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evsky, 1821~1881)의 『죄와 벌』(Prestupleniye i nakazaniye, 1866)의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살인자이면서 동시에 철학자다. 그는 충동에 의해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의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 그 이론은 이것이다. "비범한 인간은 도덕의 경계를 넘을 권리가 있다."
전당포 노파 알료나 이바노브나를 죽인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다. 라스콜니코프에게 그녀는 하나의 실험 대상이었다. 해충 같은 존재를 제거하고, 그 돈으로 수백 명을 구할 수 있다면—그것은 살인인가, 정의인가. 그리고 나폴레옹이라면 망설였겠는가.
이 물음은 소설을 훌쩍 넘어선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한 철학적 질문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가. 뛰어난 자는 보통의 도덕 규범에서 자유로운가. 인간의 양심은 이론으로 침묵시킬 수 있는가.
도끼를 든 철학자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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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860년대 러시아 — 사상이 폭발하는 시대
소설의 배경은 1860년대 상트페테르부르크다. 이 시대를 이해하지 못하면 라스콜니코프를 이해할 수 없다.
당시 러시아는 두 가지 거대한 흐름 앞에 서 있었다. 하나는 1861년 농노해방령 이후의 급격한 사회 변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유럽에서 밀려들어오는 혁명적 사상들이었다. 공리주의, 유물론, 허무주의, 사회주의—이 사상들이 뒤섞이면서 러시아 지식인 청년층에게 일종의 사상적 열병을 일으키고 있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당시 유행하던 공리주의(utilitarianism)다. 영국 철학자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과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이 정식화한 이 사상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도덕의 기준으로 삼는다.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은 그 결과가 가져오는 행복의 총량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라스콜니코프의 논리는 여기에 뿌리를 둔다. 해충 같은 노파 한 명을 제거하여 수백 명을 돕는다면, 총 행복량은 증가한다. 따라서 그것은 옳다. 이 냉철한 계산 앞에서 '살인은 나쁘다'는 도덕 감각은 낡은 감상주의처럼 보인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사상을 직접 겨냥했다. 그는 공리주의적 합리성이 인간을 도구로 만들 때 어떤 파국이 펼쳐지는지를 소설을 통해 보여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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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라스콜니코프의 이론 — 비범인과 평범인의 이분법
소설의 철학적 핵심은 라스콜니코프 자신이 쓴 논문 속에 있다. 그는 인류를 두 종류로 나눈다.
하나는 '평범인'이다. 이들은 기존의 질서를 보존하고 재생산하는 인간들이다. 법을 지키고, 도덕을 따르며,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산다. 그들에게 규범은 절대적이다. 다른 하나는 '비범인'이다. 이들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인간들이다. 역사를 바꾸고, 기존 질서를 허물며, 더 나은 세계를 위해 기존의 법과 도덕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핵심인데—그들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
라스콜니코프는 역사적 사례로 나폴레옹을 든다. 나폴레옹은 수십만 명을 죽였지만 영웅이 되었다. 케플러와 뉴턴이 자신의 발견을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했다면 그것이 죄가 되는가. 위대한 업적을 위한 피는 정당화된다—이것이 라스콜니코프의 논리다.
이 이론은 단지 소설 속 한 청년의 망상이 아니다. 그것은 서양 근대 철학 안에 면면히 흐르는 엘리트주의적 경향의 극단적 표현이다. 플라톤(Platon, BC 428~348경)의 『국가』(Politeia)에서 철인왕(philosopher-king)은 보통 시민과 다른 윤리적 지위를 가진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역사철학강의』(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Geschichte, 1837)에서 나폴레옹을 "말을 탄 세계정신"으로 불렀다. 역사의 진보를 이끄는 위대한 개인에게는 평범한 도덕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관념은 근대 유럽 사상의 저변에 깔려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이 관념을 끝까지 밀고 간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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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니체의 그림자 — 초인은 정말 도덕 너머에 있는가
라스콜니코프의 이론을 읽을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다. 흥미롭게도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1883~85)를 발표한 것은 『죄와 벌』이 출판된 지 17년 뒤의 일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니체의 초인 사상을 읽지 않고도 그것의 위험한 귀결을 먼저 소설로 써냈다.
니체의 초인(Übermensch) 개념은 종종 오해된다. 니체가 말한 초인은 타인을 짓밟고 지배하는 강자가 아니다. 그것은 신의 죽음 이후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 기존의 노예 도덕을 극복하고 긍정의 철학으로 나아가는 인간이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Zur Genealogie der Moral, 1887)에서 기존 도덕이 약자의 원한(ressentiment)에서 비롯된 것임을 폭로했다. '악한 것'을 먼저 규정하고 자신을 '선한 것'으로 자리 잡는 노예 도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
그러나 라스콜니코프의 이론은 니체의 초인을 단순하게 오독한 버전처럼 보인다. 혹은 그 오독이 논리적으로 어디로 가는지를 보여주는 실험처럼 읽힌다. 비범인이 도덕 너머에 있다면, 비범인이 내리는 모든 판단은 정당한가. 그리고 누가 자신이 비범인임을 결정하는가.
