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우유를 아침에 마신다 우리는 저녁에 마신다
마신다 한낮에 마신다 밤에 마신다 우리는 마시고 마신다"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검은 우유(schwarze Milch)'라는 불가능한 이미지. 우유는 희다. 생명을 준다. 어머니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검다. 그리고 마신다. 반복해서, 집요하게, 아침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멈추지 않는다.
파울 첼란(Paul Celan, 1920~1970)이 1945년에 쓴 시 「죽음의 푸가」(Todesfuge)는 20세기 독일어 시문학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힌다. 루마니아 태생의 유대인 첼란은 나치 점령하에서 부모를 잃었다. 어머니는 총에 맞았고, 아버지는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죽었다. 첼란 자신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 시를 썼다.
그런데 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이것은 증언인가, 예술인가. 홀로코스트를 시로 쓸 수 있는가. 쓸 권리가 있는가. 그리고 쓴다면, 그 언어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가.
이 물음들이 「죽음의 푸가」를 단순한 시 한 편 이상의 것으로 만든다. 이 시는 언어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관한 철학적 사건이다.
2. 푸가(Fuge)라는 형식 — 음악이 언어를 구한다
제목의 '푸가(Fuge)'는 음악 용어다.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의 『푸가의 기술』(Die Kunst der Fuge, 1749~50)로 대표되는 대위법적 형식. 하나의 주제가 여러 성부에서 반복되고 변형되고 쫓고 쫓기며 얽힌다. 같은 것이 되풀이되지만 매번 다르다. 구조는 엄격하지만, 그 엄격함 속에서 무한한 변주가 가능하다.
첼란은 이 음악 형식을 언어 안에 가져왔다. 시에서 몇 개의 구절이 마치 성부처럼 반복된다. "검은 우유를 마신다", "마르가레테", "줄라미트", "독일의 마이스터". 이 구절들은 각각 등장했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고, 다른 구절과 교차된다. 읽는 사람은 읽는 것인지 듣는 것인지 구분이 어렵다.
왜 이 형식인가. 여기에 첫 번째 철학적 통찰이 있다. 홀로코스트의 경험은 선형적 서사로 담을 수 없다. 시작이 있고 전개가 있고 결론이 있는 이야기로 정리할 수 없다. 그것은 반복이고, 루프이고, 빠져나올 수 없는 구조다. 아우슈비츠의 연기는 한 번 피어오르고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매일 아침, 매일 저녁, 마치 검은 우유처럼 반복해서 마셔진다. 푸가 형식은 이 반복의 구조를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1903~1969)는 『미학 이론』(Ästhetische Theorie, 1970)에서 예술 형식이 내용과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말하는가가 무엇을 말하는가다. 첼란의 푸가 형식은 장식이 아니다. 그것 자체가 의미의 핵심 담지자다.
3. "독일의 마이스터" — 아름다움과 학살의 공존
시의 중심에 한 인물이 있다. 수용소를 관장하는 독일인 장교. 그는 뱀들에게 편지를 쓴다. 저녁이면 독일로 편지를 쓴다. 황금빛 머리카락의 마르가레테에게. 그리고 낮에는 유대인들에게 무덤을 파라고 명령한다. 춤추면서 파라고 한다. 음악을 연주하면서 죽음을 향해 가라고 한다.
그는 "독일의 마이스터(der Tod ist ein Meister aus Deutschland)"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마이스터다. '마이스터'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주인'이나 '지배자'가 아니다. 마이스터는 장인(匠人)이다. 숙련된 기술의 소유자.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Wilhelm Meisters Lehrjahre, 1795~96)에서처럼, 마이스터는 독일 교양의 이상과 연결된다.
죽음이 마이스터라고 할 때, 첼란은 무엇을 말하는가. 학살은 무능이나 광기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숙련된 기술로, 조직적으로, 효율적으로 수행되었다. 홀로코스트는 근대 관료제와 기술 문명의 산물이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1963)에서 분석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 바로 이것이다.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었다. 그는 명령에 복종하는 평범한 관료였다. 그런 사람이 수백만 명의 죽음을 관리했다.
그리고 그 마이스터는 저녁이면 편지를 쓴다. 사랑하는 마르가레테에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이 낮에는 인간을 죽이는 기계를 작동시켰다. 이 공존이 20세기 최대의 도덕적 공포다.
