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리쾨르(Paul Ricœur, 1913~2005)는 20세기 프랑스 철학이 낳은 가장 방대하고 가장 대화적인 사상가였다. 그는 현상학과 해석학, 정신분석학과 언어철학, 역사철학과 문학이론을 한 사람의 사유 안에 모두 끌어들여 대화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어느 한 사조에 귀속되기를 거부했다. 푸코와 데리다, 들뢰즈가 파리 지성계를 풍미하던 시절, 리쾨르는 주체의 해체에 맞서 주체의 재건을 시도했고, 반성철학의 전통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해석학적 우회로를 통해 새롭게 조형했다. 그 우회의 가장 큰 결실이 바로 세 권짜리 대작 『시간과 이야기』(Temps et récit, 1983~1985)였다.
탄생과 형성 — 전쟁 포로가 된 철학자
리쾨르는 1913년 프랑스 발랑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조부모 손에 자란 그는 개신교 신앙과 엄격한 인문교육 속에서 성장했다. 렌 대학과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징집되어 독일군에 포로로 붙잡혔다. 1940년부터 5년간 수용소 생활을 했는데, 이 시기가 그의 철학적 생애에서 결정적 전환점이 된다.
수용소 안에서 리쾨르는 카를 야스퍼스를 읽고, 후설의 『이념들』(Ideen)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갇혀 있는 몸으로 다른 지식인들과 함께 대학 프로그램을 꾸려 강의하고 토론했다. 고통의 시간이 철학을 낳은 것이다. 석방 이후에는 스트라스부르 대학을 거쳐 소르본으로 옮겨 일반 철학을 강의했고, 1966년 낭테르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학장이 되었다. 그러나 1968년 학생운동의 격랑 속에서 학장직을 사임했다. 그 이후 루뱅 대학, 예일 대학, 시카고 대학 등에서 강의하며 국제적 명성을 쌓았다. 2005년 5월 20일, 파리 근교 샤트네말라브리 자택에서 92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리쾨르의 철학적 여정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초기에는 의지와 악의 문제를 다룬 『의지의 철학』(Philosophie de la volonté, 1950~1960)으로 출발했다. 중기에는 프로이트 해석학과 상징의 문제를 탐구했고(『해석에 대하여』, 1965; 『해석의 갈등』, 1969), 후기에는 언어, 서사, 시간, 정체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살아있는 은유』, 1975; 『시간과 이야기』, 1983~1985; 『타자로서 자기 자신』, 1990). 말년에는 기억·역사·망각의 문제로 이어졌다(『기억, 역사, 망각』, 2000).
저작의 맥락 — 왜 시간이고, 왜 이야기인가
『시간과 이야기』가 쓰인 1980년대 초는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시기였다. 한쪽에서는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가 인간 주체의 자율성과 의미 형성 능력을 해체하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분석철학이 시간과 서사의 문제를 논리적 도식으로 환원하려 했다. 역사학계에서는 프랑스 아날 학파가 사건의 서사를 버리고 장기지속(longue durée)의 구조적 역사를 추구하고 있었다.
리쾨르는 이 모든 흐름에 맞서 하나의 테제를 내세웠다. 시간과 이야기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시간은 이야기를 통해서만 인간적 시간이 되고, 이야기는 시간적 경험을 담아야만 완전한 의미를 획득한다. 이 상호의존의 구조를 해명하는 것이 세 권에 걸친 방대한 작업의 핵심이었다.
이 책은 『살아있는 은유』(1975)와 함께 읽혀야 한다. 은유가 언어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시학(詩學)의 문제라면, 이야기는 행동과 시간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구성하는 서사학의 문제다. 두 작업 모두 언어가 세계를 단순히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재서술(redescription)한다는 생각을 공유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리스토텔레스 — 두 개의 출발점
리쾨르는 『시간과 이야기』 1권을 두 개의 고전 텍스트로부터 시작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Confessions) 11권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a)이 그것이다. 두 텍스트는 각각 전혀 다른 방향에서 시간을 다루지만, 리쾨르는 이 둘 사이의 긴장과 대화 속에서 자신의 사유를 전개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의 난해함 앞에서 솔직하게 고백했다. "아무도 나에게 묻지 않으면 나는 시간이 무엇인지 안다. 하지만 묻는 사람에게 설명하려 하면 나는 모른다." 이 유명한 역설은 시간이 개념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을 영혼(anima)의 팽창(distentio animi)으로 이해했다. 과거는 기억이라는 현재로, 현재는 직관이라는 현재로, 미래는 기대라는 현재로 존재한다. 시간이란 영혼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동시에 뻗어 있는 내면적 경험이다. 그러나 이 설명은 주관적인 시간 경험을 정교하게 묘사할 뿐, 시간과 세계 사이의 관계, 즉 우주적 시간과 인간적 시간의 관계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반대편에서 출발했다. 그는 시간을 "운동의 앞과 뒤에 따른 수(數)"로 정의했고, 이야기(뮈토스, muthos)를 "행동의 모방(미메시스, mimesis)"으로 규정했다. 이야기는 단순히 사건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정연한 구성(플롯, intrigue)으로 묶어 내는 일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통일성(unity)이다. 이야기는 시작과 중간과 끝을 갖고, 이질적인 사건들을 하나의 전체로 종합한다.
