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 제임스 램지는 이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을 건다. 등대. 해안에서 보면 손에 잡힐 것 같은 그 불빛. 아버지는 단칼에 자른다. "날씨가 좋을 리 없어." 소년은 아버지를 가위로 찔러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다.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의 『등대로』(To the Lighthouse, 1927)는 이 장면에서 시작한다. 등대로 가는 여행. 그러나 이 소설에서 진짜 여행은 등대까지의 뱃길이 아니다. 시간을 가로질러 의식 안을 흐르는 여행이다. 그리고 그 여행이 묻는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붙잡고 살며,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철학은 종종 아주 평범한 장면에서 시작한다. 어머니의 손, 창문 너머의 빛, 닿을 수 없는 등대. 울프는 소설 형식으로 그 철학을 했다.
2. 의식의 흐름 — 우리는 어떻게 경험하는가
『등대로』의 가장 낯선 특징은 문장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생각이 흐르다가, 그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각으로 넘어가고, 다시 외부 풍경으로 이어진다. 전통적인 소설처럼 "그가 말했다", "그녀는 생각했다"는 명확한 표지 없이. 독자는 처음에 당황한다. 지금 누가 생각하고 있는 건가.
이것이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 기법이다. 울프가 이 기법을 쓴 데는 철학적 이유가 있다. 인간의 경험은 분절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동시에 어제 약속을 떠올리고, 창밖 소리를 듣고, 배가 고픈지 아닌지를 느낀다. 의식은 단일한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여러 차원이 동시에 겹치는 흐름이다.
이 통찰은 미국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에게서 왔다. 윌리엄 제임스는 심리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Psychology, 1890)에서 처음으로 '의식의 흐름'이라는 말을 썼다. 그에 따르면 의식은 강(river)과 같다. 강은 흐른다.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어제의 강물은 오늘의 강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같은 강'이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나'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의식의 흐름이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울프는 이 철학을 소설의 형식 자체로 구현했다. 램지 부인이 뜨개질을 하면서 아이들을 생각하고, 손님들을 걱정하고, 저녁 식사를 계획하고, 남편을 사랑하면서도 그에게 지치는 그 모든 것이 한 문장 안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그것이 더 진실하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렇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3. 시간이라는 문제 — 과거는 사라지는가
소설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부 "창문"은 어느 여름 오후의 몇 시간이다. 2부 "시간이 흐르다"는 10년의 세월을 단 몇 쪽으로 압축한다. 3부 "등대"는 다시 등대로의 여행 하루를 담는다.
2부가 충격적이다. 1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램지 부인이 죽었다. 그녀의 아들 앤드루가 전쟁에서 죽었다. 딸 프루도 출산 중에 죽었다. 이 세 죽음이 괄호 안에, 단 몇 줄로 처리된다. "그리고 (램지 부인이 갑자기 죽었다)." 그게 전부다.
이 냉혹한 형식은 의도적이다. 시간은 인간의 감정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의 죽음도, 시간의 흐름 안에서는 괄호 하나 분량이다. 집은 10년 동안 비어 있었고, 먼지가 쌓이고, 거미줄이 치고, 파도가 창문에 부딪힌다. 자연은 인간의 비극에 무관심하다.
이 통찰은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의 시간 철학과 연결된다.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L'Évolution créatrice, 1907)와 시간과 자유의지(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 1889)에서 두 가지 시간을 구분한다. 하나는 시계로 측정되는 공간화된 시간, 즉 균등하게 분할된 단위들의 연속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시간, 즉 지속(durée)이다. 지속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의식 안에서 서로 녹아드는 살아있는 시간이다.
울프의 소설에서 시간은 시계의 시간이 아니라 베르그송의 지속이다. 램지 부인이 죽은 지 10년이 지났지만, 3부에서 남편 램지와 아이들이 드디어 등대로 향할 때, 그녀는 살아있는 것처럼 그들의 의식 속에 존재한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 속에서 현재와 함께 살아간다.
4. 램지 부인이라는 존재 — 현상학적 중심
램지 부인은 이 소설의 중심이다. 그러나 그녀는 2부가 시작되기도 전에 죽는다. 그녀는 소설의 절반도 안 되는 지면을 차지하면서, 나머지 전체를 장악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그녀가 하는 일을 살펴보면 아무것도 없다. 뜨개질을 한다.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손님들을 배려한다. 아이들을 달랜다. 남편의 불안을 다독인다. 그러나 그녀가 하는 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사람들을 살게 한다. 그녀가 없어졌을 때 모든 것이 무너진다.