4. 마르가레테와 줄라미트 — 두 이름의 충돌
시에는 두 여성 이름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마르가레테(Margarete)와 줄라미트(Sulamith).
마르가레테는 괴테의 『파우스트』(Faust, 1808)에 나오는 그레첸의 다른 이름이다. 순수하고 금발의 독일 여성. 유럽 낭만주의가 이상화한 여성성의 상징. 그리고 줄라미트는 구약성서 「아가(雅歌)」(Song of Songs)에 나오는 여인의 이름이다. "검고 아름다운" 그녀. 유대 문화의 여성적 상징.
시는 이렇게 끝난다.
"황금빛 머리카락의 마르가레테 / 재빛 머리카락의 줄라미트"
황금(golden)과 재(Asche). 이 대비가 모든 것을 압축한다. 유럽 문화의 찬란한 유산과 그 문화가 학살한 사람들의 재. 마르가레테는 아직 살아 있다. 줄라미트의 머리카락은 재가 되었다. 시는 독일과 유대의 관계를, 유럽 문명과 홀로코스트의 관계를, 아름다움과 학살의 관계를 이 두 이름의 병치로 표현한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정신현상학』(Phänomenologie des Geistes, 1807)에서 역사를 정신(Geist)의 자기 실현 과정으로 보았다. 독일 관념론의 절정. 그러나 아우슈비츠는 이 낙관적 역사철학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정신의 자기 실현이 가스실로 귀결될 수 있는가. 황금빛 마르가레테가 재빛 줄라미트를 만들어낸 문명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5. 아도르노의 금지 — 아우슈비츠 이후의 시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Nach Auschwitz ein Gedicht zu schreiben, ist barbarisch)."
아도르노가 『프리즘』(Prismen, 1955)에서 한 이 말은 20세기 문화 비평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고 가장 자주 오해된 문장이다. 많은 사람이 이 말을 홀로코스트 이후에는 시를 써선 안 된다는 금지령으로 읽었다. 그리고 즉시 반박했다. 첼란이 쓰지 않았는가.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1987)가 쓰지 않았는가.
그러나 아도르노의 말은 단순한 금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물음이었다. 홀로코스트를 미적 형식으로 담는 것이 가능한가. 그 행위 안에 어떤 위험이 있는가. 끔찍한 것을 아름답게 만들 때, 그 아름다움은 고통을 승화시키는가 아니면 소비하는가.
첼란 자신도 이 물음과 씨름했다. 「죽음의 푸가」가 서독에서 교과서에 수록되고, 낭송회에서 아름답게 읽히고, 음악으로 작곡되고, 감동의 눈물을 자아내게 되자, 첼란은 불편해했다. 아우슈비츠의 고통이 미적 감동의 원료가 되는 것에 저항감을 느꼈다. 그래서 후기로 갈수록 그의 시는 더 어두워지고, 더 압축되고, 더 접근하기 어려워졌다. 독자가 편안하게 즐길 수 없도록.
아도르노는 나중에 자신의 말을 수정했다. 지속적인 고통은 표현될 권리를 갖는다고. 피해자가 그것을 말할 권리를. 그러나 동시에 고통을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그 고통에서 무언가를 빼앗는 위험을 안고 있다고.
6. 언어의 위기 — 독일어로 쓴다는 것
첼란이 독일어로 시를 썼다는 사실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다. 독일어는 그의 어머니가 사랑했던 언어다. 어린 시절 읽었던 괴테와 릴케의 언어. 동시에 그것은 어머니를 죽인 자들의 언어다.
이것은 언어와 정체성과 트라우마의 관계에 관한 가장 첨예한 사례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은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1921)에서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고 했다. 언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언어는 세계를 구성한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언어가 결정한다.
첼란에게 독일어는 세계이면서 동시에 그 세계를 파괴한 것이다. 그는 독일어를 버릴 수 없었다. 그 안에 어머니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언어를 그대로 쓸 수도 없었다. 학살자들이 쓰던 그 언어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래서 첼란은 독일어를 변형했다. 비틀었다. 단어를 합성하고, 문법을 어기고, 기존의 의미 체계를 해체했다. 「죽음의 푸가」의 '검은 우유'는 이 작업의 시작이다. 언어 안에서 언어와 싸운 것이다. 폴 드 만(Paul de Man, 1919~1983)을 비롯한 해체론 비평가들이 첼란에게 열렬한 관심을 보인 것은 이 때문이다. 첼란의 시는 언어가 자기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는 장소다.