라스콜니코프의 비극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그는 자신이 비범인인지를 증명하려고 살인을 저질렀지만, 살인 후에 발견한 것은 자신이 비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공포였다. 나폴레옹은 살인 후에 죄책감으로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라스콜니코프는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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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양심의 철학 — 침묵시킬 수 없는 목소리
라스콜니코프의 이론에서 빠진 것이 있었다. 그것은 양심(conscience)이다.
살인 직후부터 라스콜니코프는 무너진다. 열병에 걸리고, 환각을 보며, 예르미로프 수사관 앞에서 실신한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법적 처벌만이 아니다. 오히려 법적 처벌은 부차적이다. 그를 진짜로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내부에서 울리는 목소리다. 그 목소리는 이론으로 침묵시킬 수 없다.
이 양심의 문제를 가장 깊이 사유한 철학자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다. 칸트는 『도덕 형이상학 정초』(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1785)에서 도덕의 근거를 결과가 아닌 의무에서 찾는다. 어떤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는 그 결과의 유용성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의 원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지로 판단한다. 이것이 정언명령(kategorischer Imperativ)이다. "네 행위의 준칙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
라스콜니코프의 원칙—'비범인은 살인을 할 수 있다'—은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가. 모든 사람이 자신을 비범인으로 선언하고 살인을 정당화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보편화 불가능하다. 칸트적 관점에서 라스콜니코프의 이론은 도덕이 아니라 예외 요청이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가 칸트의 언어로 이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더 깊은 곳을 파고든다. 양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적으로 훈련된 두려움인가, 아니면 인간 본성 안에 새겨진 무언가인가. 라스콜니코프를 무너뜨리는 죄책감은 사회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그것은 그보다 먼저, 더 깊은 곳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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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소냐의 철학 — 고통 속의 구원
라스콜니코프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 소냐 마르멜라도바다. 그녀는 철학을 모른다. 니체도 칸트도 읽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라스콜니코프가 이론으로 도달하지 못한 곳에 몸으로 서 있다.
소냐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몸을 판다. 그녀의 상황은 어떤 합리적 계산으로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녀는 희생의 아이콘이지만 동시에 극도의 굴욕 속에 있다. 그런데 그녀는 무너지지 않는다. 무엇이 그녀를 지탱하는가.
도스토옙스키의 답은 신앙이다. 소냐는 라자로의 부활 이야기(요한복음 11장)를 라스콜니코프에게 읽어준다.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나는 라자로를 예수가 살려낸다는 이야기. 도스토옙스키에게 이것은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장 깊은 나락에 떨어진 뒤에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선언이다.
이 지점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당시 러시아 지식인 사회를 지배하던 유물론적·무신론적 사상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에게 신앙의 포기는 단순히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 도덕의 근거 자체를 상실하는 문제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이 명제는 소설 속 또 다른 인물 이반 카라마조프(『카라마조프 형제들』의)의 것이지만, 그 씨앗은 이미 라스콜니코프 안에 있다.
소냐의 철학—만약 그것을 철학이라 부를 수 있다면—은 고통을 부정하지 않고 고통 속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녀는 라스콜니코프에게 자수를 권한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이 회복의 시작이라고. 이것은 합리적 계산으로 나온 결론이 아니다. 그것은 몸으로 살아낸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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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포르피리의 소크라테스식 심문 — 대화로 해체되는 이론
소설에서 가장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장면 중 하나는 수사관 포르피리 페트로비치와 라스콜니코프의 대화 장면이다.
포르피리는 단순한 형사가 아니다. 그는 라스콜니코프의 논문을 읽었고, 그 논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그는 증거로 범인을 잡으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라스콜니코프가 스스로 자신의 이론의 모순을 발견하게 만든다. 그가 사용하는 방식은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399경)의 문답법(elenchus)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이 안다고 믿는 것을 질문을 통해 해체했다. "덕이 무엇인지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계속 질문을 던져, 결국 그가 모른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만드는 방법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이 방법론은 철학의 출발점으로 불린다.
포르피리는 라스콜니코프에게 이렇게 묻는 셈이다. 당신이 비범인이라면, 당신은 왜 이렇게 두려워하는가. 비범인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비범인인가. 이 질문 앞에서 라스콜니코프의 이론은 그 자신의 행동에 의해 반박된다.
