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봄은 희망의 계절이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배웠다. 그런데 엘리엇은 봄을 잔인하다고 한다. 왜인가.
T. S. 엘리엇(T. S. Eliot, 1888~1965)이 『황무지』(The Waste Land, 1922)의 첫 행에서 던진 이 역설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그것은 이 시 전체의 핵심 테제다. 죽은 것들을 다시 살려내는 계절, 기억을 소환하는 계절, 욕망을 깨우는 계절—봄은 그래서 잔인하다. 망각 속에 있으면 고통도 없다. 겨울은 잊게 해준다. 그러나 봄은 기억하게 만든다.
이 역설 속에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정신적 풍경이 담겨 있다. 1914년에서 1918년 사이, 유럽은 1,700만 명이 넘는 사람을 잃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살아남은 자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안도가 아니었다. 공허였다. 영국 시인 윌프레드 오언(Wilfred Owen, 1893~1918)은 전장에서 죽기 직전에 썼다. 낡은 거짓말이 있다고, dulce et decorum est pro patria mori(조국을 위해 죽는 것은 달콤하고 영예롭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엘리엇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로서 폐허를 기록했다. 『황무지』는 그 폐허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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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단편들의 시 — 형식 자체가 철학이다
『황무지』는 읽기 어렵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 읽는 독자 대부분은 무슨 뜻인지 모른다.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산스크리트어가 뒤섞인다. 고대 신화와 현대 런던 거리 풍경이 충돌한다. 셰익스피어와 오비디우스와 단테와 보들레르가 주석도 없이 인용된다. 이야기의 흐름이 없다. 화자가 누구인지도 불분명하다.
이것은 실패한 시가 아니다. 형식 자체가 내용이다.
엘리엇의 스승이자 동료였던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는 이 시의 편집을 도왔다. 원고는 지금 우리가 읽는 것보다 훨씬 길었고, 파운드는 핵심만 남기도록 거칠게 잘라냈다. 엘리엇은 파운드에게 헌정사를 썼다. "il miglior fabbro"—더 탁월한 장인에게.
단편들의 병렬, 맥락 없는 인용, 의식의 흐름처럼 이어지는 이미지들—이 형식적 특징은 우연이 아니다. 엘리엇은 파편화된 현대성을 파편화된 언어로 표현했다. 통일된 세계관이 없는 시대에 통일된 서사시를 쓰는 것은 거짓말이다. 진실하게 쓰려면, 파편 자체를 보여줘야 한다.
이것은 죄르지 루카치 (Georg Lukács, 1885~1971)가 『소설의 이론』(Die Theorie des Romans, 1916)에서 말한 것과 공명한다. 루카치는 서사시가 가능했던 시대는 총체성(totality)이 있던 시대라고 했다. 신과 인간이 같은 세계를 공유하고, 삶의 의미가 자명했던 시대. 그 총체성이 무너지면 소설이 등장한다. 그리고 총체성이 완전히 붕괴하면 『황무지』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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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죽은 자의 땅 — 하이데거와 존재 망각
시의 제목 '황무지(Waste Land)'는 단순한 지리적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적 상태다. 생명이 없는 땅. 아니, 더 정확하게는, 생명이 없는데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땅.
시 속에서 런던 브리지를 건너는 군중들의 장면이 있다. "나는 죽음이 이렇게 많은 사람을 망쳐놓았는지 몰랐다(I had not thought death had undone so many)." 이 구절은 단테의 『신곡』(La Divina Commedia) 지옥편에서 왔다. 지옥의 입구에서 단테가 본 영혼들을 묘사한 대목이다. 엘리엇은 런던의 출근길 군중을 지옥의 망자들과 동일시했다.
이 이미지는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가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7)에서 분석한 '세인(das Man)'의 존재 방식과 정확히 겹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대인은 대부분 '세인'으로 산다. 세인은 고유한 자기 자신이 아니라, 익명의 군중 속에 녹아 있는 존재다. 누구나 하는 것을 하고, 누구나 말하는 것을 말하며, 자신의 유한성—죽음—을 망각한 채 살아간다. 이 존재 방식을 하이데거는 '비본래성(Uneigentlichkeit)'이라고 불렀다.
황무지의 군중들은 비본래적으로 산다. 그들은 죽지 않았지만 살아있지도 않다. 존재를 망각한 채 기능한다. 엘리엇이 포착한 것은 바로 이 비본래적 삶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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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물과 불 — 죽음과 재생의 변증법
『황무지』 전체를 관통하는 이미지 체계는 물이다. 물이 없다. 바위와 모래만 있다. 목이 마르다. 비가 오지 않는다. 그런데 동시에 물에 빠져 죽는 이미지가 반복된다. 페니키아의 상인 플레바스는 물속에서 죽는다. 「물에 빠진 죽음(Death by Water)」이라는 절이 있다.
이 역설—물의 부재와 물에 의한 죽음—은 단순한 이미지 유희가 아니다. 물은 파괴이면서 동시에 정화다. 죽음이면서 재생이다.