리쾨르는 이 두 사유가 대립하면서도 서로를 보완한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의 불안과 흩어짐(discordance)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야기의 질서와 통일(concordance)을 말한다. 그리고 바로 이 불일치와 일치의 변증법적 긴장 안에서 인간의 시간 경험이 성립한다. 이야기는 흩어진 시간에 형태를 부여하고, 시간은 이야기에 실존적 무게를 부여한다.
미메시스의 삼중 구조 — 핵심 개념의 해부
『시간과 이야기』의 이론적 심장은 '삼중 미메시스(triple mimèsis)'다. 리쾨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이야기를 통한 행동의 모방)를 세 단계로 분화시켜, 시간과 이야기 사이의 순환적 관계를 해명했다.
첫 번째는 미메시스 I, 즉 전-형상화(préfiguration)다. 이것은 이야기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이미 삶 안에 존재하는 서사적 이해를 가리킨다. 인간의 행동 세계는 그 자체로 이미 기호와 상징, 규범과 시간적 구조로 짜여 있다. 어떤 행동이 '보복'인지 '호의'인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미 그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문화적·규범적 선이해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이야기를 듣기 전부터 이미 이야기 속 존재다.
두 번째는 미메시스 II, 즉 형상화(configuration)다. 이것이 이야기 짓기의 핵심 국면으로, 리쾨르가 가장 정교하게 다룬 부분이다. 전-형상화된 행동 세계를 가져다 하나의 플롯으로 구성하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단계다. 리쾨르는 이것을 "이질적인 것의 종합(synthèse de l'hétérogène)"이라고 불렀다. 이야기는 사건들을 단순히 나열하지 않는다. 그것은 계획과 우연, 행위자와 환경, 기대와 반전을 통일된 이야기로 엮어 낸다. 이 국면에서 시간은 단순한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의미 있는 전체로 변모한다.
세 번째는 미메시스 III, 즉 재-형상화(refiguration)다. 이것은 독자가 텍스트를 읽는 행위를 통해 이야기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만나는 국면이다. 독자는 텍스트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열어 주는 가능적 세계를 통해 자신의 삶과 시간 경험을 다시 이해하게 된다. 텍스트는 독자의 삶으로 '돌아온다'. 문학은 이 재-형상화를 통해 삶으로 귀환한다.
이 삼중 구조는 하나의 순환을 이룬다. 미메시스 I의 삶이 미메시스 II의 이야기로 변형되고, 미메시스 II의 이야기가 미메시스 III을 통해 다시 삶을 변형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악순환이 아니다. 재-형상화된 삶은 이전의 삶보다 더 풍부한 서사적 이해를 갖추게 된다. 리쾨르의 표현대로 하면, 우리는 "전-형상화된 시간으로부터 형상화된 시간을 매개로 재-형상화된 시간에 이르는" 여정을 살아간다.
한국 독자에게 이 개념을 가장 쉽게 설명하는 방법은 아마 이것일 것이다. 방탄소년단(BTS)의 노래를 처음 들을 때 우리는 이미 그 가사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 어느 정도 안다. 청춘의 방황, 사회적 압박, 자기 정체성의 혼란 — 이것들은 우리가 이미 살고 있는 삶의 문법이다(미메시스 I). 그 노래는 그 경험들을 특정한 음악적 구성으로 엮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든다(미메시스 II). 그리고 그 노래를 듣고 난 후, 청취자들은 자신의 삶을 조금 다르게 보기 시작한다. '나도 그랬었구나',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겠구나'(미메시스 III). 이것이 리쾨르가 말하는 이야기의 삼중 운동이다.
역사와 허구의 대화 — 2권과 3권의 세계
1권이 이론적 틀을 수립했다면, 2권과 3권은 그 틀을 실제 텍스트들에 적용한 작업이다.
