들과의 차이를 통해서만 의미를 갖고, 그 차이는 끝없이 연기된다. 데리다는 이것을 차연(différance)이라고 불렀다.
바벨의 도서관은 이 차연의 공간화다. 의미는 항상 다른 책 속에, 다른 방 속에, 도달하지 못한 어딘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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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지금 여기서 — 검색 엔진 시대의 바벨
보르헤스의 도서관이 발표된 1941년 이후 80여 년이 지났다. 그 사이 인류는 실제로 바벨의 도서관을 건설했다.
인터넷에는 현재 수백억 개의 웹페이지가 존재한다. 매 분마다 수백만 개의 새로운 텍스트가 추가된다. 의미 있는 텍스트와 의미 없는 텍스트가 뒤섞여 있다. 진리와 허위가 구분 없이 공존한다. 사용자들은 이 무한한 공간에서 방향을 잡기 위해 검색 엔진에 의존한다. 구글은 이 도서관의 사서다. 그러나 그 사서가 어떤 원칙으로 책들을 정렬하는지는 알고리즘의 블랙박스 안에 있다.
인공지능의 등장은 이 상황을 한 단계 더 복잡하게 만든다. 대형 언어 모델(LLM)들은 인터넷에 존재하는 텍스트들을 학습해 언어를 생성한다. 그것이 생성하는 텍스트는 의미 있는가, 없는가. 그것은 진리를 말하는가, 그럴듯한 기호 조합을 만드는가. 보르헤스의 질문이 다시 울린다.
그러나 「바벨의 도서관」이 허무주의로 끝나지 않는 것은, 화자가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도서관은 무한하고 주기적이다. 만일 이상적인 여행자가 어떤 방향으로든 여행한다면, 수 세기 후에 같은 책들이 같은 무질서 속에서 반복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반복이 나에게는 하나의 질서다.
혼돈 안에서 질서의 가능성을 찾는 것. 무한 앞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는 것. 의미를 알 수 없어도 탐색을 계속하는 것. 그것이 바벨의 도서관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의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