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 알베르 카뮈, 『이방인』(L'Étranger, 1942), 1부 1장
어머니의 사망 날짜를 모른다. 모른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말한다. 슬픔도 없고, 당황함도 없다. 그저 사실의 보고다.
이 문장 하나로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독자를 벼랑 끝에 세운다. 우리는 묻는다. 이 사람은 왜 이러는가. 감정이 없는 건가, 억누르는 건가,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무언가인가.
뫼르소(Meursault)라는 이름의 이 남자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는다.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 이튿날 여자친구 마리와 수영을 하고, 코미디 영화를 보며 웃는다. 그리고 몇 주 뒤, 뜨거운 해변에서 아랍인을 총으로 쏜다. 이유를 묻는 법정에서 그는 말한다. "태양 때문이었다."
이것이 재판에서 그를 죽인다. 총이 아니라, 울지 않은 것이.
이 물음에서 시작한다. 사회는 왜 그의 울지 않음을 용서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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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조리 — 세계는 대답하지 않는다
카뮈 철학의 핵심 개념은 부조리(l'absurde)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 단어를 오해한다. 부조리는 단순히 '말도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1942)에서 이렇게 정의한다. 부조리는 인간의 요구와 세계의 침묵 사이에서 태어난다. 인간은 의미를 원한다. 왜 사는지, 왜 죽는지,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지 알고 싶어 한다. 세계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다. 이 충돌이 부조리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누군가 당신에게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 당신은 왜 그러냐고 묻는다. 상대방은 그냥 멍하니 바라본다. 아무 대답도 없다. 이 침묵 앞에서 느끼는 당혹감과 공허함—그것이 부조리의 감각에 가깝다. 다만 카뮈에게 그 상대방은 우주 전체다.
인간의 요구 + 세계의 침묵 = 부조리
뫼르소는 이 부조리를 그냥 몸으로 살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의미를 찾지 않는다. 의미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 앞에서 우주는 그 어떤 대답도 내놓지 않는다. 뫼르소는 그것을 안다. 그래서 울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울어야 한다는 규칙이 어디서 오는지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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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뫼르소는 무엇이 다른가 — 감정이 아니라 정직함
뫼르소를 감정 없는 인간으로 읽는 것은 오독이다. 카뮈 자신이 이 점을 강조했다. 1955년 아메리카판 서문에서 카뮈는 이렇게 썼다. "뫼르소는 거짓말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이다."
그가 거부하는 거짓말은 구체적이다. 실제로 느끼지 않는 것을 느끼는 척하지 않는다. 사회가 기대하는 감정 코드를 연기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슬픔을 과시하지 않는다. 재판정에서 후회를 흉내 내지 않는다. 신부가 회개를 강요할 때 믿지도 않는 신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이것은 냉담함이 아니라 일종의 철저한 정직이다.
우리 주변을 생각해보자.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의 부고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슬픈 표정을 연출하는가. 사실 별 감흥이 없어도 "너무 슬프다"고 말하지 않는가. 결혼식에서, 졸업식에서, 승진 발표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감정을 사회적 규범에 맞게 편집하는가. 뫼르소가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감정의 사회적 연출을 거부한다.
문제는 사회가 이 거부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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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재판 — 살인이 아니라 감정 부재를 심판하다
뫼르소의 재판은 기묘하게 전도된다. 검사는 살인 자체보다 뫼르소의 감정 상태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어머니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것, 다음 날 여자친구와 수영하러 간 것, 코미디 영화를 본 것. 이것들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검사는 선언한다. "이 사람의 영혼 안에는 인간적인 것이 없다. 도덕적 괴물이다."
법정은 뫼르소를 아랍인 살해범이 아니라 비정상적 인간으로 재단한다. 그리고 비정상적 인간이라는 판결이 사형 선고를 합리화한다. 살인의 논리적 결과로서의 처벌이 아니라, 사회적 규범 이탈자에 대한 추방으로서의 처형이다.
이것은 단순히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 1858~1917)은 『사회분업론』(De la Division du travail social, 1893)에서 사회의 도덕 규범으로부터의 이탈이 어떻게 사회적 처벌로 이어지는지를 분석했다. 뒤르켐에게 형벌의 진짜 기능은 범죄자를 교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집합 감정(conscience collective)을 수호하는 것이다. 뫼르소를 심판하는 것은 법률이 아니라 집합 감정이다. 어머니 장례식에서는 울어야 한다는, 그것이 '정상적 인간'의 표지라는 집합 감정.