이것이 소설의 철학적 구조다. 라스콜니코프의 이론은 외부에서 공격받아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론을 실행에 옮긴 자신의 내면에서 무너진다. 이론과 현실의 충돌, 사변과 실존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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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자유의지의 역설 —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라스콜니코프는 자유를 원했다. 그는 평범인의 도덕적 구속에서 벗어나 비범인의 자유를 얻으려 했다. 그런데 살인 이후 그는 더욱 극단적인 부자유 상태에 빠진다. 죄책감, 편집증, 사회적 고립. 그는 이론상 자유를 획득했지만 실제로는 지옥에 갇혔다.
이 역설은 자유의지(free will)와 결정론(determinism)을 둘러싼 철학적 논쟁의 핵심에 닿는다.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 1943)에서 인간을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로 규정했다. 인간은 본질이 없다. 우리는 먼저 존재하고, 그다음 스스로를 만들어간다(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이 철저한 자유는 동시에 철저한 책임을 의미한다. 모든 선택에서 나는 전적으로 책임을 진다. 그 책임에서 도망칠 수 없다.
라스콜니코프는 이 사르트르적 자유의 역설을 살아낸다. 그는 자신의 자유를 증명하기 위해 행동했지만, 그 행동의 결과로 그는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완전히 구속된다. 살인이라는 선택이 그의 나머지 삶 전체를 규정해버린다.
더 깊은 곳에서 도스토옙스키가 묻는 것은 이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무엇인가. 도덕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유인가, 아니면 도덕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자유인가. 자수를 권하는 소냐의 말—"고통을 받아들여라"—은 역설적으로 자유를 향한 초대다. 스스로의 행위에 책임을 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유의 시작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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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도스토옙스키 대 투르게네프 — 러시아 지성의 대결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진공 속에서 쓰이지 않았다. 그것은 당시 러시아 사상계의 격렬한 논쟁 속에서 탄생했다.
1862년 이반 투르게네프(Ivan Turgenev, 1818~1883)는 소설 『아버지와 아들』(Ottsy i deti)을 발표하면서 '니힐리즘(nihilism)'이라는 말을 러시아 사회에 유행시켰다. 소설의 주인공 바자로프는 모든 기존 권위와 전통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자다. 그는 말한다. "자연은 신전이 아니라 작업장이다. 인간은 그곳에서 일하는 일꾼이다." 예술도, 감정도, 도덕도 과학적 합리성 앞에서는 의미가 없다.
이 니힐리즘의 물결 속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정반대 방향을 바라봤다. 그에게 허무주의는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이념이었다. 모든 것을 부정하면 결국 인간도 부정된다. 라스콜니코프의 이론은 허무주의적 합리성의 논리적 귀결이다. 인간이 도구로 계산될 수 있다면, 그 계산 앞에서 살인은 합리적 선택이 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것을 뒤집어 보여주었다. 합리적 계산은 인간의 내면이 작동하는 방식이 아니다. 인간은 수학적으로 최적화되는 존재가 아니라 죄책감을 느끼고, 사랑하고, 용서를 구하는 존재다. 그 비합리적인 내면이 오히려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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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지금 여기서 — 우리 시대의 라스콜니코프들
『죄와 벌』이 출판된 지 160년이 지났다. 그러나 라스콜니코프의 이론은 시대를 바꾸어가며 계속 등장한다.
20세기에 이 이론은 전체주의의 언어로 재등장했다. 역사의 진보를 위해 개인의 희생은 불가피하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고통은 정당화된다. 이 논리로 수천만 명이 죽었다. 스탈린도, 마오도, 폴 포트도 자신들이 비범인이라고 믿었다.
21세기에 이 이론은 더 세련된 형태로 등장한다. 알고리즘적 효율성의 이름으로, 집단의 이익의 이름으로, 문명의 진보의 이름으로.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논리는 오늘도 우리 주변에서 작동한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악의 평범성』(Eichmann in Jerusalem, 1963)에서 대량 학살의 가해자가 반드시 괴물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아이히만은 그저 명령에 따르고, 규칙을 지키며,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는 관료였다. 생각하지 않는 것, 그것이 악의 근원이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적어도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그 결과를 직접 겪었으며, 결국 무너졌다. 그 무너짐이 그를 구원의 가능성 앞에 데려다 놓았다.
생각하지 않는 악보다 생각하는 악이 더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하는 악은 적어도 자신과 대면할 수 있다. 그 대면에서 무언가가 시작된다.
도스토옙스키가 160년 전에 묻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것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이론과 끝까지 대면할 용기가 있는가. 그리고 그 이론이 틀렸을 때, 무너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