현상학자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은 우리가 사물을 경험할 때 그 사물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에 나타난 사물, 즉 현상(phenomenon)을 경험한다고 보았다. 그의 개념인 지향성(intentionality)에 따르면, 의식은 항상 무언가를 향해 있다. 우리는 결코 '순수한 의식'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은 언제나 대상을 향해 뻗어 있다.
램지 부인은 다른 사람들의 의식이 향하는 대상이다. 남편 램지는 그녀를 향해 안정을 구하고, 철학자 손님 뱅크스는 그녀를 향해 아름다움을 본다. 화가 릴리 브리스코는 그녀를 그리려 한다. 제임스는 그녀를 향해 온기를 받는다. 그녀는 모든 사람의 지향적 중심이다. 그래서 그녀가 사라졌을 때, 각자의 의식이 방향을 잃는다.
5. 아버지 램지의 철학 — A에서 Z까지 가는 문제
램지 씨는 철학자다. 그러나 소설에서 그는 우스꽝스럽게 그려진다. 그는 알파벳으로 철학적 사유의 단계를 상상한다. A, B, C... Q까지는 갔다. 그런데 R로 넘어갈 수가 없다. R로 가는 것이 천재의 표시인데, 자신은 R에 막혀 있다.
이 장면은 단순한 희화화가 아니다. 그것은 분석 철학, 혹은 남성적으로 구획된 합리주의 철학 전통에 대한 울프의 비판이다. 철학을 A에서 Z까지 논리적으로 전진하는 직선 운동으로 보는 시각. 명제들을 하나씩 정복하고, 단계를 밟아 진리에 다가간다는 믿음.
램지 씨의 철학함은 자기 불안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는 끊임없이 아내에게 확인을 구한다. 나는 천재인가, 나는 중요한 사람인가, 나는 기억될 것인가. 그리고 램지 부인은 그때마다 그에게 '그렇다'고 답해준다.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évinas, 1906~1995)는 타자의 윤리학(Totalité et Infini, 1961)에서 주장한다. 진정한 관계는 나의 논리 안에 타자를 포섭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얼굴 앞에 무한히 책임지는 것이다. 램지 씨의 문제는 그가 아내를 자신의 심리적 필요를 채우는 존재로 대한다는 것이다. 그는 아내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 자신의 불안을 비추는 거울로 아내를 바라본다. 레비나스라면 이것을 진정한 관계의 실패라고 불렀을 것이다.
6. 릴리 브리스코의 예술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화가 릴리 브리스코는 10년째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그녀가 그리려는 것은 창가에 앉은 램지 부인과 제임스의 장면이다. 그런데 그녀가 정말 그리려는 것은 무엇인가.
그녀는 묻는다. "우리는 어떻게 한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있는가?" 램지 부인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인가, 손님들을 배려하는 행동인가, 아이들에 대한 헌신인가, 아니면 혼자 있을 때 드러나는 어둡고 깊은 내면인가.
이 물음은 20세기 초 예술론과 연결된다. 클라이브 벨(Clive Bell, 1881~1964)은 예술론(Art, 1914)에서 '의미 있는 형식(significant form)'의 개념을 제안했다. 위대한 예술은 사물의 외형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관계를 형태로 포착하는 것이다. 울프와 벨은 개인적으로도 가까웠다. 블룸즈버리 그룹의 일원으로서.
릴리가 결국 완성하는 그림은 어떤 그림인가. 소설은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녀가 마지막 붓 자국을 긋는 순간, 그녀는 "내 비전을 얻었다"고만 말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예술의 목적은 외부의 승인이 아니라 내면의 비전을 형태로 만드는 것이다. 램지 부인은 죽었지만, 릴리의 캔버스 위에서 살아났다. 형태가 없는 기억이 형태를 얻은 것.
7. 등대란 무엇인가 — 상징의 철학
소설 전체에서 등대는 끊임없이 언급된다. 그런데 등대는 사람마다 다른 의미를 갖는다. 제임스에게는 어린 시절의 약속이다. 캠든에게는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마지막 시도다. 릴리에게는 램지 부인의 영혼 같은 것이다.
울프 자신은 등대에 대해 직접적 설명을 거부했다. "등대는 여러 개의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있다"고만 했다. 이것은 단순한 모호함이 아니라 철학적 입장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은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1953)에서 '의미는 사용이다(Meaning is use)'라고 주장했다. 단어의 의미는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게임'이라는 단어가 체스에도, 축구에도, 아이들의 소꿉놀이에도 쓰이지만, 모든 게임을 관통하는 하나의 본질적 정의는 없다.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이 있을 뿐이다.