이 재판은 고발이다. 누구에 대한 고발인가. 뫼르소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를 심판하는 사회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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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르트르와 카뮈 — 실존주의와 부조리주의의 차이
카뮈는 종종 실존주의자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는 이 분류를 거부했다. 카뮈와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 사이의 철학적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뫼르소를 더 깊이 이해하는 길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핵심 명제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는 것이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 1945)에서 그는 주장한다. 인간은 미리 정해진 본질 없이 먼저 세상에 던져지고, 그 후 자신의 선택으로 본질을 만들어간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완전한 책임을 진다. 그리고 이 자유와 책임의 무게를 사르트르는 '앙가주망(engagement, 참여)'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의미는 만들어가는 것이다.
카뮈는 여기서 갈라선다. 그에게 의미는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부조리는 해결되지 않는다. 신앙으로도, 혁명으로도, 철학으로도 세계의 침묵을 메울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카뮈의 답은 반항(révolte)이다. 사라지지 않는 부조리를 직면하면서도,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계속 살아가는 것. 시지프는 돌을 산 정상까지 밀어 올리고, 돌은 다시 굴러 떨어진다. 그것이 영원히 반복된다. 그러나 카뮈는 말한다. "시지프는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고. 의미 없음을 알면서도 행위를 계속하는 것—그것이 부조리한 인간의 응답이다.
뫼르소는 사르트르적 영웅이 아니다. 그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형 선고를 받은 뒤 감옥 안에서, 신부를 밀쳐내고 세계의 부드러운 무관심(la tendre indifférence du monde)을 처음으로 느끼는 순간—그는 카뮈적 인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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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태양과 총 — 존재의 감각들
소설에서 자연 묘사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뫼르소에게 세계는 의미가 아니라 감각으로 주어진다. 햇빛의 강도, 바닷물의 온도, 소금의 맛, 마리의 피부. 그는 이것들을 강렬하게 느낀다. 그러나 그것들이 어떤 의미인지는 묻지 않는다.
해변 장면을 다시 보자. 뫼르소가 아랍인을 총으로 쏘는 그 순간은 소설에서 거의 비현실적으로 묘사된다. 태양이 너무 뜨겁다. 이마에서 땀이 흘러 눈을 가린다. 빛이 칼처럼 찌른다. 그는 방아쇠를 당긴다. 한 번이 아니라 다섯 번.
이 장면에서 살인은 의도된 행위가 아니라 신체적 반응처럼 서술된다. 뫼르소는 살인 동기를 설명하지 못한다. 법정에서 그는 "태양 때문"이라고 말한다. 판사는 어이없어하고, 배심원들은 분노한다. 그러나 뫼르소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에게 그 순간은 실제로 그랬다.
이것은 현상학(phenomenology)의 문제다.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이 정립하고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가 심화시킨 현상학은, 의식이 세계를 만나는 방식에 집중한다. 특히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 1945)에서 몸이 세계를 이해하는 첫 번째 장소임을 주장한다. 사유보다 몸이 먼저다. 뫼르소는 개념이 아닌 몸으로 세계를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몸이 뜨거운 태양 아래서 어떤 한계에 달했을 때, 총이 발사되었다.
이것이 그를 면책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설명하기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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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신부를 쫓아내다 — 죽음 앞의 인간
사형 선고를 받은 뒤, 감옥에 신부가 찾아온다. 신부는 뫼르소에게 회개를 권유한다. 신을 믿으면, 죽음 너머에 의미가 있다. 회개하면, 영혼은 구원받는다.
뫼르소는 신부를 분노로 밀쳐낸다. 소설에서 이 장면은 그가 유일하게 감정적으로 폭발하는 순간이다.
"당신은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다. 나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살고 있다."
뫼르소의 말은 도발이다. 신부는 죽음 이후의 삶에 투자하느라 지금 이 순간을 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신이 눈앞의 현실을 가린다. 뫼르소는 죽음이 확정된 순간에도 지금 이 감옥의 공기를, 저녁 별들을 선명하게 느낀다. 그에게 지금 이 순간이 전부다.
이것은 에피쿠로스(Epicurus, B.C. 341~270)의 통찰과 닿아 있다. 에피쿠로스는 말했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있는 한 죽음은 없고, 죽음이 있을 때 우리는 없기 때문이다."(『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B.C. 3세기) 에피쿠로스에게 죽음의 공포는 잘못된 믿음에서 온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없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뫼르소는 이 공포로부터 놀랍도록 자유로운 인물이다. 그래서 신부의 제안이 그에게 구원이 아니라 거짓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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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식민지 알제리 — 소설이 말하지 않는 것
『이방인』을 읽을 때 불편한 진실 하나를 짚어야 한다. 뫼르소가 죽인 아랍인에게는 이름이 없다.