엘리엇은 제시 L. 웨스턴(Jessie L. Weston, 1850~1928)의 『제의에서 로맨스로』(From Ritual to Romance, 1920)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 책은 성배(Holy Grail) 전설의 기원을 고대 식물 신화와 재생 제의에서 찾는다. 황무지는 '어부 왕(Fisher King)'이 상처 입어 불임 상태가 된 땅이다. 왕의 상처가 치유될 때 황무지에 비가 내리고 생명이 돌아온다.
이 신화 구조를 엘리엇은 1차 대전 이후 유럽에 덮어씌웠다. 유럽이라는 문명 자체가 황무지가 되었다. 왕이 상처를 입었다.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가. 엘리엇은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물음을 남긴다.
프레이저(James George Frazer, 1854~1941)의 『황금 가지』(The Golden Bough, 1890~1915)도 이 맥락에서 작동한다. 프레이저는 세계의 다양한 종교와 신화에서 죽음과 부활의 원형적 패턴을 추적했다. 오시리스, 아도니스, 아티스—이 죽고 다시 사는 신들은 식물의 계절적 순환을 상징한다. 엘리엇은 이 신화들을 시 속에 빽빽하게 삽입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도 이 구조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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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시빌라의 소원 — 죽고 싶다는 것의 의미
시의 에피그라프(제사)가 있다. 페트로니우스(Petronius)의 『사티리콘』(Satyricon)에서 가져온 라틴어와 그리스어 구절이다. 시빌라(Sibylla)에 관한 이야기다. 시빌라는 아폴로로부터 영생을 얻었지만, 영원한 청춘을 함께 달라고 하는 것을 잊었다. 그래서 그녀는 늙어가면서도 죽지 못한다. 아이들이 그녀에게 묻는다. 시빌라, 무엇을 원하느냐. 그녀가 답한다. 죽고 싶다.
이것이 『황무지』가 시작되기 전에 놓인 이미지다. 죽지 못하는 삶. 끝이 없는 소진. 영생이 저주가 되는 역설.
이 이미지는 1차 대전 이후 유럽인들이 느꼈던 것의 정확한 은유다. 살아있다. 그러나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전쟁 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 힘도 없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고통 없이는 살 수 없고, 죽을 수도 없이 존재한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존재와 다르게』(Autrement qu'être, 1974)에서 존재 자체의 부담을 'il y a'(있다)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완전한 무(無)조차 아닌, 텅 빈 존재의 웅웅거림. 레비나스에게 이 '있음'은 공포의 근원이다. 존재가 의미를 잃었을 때 남는 것은 순수한 '있음'의 공포다. 시빌라가 원하는 죽음은 이 공포로부터의 탈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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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기억과 욕망의 교차로 — 프루스트와 엘리엇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breeding /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 Memory and desire."
기억과 욕망. 이 두 단어가 나란히 놓인다. 왜 봄이 잔인한가. 기억을 섞기 때문이다. 욕망을 뒤섞기 때문이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는 같은 해—1922년—에 죽었다. 그가 평생을 바쳐 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1913~1927)의 핵심 개념은 무의지적 기억(mémoire involontaire)이다. 마들렌 과자 하나가 홍차에 적셔지는 순간, 화자는 유년 시절 콩브레이를 통째로 기억해낸다. 기억은 의도적으로 소환되지 않는다. 감각이 방아쇠를 당긴다.
엘리엇과 프루스트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문제를 다룬다. 기억은 과거를 현재로 불러들인다. 그런데 과거는 돌아올 수 없다. 돌아올 수 없는 것을 현재에서 느낀다. 그 거리가 고통이다. 봄의 라일락 향기가 잃어버린 세계를 소환할 때, 그 기억은 위로가 아니라 상처다.
『황무지』의 히아신스 소녀 장면이 있다. 화자는 히아신스 정원에서 소녀를 만났다. 그녀는 꽃을 안고 왔고,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그 순간 화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아무것도 알 수 없었으며, 빛도 어둠도 아닌 침묵과 공허 속에 있었다. 이것은 신비로운 체험이다. 그러나 그 체험은 회수할 수 없다. 과거가 되어버렸다. 황무지는 그 상실 이후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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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소소스트리스 부인의 타로 카드 — 신탁의 붕괴
시 속에 소소스트리스 부인(Madame Sosostris)이 등장한다. 유럽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점쟁이다. 그녀는 타로 카드를 펼친다. 익사한 페니키아 상인, 두건을 쓴 여자, 외눈의 상인, 허공의 카드들.
그러나 그녀의 신탁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카드들은 의미를 향해 손짓하지만, 그 의미는 도달되지 않는다. "Madame Sosostris, famous clairvoyante, / Had a bad cold." 가장 지혜로운 예언자가 감기에 걸려 있다. 이 코믹한 전락이 의도적이다.
