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는 자신의 일기에 이런 문장을 남겼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고,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멈춰 서서 난간에 기댔다. 피로감을 느꼈다. 피오르 위로, 도시 위로 불꽃과 피가 드리워졌다.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나는 공포에 떨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자연을 관통하는 끝없는 절규가 들리는 것 같았다." (뭉크 일기, 1892년경)
이 체험이 그림이 되었다. 《절규(The Scream)》는 그 결과물이다. 화면 속 인물은 다리 위에 서서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한껏 벌리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 입에서 소리가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밖의 소리를 막으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배경의 하늘은 소용돌이치고, 피오르의 물결은 뒤틀리며, 지평선조차 불안하게 흔들린다. 저 멀리 두 사람이 무심히 걷고 있지만, 그들과 화면 앞의 인물 사이에는 거대한 심리적 단절이 존재한다.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즉각적인 공명을 경험한다. "맞아, 나도 저런 느낌을 알아." 그 느낌이 무엇인지를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히 낯선 감각은 아니다. 바로 그것이 이 그림의 철학적 핵심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2. 키르케고르: 불안은 왜 아무 이유가 없는가
뭉크의 인물이 두려워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폭풍? 심판? 죽음? 아니다. 그것이 이 그림을 단순한 공포화와 구분하는 지점이다. 인물 앞에는 아무런 구체적 위협이 없다. 이것은 불안(Angst)이지, 공포(Frygt)가 아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1844년에 출간한 저서 《불안의 개념(Begrebet Angest)》에서 이 둘을 엄밀하게 구분한다. 공포는 대상이 있다. 높은 곳이 무섭다거나, 개가 무섭다거나 — 두려움에는 '무엇'이 있다. 그러나 불안에는 대상이 없다. 불안은 '아무것도 아닌 것(Intet)'을 향한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불안은 공포보다 훨씬 다루기 어렵다. 도망칠 방향이 없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는 이 불안의 원천을 인간의 자유에서 찾는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존재다. 그 선택의 가능성 자체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미래의 공백 자체가 현기증을 만들어낸다. 그는 말한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다." (키르케고르, 《불안의 개념》, 1844) 절벽 끝에 서 있을 때, 우리는 떨어질까 봐 무서운 것만이 아니다. 동시에 스스로 뛰어내릴 수도 있다는 그 가능성이 어지럽다. 그것이 불안이다.
뭉크의 인물이 오스고스트란 다리 위에서 경험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포식자를 만난 것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실존적 조건, 즉 선택과 자유와 가능성의 무한한 공백 앞에 홀로 던져진 것이다. 키르케고르에게 이 불안은 피해야 할 감각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가장 깊은 자아와 만나는 통로다. 불안을 회피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도망치는 사람이다.
여기에 키르케고르 철학의 실존적 핵심이 있다. 그는 인간을 추상적 보편자로 분류하는 헤겔의 체계 철학에 반기를 들며, 이 나, 지금 여기의 개별 실존이야말로 철학의 출발점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절규》 속 인물은 보편적 인류의 대표자가 아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대체 불가능한 한 명의 개인으로서 떨고 있다. 그것이 실존이다.
3. 사르트르: 타자의 시선이 나를 만든다
그런데 뭉크의 그림을 다시 보면 또 다른 불편함이 있다. 저 멀리 두 사람이 걸어가고 있다. 그들은 화면 앞의 인물을 보고 있는가? 아마도 보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리 위에서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입을 벌리고 선 사람을 보지 못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는 1943년의 주저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에서 '타자의 시선(le regard)'이 인간의 실존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분석한다. 그 유명한 예시가 있다. 열쇠 구멍으로 방 안을 엿보던 사람이 갑자기 복도에서 발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부끄러움에 사로잡힌다. 아직 누가 왔는지도 확인하지 않았는데. 바로 그 순간, '누군가에게 보이는 나'라는 새로운 자아가 탄생한다. (사르트르, 《존재와 무》, 1943)
사르트르에 따르면, 타자의 시선은 나를 객체로 만든다. 내가 자유롭게 움직이는 주체일 때, 나는 나의 가능성과 선택 속에 있다. 그런데 누군가의 눈길이 나를 포착하는 순간, 나는 고정된 하나의 사물처럼 규정된다.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야." 이 규정이 나에게 달라붙는다. 나는 갑자기 스스로를 남의 눈으로 보기 시작한다. 이것이 수치(honte)의 경험이다.
