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Stephen Dedalus)는 어느 날 영국인 학장에게 깔때기를 가리키며 이 단어를 쓴다. 학장은 못 알아듣는다. 그는 funnel이라고 해야 한다고 말한다. 스티븐은 그 순간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나는 영어로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언어는 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만든 사람도, 그것을 지배하는 사람도, 나보다 먼저 그 언어의 주인이라고 선언한 사람도 모두 내가 아니다.
나중에 스티븐은 혼자 사전을 뒤진다. tundish는 실제로 영어에 있는 단어였다. 오히려 더 오래된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 순간 그가 깨달은 것이었다. 언어 안에서 나는 이방인이다.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1882~1941)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1916)에서 이 장면을 쓴 것은 단순히 식민지 아일랜드 청년의 언어적 소외를 묘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훨씬 더 넓은 철학적 물음의 문을 여는 열쇠였다. 인간은 언어 안에서 태어난다. 그 언어는 내가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주어진 언어로 생각하고, 이미 주어진 언어로 세계를 본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는 것은 정말 내가 말하는 것인가.
━━━━━━━━━━━━━━━━━━━━━━━━━━━━━━━━━━━━━━━━
2. 세 개의 그물 — 국가, 종교, 언어
소설 후반부에서 스티븐은 친구 데이빈(Davin)과 논쟁한다. 데이빈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다. 그는 스티븐에게 아일랜드를 위해 싸우라고, 아일랜드어를 배우라고, 아일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라고 촉구한다.
스티븐은 거부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국가, 언어, 종교. 이 세 개의 그물이 나의 영혼을 붙잡으려 한다."
이 세 그물은 스티븐에게 탈출의 대상이다. 그런데 왜인가. 이것들은 보통 사람들이 정체성의 근거로 삼는 것들 아닌가.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이고, 어떤 언어를 쓰고, 어떤 종교를 믿는다—이것이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주지 않는가.
스티븐은 그 물음에 정확히 반박한다. 그것들이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여야 하는지를 강제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아일랜드인"이라는 정체성을 요구한다. 종교는 "가톨릭 신자"라는 규범을 부과한다. 언어는 이미 만들어진 세계관의 틀을 제공한다. 이 모든 것이 나보다 먼저 존재했고, 나는 그 안으로 태어났다.
이것은 단순히 조이스 개인의 반항이 아니다. 20세기 실존주의 철학과 정면으로 맞닿는 물음이다.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 1943)에서 인간 존재의 핵심을 이렇게 정의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 의자는 먼저 의자의 설계도—본질—가 있고, 그 설계도에 따라 만들어진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인간에게는 미리 주어진 본질이 없다. 나는 먼저 존재하고, 그 이후에 내가 무엇인지를 만들어간다.
스티븐이 세 그물을 거부하는 것은 바로 이 사르트르적 선언이다. 나는 아일랜드인으로 태어났지만, 아일랜드인이기를 선택할 필요는 없다. 나는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지만, 가톨릭 신자이기를 유지할 필요는 없다. 이 모든 것은 주어진 것이지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되어야 하는 것은 내가 선택해야 한다.
━━━━━━━━━━━━━━━━━━━━━━━━━━━━━━━━━━━━━━━━
3. 가톨릭의 그물 — 죄의 언어로 세계를 보다
소설의 가장 강렬한 대목 중 하나는 3장의 지옥 설교 장면이다. 학교 피정(retreat) 행사에서 아넬 신부(Father Arnall)가 지옥의 형벌을 묘사한다. 냄새, 소리, 육체적 고통의 극한. 소설 속 설교는 여러 페이지에 걸쳐 세밀하게 재현된다.
이 설교를 듣는 스티븐은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는 전날 밤 성매매 여성과 잠자리를 가진 터였다. 그 경험이 지옥의 언어와 충돌한다. 그는 구토 증세를 느끼고, 고해성사를 하러 간다. 고해 후 그는 해방감을 느낀다. 한동안 그는 독실한 신앙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조이스는 이 회심을 아름답게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티븐의 신앙 생활은 강박적이고, 자기 처벌적이며, 육체에 대한 혐오로 가득하다. 나쁜 냄새를 억지로 맡고, 불편한 자세를 유지하며, 감각을 학대하는 방식으로 신앙을 실천한다. 이것은 신앙인가, 자기 파괴인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1887)에서 기독교 도덕의 기원을 해부했다. 그는 기독교 도덕이 강자에 대한 약자의 르상티망(ressentiment)—원한 감정—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육체를 악으로, 영혼을 선으로 규정하는 이 도덕은 삶 자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죄의 언어는 인간을 작게 만든다. 자기를 혐오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혐오를 통해 지배한다.