고대 세계에서 신탁은 실재했다. 델피의 아폴로 신전에서 피티아는 신의 말을 전했다. 오이디푸스는 신탁 때문에 삶이 파괴되었다. 신탁은 의미가 있었다. 그 의미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설 수 있었지만, 의미 자체는 실재했다.
현대의 소소스트리스 부인은 그 신탁의 잔해다. 의미를 생산하는 능력을 상실한 채, 형식만 남아있다. 카드를 펼치지만 아무것도 계시되지 않는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을 때(『즐거운 학문』, Die fröhliche Wissenschaft, 1882), 그것은 단순히 신학적 주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의미 체계 전체의 붕괴 선언이었다. 신이 죽으면 신탁도 죽는다. 소소스트리스 부인은 신이 죽은 세계에서 신탁의 흉내를 내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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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다국어의 혼돈 — 바벨탑 이후의 언어
앞서 언급했듯 이 시는 여러 언어가 뒤섞인다. 영어 속에 독일어가 나타나고, 이탈리아어 구절이 끼어들며, 마지막은 산스크리트어로 끝난다. "Shantih shantih shantih"—힌두교 우파니샤드(Upanishads)의 평화의 주문이다.
이 다언어성은 현대 런던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창세기의 바벨탑 이야기가 여기 있다. 인간들이 하늘에 닿는 탑을 세우려 하자 신이 언어를 혼잡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다. 흩어졌다. 바벨탑은 인류의 언어적 분열의 기원이다.
『황무지』의 언어적 혼돈은 바벨탑 이후의 세계를 재연한다. 공통의 언어가 없다. 공통의 의미가 없다. 각자 자신의 언어로 말하고, 아무도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은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1921)를 엘리엇이 『황무지』를 쓴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완성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책을 이렇게 끝맺는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Wovon man nicht reden kann, darüber muss man schweigen)."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다. 그 한계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말해질 수 없다.
엘리엇은 반대 방향에서 같은 문제에 부딪혔다. 언어가 너무 많다. 그러나 말해야 할 것은 말해지지 않는다. 산스크리트어의 '샨티(shantih)'—평화—는 영어로 번역될 때 무언가를 잃는다. 그래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 침묵 대신 낯선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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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단테의 그림자 — 지옥과 연옥 사이의 런던
『황무지』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작가는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1321)다. 직접 인용만이 아니라 구조 자체가 단테적이다. 지옥의 구조, 망자들의 행진, 연옥의 이미지들이 현대 런던의 도시 풍경과 겹쳐진다.
그런데 엘리엇의 런던은 단테의 지옥과도 다르다. 단테의 지옥에는 질서가 있다. 죄의 종류에 따라 형벌이 배정된다. 의미가 있다. 고통에도 의미가 있다. 지옥도 신의 정의의 일부다.
런던의 황무지에는 그런 의미가 없다. 고통은 있지만 정의가 없다. 죄와 벌의 연결이 없다. 단순히 모든 것이 황폐하다. 이것은 지옥보다 더 나쁜 상태일 수 있다. 지옥은 적어도 그것이 왜 지옥인지 안다. 황무지는 그것이 왜 황무지인지도 모른다.
카뮈(Albert Camus, 1913~1960)의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1942)가 여기서 교차한다. 카뮈는 부조리(absurde)를 인간의 의미에 대한 요구와 세계의 침묵 사이의 대결로 정의했다. 지옥은 부조리하지 않다. 의미가 있기 때문에. 황무지가 부조리하다. 의미가 없기 때문에. 엘리엇의 시는 부조리의 시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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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지금 여기서 — 폐허를 일상으로 사는 우리에게
『황무지』는 100년 전 시다. 그러나 지금 읽어도 낯설지 않다.
지하철에서 이어폰을 꽂은 채 서로 시선을 피하는 사람들.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단절된 사람들. 정보는 홍수처럼 쏟아지지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감각. 봄이 왔지만 설레지 않는다는 느낌. 살아있지만 살고 있지 않다는 막연한 불안.
엘리엇이 포착한 것은 1922년 런던만의 현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근대성(modernity) 자체의 구조적 특성이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2017)이 『유동하는 근대』(Liquid Modernity, 2000)에서 분석한 것처럼, 현대 사회는 고체적 안정성을 잃고 액체처럼 흘러내린다. 어떤 정체성도 고정되지 않고, 어떤 관계도 영속적이지 않으며, 어떤 의미도 확실하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엘리엇은 이 시 이후 기독교로 개종했다. 1927년 영국 성공회에 귀의했다. 그것이 그의 답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이의 답일 필요는 없다.
『황무지』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답이 아니다. 정직한 질문이다. 우리는 지금 황무지에 있는가. 있다면, 그것을 알고 있는가. 모른다면, 4월의 봄이 왜 잔인한지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만약 알고 있다면—황무지를 알아보는 눈이 있다면—그것이 구원의 첫 걸음이다. 최소한 단테는 그렇게 믿었다. 지옥을 통과하지 않고는 천국에 이를 수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