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의 억만장자들이 수백억 원을 쏟아붓는 곳이 있다. 바로 생명연장 연구소다. 혈액을 교체하고, 세포를 재프로그래밍하고, 극저온 냉동 캡슐에 몸을 보관한다. 2024년 현재, 노화를 질병으로 규정하고 이를 치료하려는 시도는 더 이상 SF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30억 달러를 투자받은 알토스랩스는 세포의 생물학적 나이를 되돌리는 기술을 개발 중이고, 1967년부터 시작된 인체 냉동보존 기술은 이미 수백 명의 시신을 액체질소 속에 보관하고 있다.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죽음과의 전쟁에 가까이 다가섰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묻지 않는다. 죽음을 미루거나 피할 수 있다면, 삶은 여전히 의미 있을 것인가?
불멸의 꿈과 그 대가
기술은 우리에게 선택지를 준다고 말한다. 더 오래 살 것인가, 평범하게 늙을 것인가. 하지만 이 선택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생명연장 기술이 실제로 가능해진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예하게 될 것이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라는 말은 더 이상 위로가 아니라 삶을 무한정 미루는 구실이 된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 진심을 고백해야 할 때, 용기가 필요한 선택 앞에서 우리는 말할 것이다. "나중에 해도 돼. 어차피 100년은 더 살 테니까."
문제는 무한히 주어진 시간 속에서 긴박함이 사라진다는 데 있다. 마감이 없는 프로젝트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끝이 정해지지 않은 여행은 방황일 뿐이다. 죽음이라는 절대적 한계가 사라지면, 삶의 모든 순간은 상대화되고 평준화된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똑같이 중요하거나, 혹은 똑같이 중요하지 않게 된다.
죽음이 만드는 삶의 형태
20세기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정의했다. 이것은 비관적 선언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이야말로 우리 삶에 고유한 윤곽을 부여한다는 통찰이다. 나의 죽음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피할 수도 없으며, 언제 올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바로 이 특성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야 한다는 절실함을 느낀다.
30대 직장인 김모 씨는 최근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암 진단 소식을 들었다. 그는 말한다. "아버지가 아프시기 전까지 저는 시간이 무한하다고 생각했어요. 언젠가 여행도 함께 가고, 제대로 된 대화도 나누겠지 했죠. 하지만 이제는 매주 병원에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됐습니다." 죽음의 가능성 앞에서 비로소 삶의 우선순위가 분명해진 것이다.
유한성은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으니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 결정해야 한다. 모든 사람을 만날 수는 없으니 누구와 함께할지 선택해야 한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삶을 낭비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기술이 놓치는 것들
생명연장 기술의 지지자들은 묻는다. "더 오래 사는 게 뭐가 나쁜가요?" 문제는 '더 오래 사는 것'과 '잘 사는 것'이 다르다는 데 있다. 시간의 양이 늘어난다고 해서 삶의 질이 자동으로 향상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끝없이 연장되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권태와 무의미에 빠질 수 있다.
프랑스의 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는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며 기록을 남겼다. 그녀는 말한다.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어머니의 삶 전체가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로 다가왔다고. 시작과 끝이 있기에 삶은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가 되기에 의미를 갖는다. 무한히 이어지는 삶은 이야기가 아니라 단순한 사건들의 나열일 뿐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도 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기술이 소수에게만 주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이미 부와 권력을 가진 이들만 영원히 살고, 나머지는 여전히 죽어야 한다면,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이 될까? 생명연장 기술은 단순히 의학적 문제가 아니라 정의와 평등의 문제가 된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지혜
죽음을 피하려는 노력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질병을 치료하고 고통을 줄이는 의학의 발전은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죽음 그 자체를 적으로 여기고 완전히 제거하려 드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것은 삶의 유한성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 즉 긴박함과 선택과 의미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죽음을 인정하면서도 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한정된 시간이기에 더욱 소중한 관계를 맺고, 끝이 있기에 더욱 진지하게 선택하고, 언젠가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충만하게 현재를 사는 것. 이것이 유한한 존재로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지혜다.
실리콘밸리의 연구소들이 세포를 재프로그래밍하는 동안,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삶 자체를 재프로그래밍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무한정 미루는 기술이 아니라, 제한된 시간 안에서 충만하게 사는 기술 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채우느냐다. 그리고 그 답은 죽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인정하면서도 매 순간 깨어 있는 삶을 선택하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