스티븐의 피정 체험은 정확히 이 니체적 분석의 문학적 형상화다. 지옥 설교는 공포를 통해 복종을 이끌어낸다. 공포가 클수록 순응이 철저해진다. 스티븐은 이 메커니즘에 한번 포획된다. 그러나 그 포획이 자기 파괴의 냄새를 풍기는 순간, 그는 다시 탈출을 모색한다.
━━━━━━━━━━━━━━━━━━━━━━━━━━━━━━━━━━━━━━━━
4. 미적 이론 — 스티븐의 토마스 아퀴나스 읽기
소설 5장에서 스티븐은 친구 린치(Lynch)에게 자신의 미학 이론을 설명한다. 그 이론의 원천은 뜻밖에도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다.
아퀴나스는 아름다움의 세 조건을 제시했다. 통일성(integritas), 조화(consonantia), 광채(claritas). 스티븐은 이 세 개념을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한다.
통일성은 대상을 주변으로부터 구별하여 하나의 온전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 다음 조화는 대상 내부의 부분들이 서로 맞물리는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광채는—스티븐의 해석에서 이것이 핵심인데—대상의 본질이 빛나는 순간이다. 그 순간 아퀴나스의 언어로는 사물의 '존재 자체'가 드러난다. 스티븐의 언어로는 심미적 충격, 즉 에피파니(epiphany)가 일어난다.
에피파니(epiphany)는 원래 신학적 용어다. 예수의 탄생을 동방박사들이 목격한 현현(顯現)을 가리키는 말. 조이스는 이 개념을 세속화했다. 에피파니는 평범한 일상의 순간—길가의 소녀, 날아가는 새, 갑자기 울려 퍼지는 트럼펫 소리—에서 갑자기 사물의 본질이 드러나는 체험이다. 종교적 현현이 아니라 미적 현현.
이 이동은 단순한 개념의 차용이 아니다. 그것은 권위의 이전이다. 신학에서 예술로. 신이 현현하는 방식으로 세계가 빛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의 눈을 통해 세계가 빛난다. 조이스는 아퀴나스를 읽으면서 아퀴나스를 해체하고 있다. 성스러운 것의 언어를 빌려 그 성스러움을 예술로 이전시키는 것.
이런 사유는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 1935)에서 논한 '아우라(aura)' 개념과 겹쳐 읽힌다. 베냐민은 원본 예술작품에 서려 있는 일종의 신성한 분위기를 아우라라고 불렀다. 조이스의 에피파니는 그 아우라가 예술가의 지각 속에서 발생하는 순간이다. 교회가 독점했던 현현의 경험이 이제 예술가의 것이 된다.
━━━━━━━━━━━━━━━━━━━━━━━━━━━━━━━━━━━━━━━━
5. 언어가 세계를 만든다 — 비트겐슈타인과 조이스
스티븐의 언어적 각성으로 돌아가자. 그 tundish 장면이 철학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은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1953)에서 언어는 세계를 반영하는 도구가 아니라 삶의 형식(Lebensform)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세계를 구성한다. 언어 게임(Sprachspiel)에 참여하는 방식이 바로 그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 입장에서 보면 스티븐의 곤경은 훨씬 깊어진다. 그는 단순히 외국 지배자의 언어를 쓰는 것이 아니다. 그 언어로 생각하고, 그 언어로 꿈꾸고, 그 언어로 자신을 이해한다. 영국이 아일랜드에 가한 것은 단순한 정치적 지배가 아니었다. 언어를 통한 세계관의 지배였다. 나는 영어로 분노하고, 영어로 슬퍼하며, 영어로 신에게 기도한다.
이 상황은 비단 식민지 경험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선택하지 않은 언어 안에서 태어난다. 한국어로 생각하는 사람은 한국어가 구분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구분한다. 친족 호칭이 세밀하게 분화된 언어를 쓰는 사람은 관계를 그 언어가 분화하는 방식으로 경험한다. 언어는 중립적 그릇이 아니라, 이미 어떤 세계 해석이 굳어진 체계다.
에드워드 사피어(Edward Sapir, 1884~1939)와 벤저민 워프(Benjamin Lee Whorf, 1897~1941)가 제시한 언어적 상대성 가설(linguistic relativity)—흔히 사피어-워프 가설이라 불린다—은 이 직관을 언어학적으로 탐구했다. 언어의 구조가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인지와 세계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 그 강한 버전인 언어 결정론(linguistic determinism)은 논란이 있지만,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준다는 약한 버전은 인지과학적으로도 지지된다.