《절규》의 인물은 이 타자의 시선 아래 서 있다. 저 두 사람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 혹은 볼 수도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공포다. 왜냐하면 그 시선은 자신의 무너짐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렇게 떨고 있다는 것,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황 상태에 있다는 것이 타인에게 보인다는 사실은 불안에 수치를 더한다.
사르트르가 《출구 없음(Huis Clos)》(1944)에서 쓴 그 유명한 문장 — "타인은 지옥이다(L'enfer, c'est les autres)" — 는 이 문맥에서 다시 읽혀야 한다. 이 말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타자의 존재 자체가 나를 객체로 만들고, 나의 자유를 위협하며,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재규정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뭉크의 인물이 귀를 막는 행위는, 어쩌면 그 시선으로부터도 도망치려는 몸짓일지 모른다.
4. 현기증: 자유라는 이름의 심연
키르케고르와 사르트르를 함께 놓으면, 《절규》 속 인물의 현기증이 하나의 구조를 드러낸다.
안으로부터의 불안 — 이것은 키르케고르의 영역이다. 나는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존재이고, 그 자유는 선택을 강요하며, 그 선택의 무게가 현기증을 만든다. 밖으로부터의 시선 — 이것은 사르트르의 영역이다. 타인은 나를 보고, 그 시선이 나를 고정시키며, 나는 그 규정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쓴다.
이 두 압력이 동시에 가해질 때, 인간은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다. 내 안에서 오는 불안과 밖에서 오는 시선 사이에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것이 현기증이다. 다리 난간을 붙잡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이 느끼는 그 어지러움 — 이것은 단순히 높이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근거가 흔들리는 경험이다.
흥미롭게도, 뭉크가 이 그림을 그린 시기는 그의 개인적 위기와도 맞닿아 있다. 그는 심각한 신경쇠약과 알코올 문제로 고통받고 있었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연이어 잃었다. 실존적 불안은 추상적 철학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뭉크의 경우처럼 실제 삶의 무게에서 솟아오르기도 한다. 철학은 삶을 설명하고, 삶은 철학을 증명한다.
5. 귀를 막는 것과 마주하는 것
그렇다면 이 불안과 현기증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키르케고르는 불안이 실존의 문으로 들어가는 열쇠라고 본다. 불안을 무감각으로, 바쁨으로, 소비로 가리는 사람은 결코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지 못한다. 불안 앞에 머무르는 것, 그 어지러움을 감내하는 것이 오히려 성숙한 실존으로 가는 길이다. 그는 이를 '절망을 통한 자기 발견'이라고 표현했다.
사르트르 역시 비슷한 방향을 가리킨다. 그는 인간이 '자유형을 선고받았다(l'homme est condamné à être libre)'고 말했다.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1945)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그리고 그 선택의 책임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실존적 성실성(mauvaise foi에 반하는 상태, 즉 진정성 있는 삶)이다.
21세기의 우리는 어떤가. SNS는 타자의 시선을 24시간 우리에게 쏟아붓는다. 좋아요 수가 자아의 가치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알고리즘은 끊임없이 '지금 선택하라, 지금 반응하라'를 요구한다. 뭉크의 인물이 느꼈던 그 현기증은 150년이 지난 지금, 다른 모양새로 우리 일상에 들어와 있다. 다리 위의 인물이 귀를 막는 행위는 그래서 더 친숙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와 사르트르가 함께 지적하는 것은 이것이다 — 귀를 막는 것은 해결이 아니다. 불안은 피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자유는 부인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절규》가 위대한 그림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회피 본능을 그대로 포착하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그 불안을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조용히 가리키기 때문이다.
6. 나오며
뭉크의 《절규》는 19세기 노르웨이의 한 화가가 오스고스트란의 다리 위에서 겪은 개인적 발작의 기록이자, 동시에 인류 보편의 실존적 조건을 시각화한 철학적 문서다.
키르케고르는 불안이 자유의 현기증이라고 했다. 사르트르는 타자의 시선이 나를 객체로 만들고, 그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한 투쟁이 실존이라고 했다. 뭉크의 인물은 이 두 압력의 교차점 위에 서 있다.
그 인물의 얼굴은 특정한 누군가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얼굴이고, 나의 얼굴이다. 아무 이유 없이 불안하던 날, 누군가의 시선이 갑자기 무겁게 느껴지던 순간, 선택 앞에서 멈춰버린 그 찰나 — 우리는 이미 뭉크의 그림 속에 있었다. 철학은 그 경험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다. 그리고 이름이 붙은 것은, 조금 덜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