7. 침묵의 철학 —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를 이 유명한 문장으로 마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Wovon man nicht sprechen kann, darüber muß man schweigen)."
이것은 체념이 아니다.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인식이다. 논리와 언어의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 비트겐슈타인에게 그 침묵의 영역에는 윤리, 미학, 종교가 속한다. 언어로 말하면 왜곡되는 것들.
홀로코스트는 이 침묵의 영역에 속하는가. 어떤 생존자들은 그렇다고 느꼈다. 프리모 레비는 수십 년간 아우슈비츠에 대해 썼지만, 자신의 경험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결코 전달될 수 없다고 했다. 실제로 살아남은 사람은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이 아니라고.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은 돌아오지 못했다고.
그렇다면 첼란은 무엇을 한 것인가.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했다. 그리고 그 불가능성을 언어 안에 새겨 넣었다. '검은 우유'가 불가능한 이미지인 것처럼. 시 자체가 언어의 한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침묵은 말로 표현될 수 없다. 그러나 시는 침묵을 향해 말함으로써, 침묵의 존재를 가리킬 수 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전체성과 무한』(Totalité et Infini, 1961)에서 타자의 얼굴이 우리에게 절대적 요구를 가한다고 말한다. 타자의 고통은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다. 죽은 자의 얼굴, 재가 된 줄라미트의 머리카락—그것은 어떤 이론도, 어떤 철학도 완전히 담을 수 없다. 첼란의 시는 이 레비나스적 타자의 얼굴을 향한 언어적 응답이다.
8. 트라우마와 기억 — 증언의 불가능성과 필요성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Se questo è un uomo, 1947)와 함께, 첼란의 「죽음의 푸가」는 홀로코스트 문학의 두 축을 형성한다. 하나는 산문적 증언, 하나는 시적 언어. 그런데 이 둘은 공통의 딜레마를 공유한다. 증언의 불가능성.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첼란에 관한 에세이 「쉬볼레트」(Schibboleth, 1986)에서 이 딜레마를 분석한다. 증언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을 말하는 행위다. 그러나 홀로코스트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경험한 자—가스실에서 죽은 자—는 말할 수 없다. 살아남은 자의 증언은 항상 간접적이다. 완전한 증언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증언해야 한다.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1942~)은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Quel che resta di Auschwitz, 1998)에서 생존자의 증언을 무제마니(Muselmann, 수용소에서 생사의 경계에 있는 사람)를 대신해서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말할 수 없는 자를 위해, 말할 수 있는 자가 말한다. 그 말함은 항상 부분적이고, 불완전하고, 대리적이다.
첼란의 시는 이 대리 증언의 가장 높은 형식이다. 죽은 어머니를 위해, 재가 된 줄라미트를 위해, 돌아오지 못한 모든 이를 위해. 그는 불가능한 증언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를 찾았다. 혹은 그 불가능성을 언어로 형상화했다.
9. 첼란의 죽음 — 시인은 왜 센 강에 뛰어들었는가
1970년 4월, 첼란은 파리의 센 강에 몸을 던졌다. 향년 49세. 정확한 날짜는 모른다.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열흘 뒤였다.
그의 죽음은 「죽음의 푸가」를 다른 각도에서 읽게 만든다. 시인은 결국 살아남지 못했다. 트라우마를 언어로 담으려는 시도가, 그 언어와 함께 강에 가라앉았다.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1942)를 이 물음으로 시작한다. "진정으로 심각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는 물음. 카뮈는 부조리를 인정하면서도 저항할 것을 권고한다. 시지프는 바위를 밀어 올린다. 다시 굴러내려도.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고.
첼란은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그가 시를 쓴 25년이, 그 언어로의 저항이 결국 지속될 수 없었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의 죽음 자체가 마지막 증언이었던 것인가. 홀로코스트의 그림자는 25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검은 우유는 끝까지 마셔진다는.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7)에서 죽음을 향한 존재(Sein-zum-Tode)를 분석했다. 죽음의 가능성을 선취함으로써 본래적 실존이 가능해진다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하이데거는 나치당원이었다. 첼란은 하이데거를 만났고, 그로부터 어떤 사과의 말도 끝내 듣지 못했다. 그 침묵이 첼란을 얼마나 무너뜨렸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안다. 검은 우유는 계속 마셔졌다는 것을.