소설 전체에 걸쳐 피해자는 "아랍인"으로만 불린다. 그의 이름, 그의 삶, 그의 가족—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는 서사의 주체가 아니라 뫼르소의 실존적 계기를 위한 도구적 존재로만 등장한다.
알제리 출신 작가 카멜 다우드(Kamel Daoud, 1970~)는 2013년 소설 『뫼르소, 재심』(Meursault, contre-enquête)에서 이 공백을 정면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피해자의 이름을 '무사'로 명명하고, 그 형제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다시 쓴다. 다우드의 소설은 카뮈의 『이방인』이 얼마나 철저하게 식민지 알제리의 아랍인들을 비가시화했는지를 폭로한다.
이것은 카뮈를 단순히 비난하는 문제가 아니다. 카뮈는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계 알제리인(Pied-Noir)이었다. 그는 식민주의에 대해 복잡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알제리 독립 전쟁이 격화되면서 그 입장 때문에 심각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57년 노벨상 수상 연설 직후 한 알제리 청년이 독립 지지를 왜 안 하냐고 묻자 카뮈는 답했다. "정의보다 어머니를 선택하겠다." 이 발언은 지금까지도 논쟁적이다.
『이방인』의 철학적 보편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보편성이 누구의 시점에서 쓰인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보편을 주장하는 텍스트가 누구를 배제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그것이 비판적 독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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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세계의 부드러운 무관심 — 뫼르소의 마지막 도달점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뫼르소는 신부를 쫓아낸 뒤 감옥 창문으로 밤하늘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는 처음으로 세계와 화해한다.
"마치 그 거대한 분노가 나를 정화시켜 희망을 비워주기라도 한 듯, 별과 밤이 가득한 하늘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부드러운 무관심에 나 자신을 열어놓았다."
— 카뮈, 『이방인』, 2부 5장
'세계의 부드러운 무관심(la tendre indifférence du monde)'—이 구절이 소설의 철학적 핵심이다. 세계는 나에게 무관심하다. 내가 행복하든 불행하든, 살든 죽든, 세계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것은 냉혹한 진실이다. 그런데 카뮈는 이 무관심이 '부드럽다(tendre)'고 한다.
왜 부드러운가. 세계의 무관심은 적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가 나에게 무관심하다는 것은, 세계가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는 판단한다. 어머니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고, 다음 날 수영을 갔다고, 감정이 없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별들은 판단하지 않는다. 밤하늘은 뫼르소를 도덕적 괴물로 보지 않는다.
이 무관심 앞에서 뫼르소는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그것이 부조리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해방이다. 의미를 찾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없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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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지금 여기서 — 우리는 모두 뫼르소다
『이방인』이 출판된 1942년은 나치 점령 하의 파리였다. 저항과 복종, 생존과 의미, 죽음과 선택이 추상적 철학이 아니라 매일의 현실이던 시절이었다. 카뮈는 그 시절 레지스탕스 신문 『콩바(Combat)』의 편집장이었다. 부조리 철학은 방관이나 냉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의미 없음을 알면서도 싸우는 사람의 철학이었다.
80여 년이 지난 지금, 뫼르소의 문제는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우리는 매일 감정을 연출한다. SNS에 올라오는 행복한 사진들, 슬픔을 표현해야 하는 댓글들, 분노를 보여야 하는 공론장의 압력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감정 노동을 요구하는 사회 안에서 산다. 실제로 느끼는 것과 느껴야 한다고 요구받는 것 사이의 간극이 커질수록, 뫼르소는 더 이상 소설 속 인물이 아니게 된다.
뫼르소가 이방인인 것은 그가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가 감정의 사회적 규범을 따르지 않아서다. 그리고 그 불복종이 그를 죽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지금 진짜로 느끼는가, 아니면 느끼는 척 하는가. 내가 울 때, 나는 슬퍼서 우는가, 아니면 슬프다는 것을 보여야 해서 우는가.
카뮈는 이 물음을 소설의 첫 문장에 담았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문장을 읽으며 뫼르소를 이상하게 여긴다. 그런데 사실 이상한 것은 무엇인가. 울지 않은 그인가, 아니면 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죽인 우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