2권 『허구 이야기 속의 시간의 형상화』(La configuration dans le récit de fiction, 1984)는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토마스 만의 『마의 산』,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분석한다. 리쾨르는 이 소설들이 단순히 시간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실험'한다고 보았다. 모더니즘 소설들은 의식의 흐름, 비선형적 서사, 기억의 중첩을 통해 전통적인 시간 구성을 해체하면서도, 역설적으로 그 해체 자체를 통해 새로운 시간 경험을 창조한다.
프루스트의 경우를 예로 들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마들렌 과자의 맛이 불러일으키는 기억처럼 과거와 현재가 갑자기 겹쳐지는 순간을 묘사한다. 이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프루스트에게 시간은 되찾아지는 것이고, 그 되찾음은 언제나 미적 형식 — 글쓰기, 이야기 — 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리쾨르는 이것이 미메시스 II와 III의 교차점, 즉 이야기가 독자의 시간 경험을 재형상화하는 순간이라고 분석했다.
3권 『이야기된 시간』(Le temps raconté, 1985)에서는 역사 서술과 허구 서사 사이의 관계가 더 깊이 탐구된다. 리쾨르는 두 장르가 서로 다른 '진리 요구'를 가지면서도 모두 시간을 이야기적으로 구성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역사는 흔적과 증언에 의존해 과거의 진실을 재구성하려 하고, 허구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해 인간 조건의 진리를 탐구한다. 이 둘은 "교차 지시(cross-reference)"를 통해 서로를 풍요롭게 한다.
3권에서 특히 중요한 개념은 '역사적 현재'와 '기대의 지평'이다. 역사적 의식은 과거의 '경험 공간'(espace d'expérience)과 미래의 '기대 지평'(horizon d'attente)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 속에서 성립한다. 이 개념은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에게서 빌려온 것인데, 리쾨르는 이것을 서사 이론과 결합했다. 우리가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 사건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가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기대를 가능하게 했는가를 이해하는 일이다.
서사적 정체성 — 내가 누구인지를 이야기로 안다
『시간과 이야기』가 제기한 가장 파격적인 주장 중 하나는 인간의 정체성이 서사적 구조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후속작 『타자로서 자기 자신』(Soi-même comme un autre, 1990)에서 '서사적 정체성(identité narrative)' 개념으로 완성된다.
리쾨르는 인간의 정체성을 두 가지로 구분했다. 하나는 라틴어 idem에서 온 '동일성(mêmeté)'으로, "변화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것"을 가리킨다. DNA, 지문, 출생일자 같은 것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ipse에서 온 '자기성(ipséité)'으로, "시간을 가로질러 자신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약속을 지키는 것, 일관된 가치관을 유지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리쾨르의 통찰은 이 자기성이 서사적 구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방식은 언제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어디서 태어나 어떤 경험을 했고 무엇을 겪었는가. 그 이야기 속에서 나의 정체성이 구성된다. "서사의 도움 없이는 인격 동일성의 문제가 해결 불가능한 이율배반에 빠지게 된다"는 그의 말은 이 점을 정확하게 포착한다.
이것은 단순히 사변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예를 들어 대학 입시를 앞둔 수험생이 자기소개서를 쓴다고 하자. 그 글은 "나는 언제 태어났고 어느 학교를 나왔다"는 사실 나열이 아니라, "나는 어떤 경험을 통해 이 꿈을 갖게 되었는가"라는 이야기 형식을 취한다. 그 이야기 속에서 수험생은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또는 상담 심리학의 서사 치료(narrative therapy)를 생각해 보자. 개인이 자신의 삶을 어떤 이야기로 만드느냐에 따라 그 삶의 의미가 달라지고, 심지어 트라우마의 치유도 새로운 서사를 통해 가능해진다. 리쾨르의 서사적 정체성 개념은 이러한 임상적 실천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SNS 시대의 한국을 살아가는 20대를 생각해 보면 이 개념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인스타그램 피드, 브이로그, 취준생의 자기소개, 유튜브 채널의 콘셉트 —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삶을 특정한 서사로 구성하는 행위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성장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어떤 사람은 '감성 여행자'로, 또 어떤 사람은 '사회 비판자'로 이야기한다. 리쾨르의 언어로 하면, 이것은 미메시스 II의 형상화 작업이다. 자신의 삶을 특정한 플롯으로 구성하는 일이다. 문제는 그 플롯이 단순한 허상인가, 아니면 진정한 자기 이해인가다.