스티븐이 예술가로 탈출하는 것은 이 언어적 조건에 대한 응답이다. 기존의 언어로 기존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자체를 다시 만드는 것. 조이스가 후기작 『율리시스』(Ulysses, 1922)와 『피네간의 경야』(Finnegans Wake, 1939)에서 영어 자체를 해체하고 재구성한 것은 이 야망의 실현이다.
━━━━━━━━━━━━━━━━━━━━━━━━━━━━━━━━━━━━━━━━
6.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거부 — 오이디푸스와 다이달로스
스티븐의 성(姓)은 디덜러스(Dedalus)다. 그리스 신화의 장인 다이달로스(Daedalus)의 변형이다. 다이달로스는 미노스 왕의 명령으로 미궁(Labyrinth)을 만든 장인이다. 그는 미궁에 갇혔고, 탈출하기 위해 밀랍과 깃털로 날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날았다. 그의 아들 이카로스(Icarus)는 너무 높이 날아 태양에 밀랍이 녹아 추락했다.
조이스는 이 신화를 소설의 뼈대로 삼았다. 스티븐은 다이달로스다. 그는 미궁—아일랜드, 가톨릭, 식민지 언어—을 탈출하기 위해 날개를 만든다. 그 날개가 예술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그는 일기를 쓴다. "나는 가겠다. 나는 삶을 경험하고, 삶의 현실과 맞닥뜨리겠다. 그리고 내 영혼의 대장간에서 아직 창조되지 않은 내 민족의 양심을 벼리겠다."
이 출발은 기존의 모든 것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아버지로부터, 조국으로부터, 종교로부터, 그리고 주어진 언어로부터.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오이디푸스 이론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주체 형성의 핵심으로 본다. 아버지의 법(Law of the Father)을 수용하면서 사회화가 이루어지고, 그 법에 반항함으로써 주체성이 형성된다. 스티븐의 아버지 사이먼 디덜러스(Simon Dedalus)는 소설에서 점점 몰락해가는 인물이다. 허풍스럽고, 무책임하며, 알코올에 의존하는 남자. 그러나 그의 몰락이 스티븐을 자유롭게 하지는 않는다. 생물학적 아버지보다 더 강력한 아버지들—교회, 국가, 전통—이 그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복합을 언어적으로 재해석했다. 『에크리』(Écrits, 1966)에서 그는 아버지의 이름(Nom du Père)이 단순한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라 언어와 법의 질서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주체가 되는 것은 이 언어-법의 질서 안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스티븐이 탈출하려는 세 그물—국가, 종교, 언어—은 라캉적 의미에서의 아버지의 이름들이다. 그는 이 상징적 아버지들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한다.
━━━━━━━━━━━━━━━━━━━━━━━━━━━━━━━━━━━━━━━━
7. 성장소설의 형식 — 그러나 완성이 아닌 탈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성장소설(Bildungsroman)의 형식을 취한다. 성장소설은 18~19세기 유럽 소설의 주요 장르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Wilhelm Meisters Lehrjahre, 1795~96)가 원형으로 꼽힌다. 주인공이 어린 시절의 미성숙에서 출발해 경험과 시련을 거쳐 사회에 통합되고 성숙한 인간으로 완성되는 서사다.
그런데 조이스의 성장소설은 이 장르의 관습을 배반한다. 스티븐은 사회에 통합되지 않는다. 그는 탈출한다. 성숙의 증거는 순응이 아니라 거부다.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들—아들, 아일랜드인, 가톨릭 신자—을 모두 떨쳐내고 그는 예술가로 떠난다.
이것은 장르 비판이다. 성장소설의 형식을 빌려 성장소설이 가정하는 전제—사회로의 통합이 개인의 완성이다—를 해체하는 것. 좋은 어른이 된다는 것이 주어진 틀 안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라면, 조이스의 스티븐은 그 정의 자체를 거부한다.
이 구조는 소설의 문체에서도 드러난다. 소설은 아기 스티븐의 유아적 언어로 시작한다. "onceuponatime and a very good time it was there was a moocow coming down along the road." 그리고 소설이 진행될수록 문체가 성숙해진다. 의식의 흐름이 복잡해지고, 어휘가 풍부해지며, 사유가 정교해진다. 그러나 그 성숙은 사회 편입의 방향이 아니라 개인 심화의 방향으로 진행된다. 언어의 성숙이 세계로부터의 고독을 심화시킨다.