등대도 마찬가지다. 제임스의 등대와 캠든의 등대와 릴리의 등대는 서로 다르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 '등대'라는 이름 아래 가족 유사성으로 묶인다. 닿을 듯 닿지 않는 것, 기다려온 것, 도달했을 때 이미 달라진 것.
8. 도달과 실망 — 목적지에 대한 철학
소설의 마지막에서 제임스와 캠든은 드디어 등대에 도착한다. 10년 만에. 어머니가 죽고, 전쟁이 끝나고, 모든 것이 달라진 뒤에. 그런데 도착해서 무엇을 느끼는가.
제임스는 생각한다. 등대는 두 가지다. 아주 어릴 때 바라보던 등대—은빛과 안개 속에서 신비롭게 빛나는 것.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등대—탑처럼 생긴 회색 건물, 창문들, 빨래들. 그는 두 가지 모두 진짜라고 결론 짓는다. 어린 시절의 등대도 진짜이고, 지금의 등대도 진짜다.
이것은 목적지에 관한 깊은 철학적 통찰이다. 우리가 향하는 모든 목표는, 멀리서 바라볼 때와 도달했을 때가 다르다. 사랑, 성공, 자유, 행복. 그것들은 언제나 지금 여기서 조금 앞에 있고, 우리가 거기 닿으면 이미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목표를 거짓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다가오는 것이 아름다웠다는 사실은 영원히 남는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시지프의 신화(Le Mythe de Sisyphe, 1942)에서 말했다. 시지프는 바위를 정상까지 올린다. 바위는 굴러 내려온다. 그는 다시 올린다. 이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인생의 비극이 아니라, 그 반복적 행위 자체가 의미를 갖는다.
제임스가 등대에 도달해서 발견한 것은 실망이 아니라 화해다. 어린 시절의 꿈과 현실 사이의 화해. 어머니의 죽음과 지금 살아있는 삶 사이의 화해.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처음으로 그에게서 "잘 했다"는 말을 들은 순간 사이의 화해.
9. 램지 부인 없는 세계 — 상실과 기억의 철학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질문이 남는다. 왜 울프는 램지 부인을 그렇게 일찍,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죽였는가.
아마도 이것이 핵심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살아있을 때는 그 존재의 무게를 모른다. 램지 부인이 매일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손님들의 감정을 살피고, 아이들을 재울 때—그것은 당연한 일처럼 보였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야, 그 당연함이 사실은 누군가의 헌신으로 유지되던 것이었음을 안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7)에서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로 정의한다. 우리는 죽음을 직시할 때 비로소 현재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이 사실을 회피하며 산다. 하이데거는 이를 비본래적 실존(uneigentliches Dasein)이라 불렀다.
램지 부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독자에게 하이데거적 충격을 준다. 우리는 1부에서 수백 쪽 동안 그녀와 함께했고, 그녀의 생각에 귀 기울였으며, 그녀의 따뜻함을 느꼈다. 그리고 갑자기 괄호 안에서 그녀는 사라진다. 독자 역시, 소설 속 인물들처럼, 미처 준비되지 못한 상실을 경험한다. 그것이 울프의 의도다.
10. 지금 여기서 — 의식과 존재의 현재성
울프는 이 소설을 쓸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죽은 부모들을 위한 진혼곡을 쓰고 싶다." 그녀의 어머니 줄리아 스티븐은 울프가 열세 살 때 죽었다.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은 그녀가 스물두 살 때 죽었다. 울프는 평생 이 죽음들과 함께 살았다.
그런 의미에서 『등대로』는 철학 논문이 아니라 철학적 상처에서 나온 예술이다. 시간이 과거를 지워간다는 공포,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진다는 현실, 그러나 기억 속에서 그들이 계속 살아간다는 역설.
지금 우리는 매일 스마트폰을 보면서 수십 개의 알림을 처리하고, 수백 개의 정보를 스쳐 보낸다. 지금 이 순간 옆에 있는 사람의 표정을 얼마나 보는가. 그들의 생각이 어디로 흐르는지 얼마나 관심을 갖는가. 램지 부인처럼, 어느 날 갑자기 괄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
울프가 요구하는 것은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다. 의식을 지금 여기에 두는 것.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보는 것. 뜨개질하는 손의 움직임을 보는 것. 파도 소리를 듣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잠깐이라는 것을 아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