리쾨르의 대답은 양극단을 모두 거부한다. 서사적 정체성은 완전히 고정된 실체도 아니고, 완전히 임의적인 구성물도 아니다. "서사적 정체성은 안정적이고 흠 없는 정체성이 아니다. 마치 동일한 사건들로 여러 줄거리를 구성할 수 있듯이, 자신의 삶 위에서도 다양하고 심지어 서로 대립하는 줄거리들을 짤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서사적 정체성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허물어진다." 정체성은 일회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되고 재이야기되는 과정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시간의 아포리아 — 철학이 풀지 못한 것을 이야기가 치유한다
리쾨르는 『시간과 이야기』의 야심찬 목표를 '시간의 아포리아(aporetics of time)'를 이야기로 응답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아포리아란 막다른 길, 해결 불가능한 난제를 가리킨다.
시간의 아포리아란 이것이다. 시간은 무엇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이 영혼의 팽창이라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의 수라 했다. 헤겔은 정신의 자기실현이라 했고,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근본 구조라 했다. 하지만 어떤 철학적 설명도 시간의 수수께끼를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다. 우주적 시간(물리적 시간)과 현상학적 시간(의식의 시간) 사이의 간극은 개념으로 메워지지 않는다.
리쾨르의 제안은 급진적이다. 시간의 아포리아는 개념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생산적으로 대응'된다. 이야기는 아포리아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살 수 있는 것으로,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이야기는 개념이 할 수 없는 것을 한다.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와 현재의 경험을 하나의 플롯으로 엮어, 흩어진 시간에 잠정적이지만 실질적인 통일성을 부여한다.
이것을 한국 현실에 적용해 보자. 2024년 12월 계엄 사태, 코로나 팬데믹, 세월호 참사, IMF 외환위기 — 우리가 집단적으로 경험한 충격들은 어떻게 의미를 획득하는가. 그것은 단순한 사건 나열로는 불가능하다. 그 사건들이 어떤 이야기로 서술되느냐에 따라 그것은 '비극'이 되기도 하고 '각성'이 되기도 하며 '연대'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역사 교과서에 실리는 서술 방식, 기념관에서 전달하는 이야기, 영화와 소설이 재현하는 방식 — 이 모두가 미메시스 II의 작업이고, 그것이 미래 세대의 시간 경험을 재형상화한다.
비판과 논쟁 — 리쾨르를 향한 물음들
물론 『시간과 이야기』는 비판도 받았다. 대표적인 것이 '서사 보편주의'에 대한 의문이다. 모든 시간 경험이 서사적 형식을 갖는가? 영국 철학자 갈렌 스트로슨은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서사로 이해하지 않으며, 각각의 순간을 불연속적으로 살아간다고 반론했다. 리쾨르의 서사적 자아 개념이 특정한 문화적, 젠더적 편향을 가질 수 있다는 페미니즘 철학의 지적도 있었다.
또한 미메시스 I과 II 사이의 관계, 즉 삶이 이미 서사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미메시스 II의 형상화가 무엇을 새롭게 추가하는가라는 질문도 제기되었다. 리쾨르 자신도 이 '선이해와 이해의 순환'이 자신의 이론이 가진 가장 어려운 문제임을 인정했다.
한편 아날 학파의 역사학자들은 리쾨르가 역사 서술에서 서사의 역할을 과도하게 강조한다고 비판했다. 역사는 서사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리쾨르는 이에 대해, 아무리 '구조적' 역사 서술도 이야기적 형식 없이는 독자에게 전달될 수 없다고 응수했다. 시간의 차원을 제거한 순수 구조는 살아 있는 역사 의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성 — 알고리즘 시대의 이야기와 시간
리쾨르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났지만, 『시간과 이야기』의 문제의식은 오히려 더 절실해졌다.
알고리즘이 큐레이션하는 숏폼 콘텐츠의 세계에서, 우리의 시간 경험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유튜브 쇼츠, 인스타그램 릴스, 틱톡의 세계에서 이야기는 점점 더 단편적이고 즉각적으로 소비된다. 플롯이 없고 시작과 끝이 없는 무한 스크롤의 시간. 이것은 리쾨르가 말한 형상화(미메시스 II)의 작동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또한 인공지능이 이야기를 생성하는 시대에 '서사적 정체성'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챗봇이 쓴 자기소개서, AI가 편집한 '나의 하이라이트 영상' — 이것들은 미메시스의 어느 단계에 속하는가. 리쾨르의 이론은 이러한 질문들과 씨름할 개념적 도구를 제공한다.