━━━━━━━━━━━━━━━━━━━━━━━━━━━━━━━━━━━━━━━━
8. 침묵, 망명, 교활함 — 예술가의 생존 전략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스티븐은 예술가의 생존 방식을 세 단어로 요약한다. 침묵(silence), 망명(exile), 교활함(cunning).
이 세 단어는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다. 하나의 존재 전략이다.
침묵은 자신의 내면을 세계로부터 보호하는 방패다. 요구하는 세계에 말로 응답하는 순간, 그 세계의 언어에 포획된다. 침묵은 그 포획을 거부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침묵은 소통의 포기가 아니다. 예술가는 침묵하되, 작품으로 말한다.
망명은 물리적 이주만을 뜻하지 않는다. 정신적 거리두기다. 자신을 형성한 환경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 가장 가까운 것을 가장 낯설게 보는 것. 조이스 자신도 아일랜드를 떠나 트리에스테, 취리히, 파리를 전전하며 살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 전체는 더블린에 관한 것이다. 망명자야말로 고향을 가장 예리하게 본다.
교활함은 직접적 충돌을 피하며 자신을 지키는 기술이다. 권력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비스듬히 이동하며 살아남는 것. 스티븐은—조이스는—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아일랜드를 소설로 썼다. 그 소설이 아일랜드 민족주의 선언문보다 훨씬 깊이 아일랜드를 해부했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의 표현을 빌리면, 이 세 가지 전략은 반항(revolt)의 방식이다. 『반항하는 인간』(L'Homme Révolté, 1951)에서 카뮈는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반항이라고 했다. 반항은 파괴가 아니다. 부조리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 것, 절망하지 않으면서 환상도 품지 않는 것. 스티븐의 침묵, 망명, 교활함은 카뮈적 의미에서의 반항이다.
━━━━━━━━━━━━━━━━━━━━━━━━━━━━━━━━━━━━━━━━
9. 조이스 이후의 문학 — 주체는 어떻게 말하는가
조이스가 이 소설에서 실험한 것은 이후 문학 전체의 향방을 바꿨다.
가장 중요한 기여는 자유간접화법(free indirect discourse)과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 기법의 심화다. 전통 소설에서 서술자는 인물의 바깥에 서서 인물을 묘사한다. 조이스는 서술자를 인물의 의식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인물이 생각하는 방식 그대로 언어가 흐른다. 논리적 연결 없이, 시간의 순서 없이, 의식이 연상하는 방향대로.
이 기법은 철학적으로 무엇을 주장하는가. 인간의 내면이 외부에서 관찰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 의식은 정돈된 논리의 흐름이 아니라, 감각, 기억, 감정, 판단이 뒤섞인 혼돈의 흐름이라는 것.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말할 때 가정한 통일된 이성적 주체—그것이 조이스의 소설 형식에서 해체된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는 『심리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Psychology, 1890)에서 의식을 강물에 비유했다.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이라는 표현 자체가 그의 것이다. 의식은 고정된 순간들의 연속이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가는 과정이다. 조이스는 이 철학적 통찰을 소설 형식으로 구현했다.
그 결과 독자는 스티븐 디덜러스를 바깥에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의식 안에서 함께 부유한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이 타인의 경험을 정보로 수신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의식을 잠시 살아보는 것이 된다.
━━━━━━━━━━━━━━━━━━━━━━━━━━━━━━━━━━━━━━━━
10. 지금 여기서 — 우리는 어떤 그물 안에 있는가
스티븐이 직면했던 세 그물—국가, 종교, 언어—은 1916년 아일랜드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한국에서, 또는 어떤 나라에서든, 우리는 여전히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언어로 말하고, 주어진 국가의 구성원으로 살며, 주어진 문화적 틀로 세계를 본다. 그 틀은 대부분의 경우 의식되지 않는다. 물고기가 물을 의식하지 않듯이.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물이 의식되는 때가 있다. 낯선 언어 환경에 놓였을 때, 자신이 당연하게 여겼던 가치가 도전받을 때, 익숙한 정체성의 그물이 너무 조여올 때. 그 순간이 스티븐이 tundish를 말하던 순간이다.
그 각성이 철학의 시작이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을 낯설게 보는 것, 주어진 것을 질문하는 것.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470~399)가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고 말한 것이 바로 이 각성의 촉구였다.
조이스가 스티븐을 통해 말하는 것은 탈출을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어떤 그물 안에 있는지 볼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 그물을 보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투명한 공기가 아니라 명백한 그물이 된다. 그리고 그것을 인식한 사람만이 선택할 수 있다. 그 안에 남을 것인지, 다른 방식으로 그 안에서 살 것인지, 아니면 날개를 만들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