한국 사회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현상도 있다. 흙수저/금수저 담론, 취업과 주거를 둘러싼 청년 세대의 갈등, N포 세대 서사 — 이 모두는 집단적 서사적 정체성의 문제다. 어떤 이야기로 자신을 이해하느냐에 따라 행동의 방향이 달라진다. 리쾨르의 표현을 빌리면, 재형상화(미메시스 III)는 독자를 다시 행동의 세계로 돌려보낸다. 어떤 이야기를 읽고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가느냐가 삶의 실천에 직접 연결된다.
고시 공부방에서 7년을 버티는 청년, 출퇴근 전철에서 웹툰으로 하루를 견디는 직장인, 육아와 일 사이에서 정체성의 균열을 느끼는 부모 — 이들 모두는 자신의 삶을 어떤 이야기로 만들어 가느냐의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 리쾨르는 그 씨름이 단순한 심리적 위안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인간이 시간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는 근본 방식임을 보여 주었다.
결어 — 우리는 이야기하는 존재다
리쾨르는 철학의 역할이 시간의 아포리아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이해의 매개가 바로 이야기라고 했다.
인간은 언제나 이야기 속에서 산다.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며 어제의 이야기를 이어 가고, 잠들기 전 오늘 하루를 이야기로 정리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말하고, 죽음 앞에서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로 바라보려 한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이 시간 속에 존재하는 근본 방식이다.
리쾨르의 말대로, "시간은 이야기에 의해 서술되는 한에서 인간적 시간이 된다." 반대로 이야기는 시간적 실존의 조건을 묘사할 때 비로소 그 충만한 의미를 획득한다. 이 상호의존 속에서 우리는 살고, 기억하고, 기대하고, 이야기한다.
어쩌면 인간을 가장 적확하게 정의하는 방식은 "이야기하는 동물(homo narrans)"이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흩어진 시간을 모으고, 변화 속에서도 자신을 유지하며, 타인과 함께 공유할 세계를 만들어 간다. 『시간과 이야기』는 그 오랜 인간적 실천의 철학적 근거를 탐구한 기념비적인 저작이다.
주요인용문
"시간은 이야기에 의해 서술되는 한에서 인간적 시간이 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시간적 실존의 조건을 그려내는 한에서 그 충만한 의미에 도달한다."
(Le temps devient temps humain dans la mesure où il est articulé sur un mode narratif, et que le récit atteint sa signification plénière quand il devient une condition de l'existence temporelle.)
— 『시간과 이야기』 1권 (Temps et récit, t.1, Paris: Seuil, 1983)
"우리는 전-형상화된 시간으로부터 형상화된 시간을 매개로 재-형상화된 시간에 이르는 여정을 따라간다."
(Nous suivons le destin d'un temps préfiguré à un temps refiguré par la médiation d'un temps configuré.)
— 『시간과 이야기』 1권 (Temps et récit, t.1)
"서사의 도움 없이는 인격 동일성의 문제는 해결 불가능한 이율배반에 빠지게 된다. [...] 동일성(idem) 의미의 정체성에서 자기성(ipse) 의미의 정체성으로 대체되면, 이율배반은 사라진다. idem과 ipse 사이의 차이는 실체적·형식적 정체성과 서사적 정체성 사이의 차이 그 이상이 아니다."
(Sans le secours de la narration, le problème de l'identité personnelle est en effet voué à une antinomie sans solution [...] Le dilemme disparaît si, à l'identité comprise au sens d'un même (idem), on substitue l'identité comprise au sens d'un soi-même (ipse) ; la différence entre idem et ipse n'est autre que la différence entre une identité substantielle ou formelle et l'identité narrative.)
— 『타자로서 자기 자신』 (Soi-même comme un autre, Paris: Seuil, 1990)
"서사적 정체성은 안정적이고 흠 없는 정체성이 아니다. 동일한 사건들로 여러 줄거리를 구성할 수 있듯이, 자신의 삶 위에서도 다양하고 심지어 서로 대립하는 줄거리들을 짤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서사적 정체성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허물어진다."
(L'identité narrative n'est pas une identité stable et sans faille ; de même qu'il est possible de composer plusieurs intrigues au sujet des mêmes incidents [...] de même il est toujours possible de tramer sur sa propre vie des intrigues différentes, voire opposées. [...] En ce sens, l'identité narrative ne cesse de se faire et de se défaire.)
— 『타자로서 자기 자신』 (Soi-même comme un autre, Paris: Seuil, 1990)
"시간은 존재를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과거는 이미 없으며, 현재는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Le temps n'a pas d'être, puisque le futur n'est pas encore, que le passé n'est plus et que le présent ne demeure pas.)
—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11권에 대한 리쾨르의 분석에서, 『시간과 이야기』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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