10. 지금 여기서 — 우리는 재를 기억하는가
홀로코스트가 끝난 지 80년이 지났다. 생존자들은 거의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 기억은 이제 책과 영화와 기념관과 교육 커리큘럼 안에 있다. 디지털화된 기억. 클릭으로 접근 가능한 비극.
이것으로 충분한가. 아우슈비츠를 스마트폰으로 검색하고, 다큐멘터리를 스트리밍으로 보고, 홀로코스트 추모일에 SNS에 글을 올리는 것이—죽은 자에 대한 적절한 응답인가.
첼란의 시가 지금도 유효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시는 쉽게 소비되기를 거부한다. '검은 우유'는 설명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해하려 하면 빠져나간다. 감동하려 하면 저항한다. 그것은 독자를 편안한 거리에 두지 않는다. 불편하게 만든다. 이 불편함이 정직한 반응이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형태의 집단적 폭력이 일어나고 있다. 그 현장을 우리는 실시간으로 화면 속에서 본다. 보면서, 스크롤을 내린다. 이 스크롤이 아도르노의 질문에 대한 우리 시대의 답이다. 우리는 고통을 소비한다. 감동하고, 공유하고, 잊는다.
「죽음의 푸가」는 이 소비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재빛 줄라미트의 머리카락은 화면 속에서 픽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어 속에서 계속 타고 있다. 우리가 시를 읽는 한.
그것이 언어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도, 언어가 해야 하는 것이다.
참고 자료
- 파울 첼란, 「죽음의 푸가」(Todesfuge, 1945) — 『파울 첼란 시전집』, 김재혁 역, 책세상, 2011
- 테오도르 아도르노, 『프리즘』(Prismen, 1955) — 홍승용 역, 문학동네, 2004
- 테오도르 아도르노, 『미학 이론』(Ästhetische Theorie, 1970) — 홍승용 역, 문학과지성사, 1997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1963) — 김선욱 역, 한길사, 2006
-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Se questo è un uomo, 1947) — 이현경 역, 돌베개, 2007
- 에마뉘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Totalité et Infini, 1961) — 김도형·문성원·손영창 역, 그린비, 2018
- 자크 데리다, 「쉬볼레트」(Schibboleth, 1986) — 『문학의 행위』, 데릭 애트리지 엮음, 문학과지성사, 2013 (부분)
- 조르조 아감벤,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Quel che resta di Auschwitz, 1998) — 정문영 역, 새물결, 2012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1921) — 이영철 역, 책세상, 2006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1942) — 김화영 역, 민음사, 1997
-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7) — 이기상 역, 까치,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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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후보 열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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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검은 우유를 마신다 — 홀로코스트, 언어,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
2. 재빛 머리카락의 줄라미트 — 아우슈비츠 이후 시는 가능한가
3. 죽음은 독일에서 온 마이스터다 — 학살의 언어와 아름다움의 역설
4. 언어는 재 속에서도 말한다 — 첼란과 침묵의 철학
5. 불가능한 증언 — 「죽음의 푸가」와 홀로코스트의 기억
6. 푸가, 반복되는 죽음의 음악 — 트라우마와 형식의 철학
7. 마르가레테와 줄라미트 — 황금과 재, 두 세계의 충돌
8. 아도르노의 금지와 첼란의 대답 — 야만 이후의 시
9. 독일어로 독일을 고발하다 — 첼란이 선택한 언어의 역설
10. 스크롤을 멈춰야 할 때 — 「죽음의 푸가」가 지금도 불편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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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 후킹 포인트 열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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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검은 우유"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미 시와 철학의 경계에 서 있다.
2.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 그런데 첼란은 왜 썼는가. 이 역설이 20세기 최대의 문학적 질문이다.
3. 학살자가 저녁마다 연인에게 편지를 썼다. 낭만과 살인이 같은 손 안에 있었다.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 부른 것.
4. 독일어는 어머니의 언어였고, 어머니를 죽인 자들의 언어였다. 첼란은 그 언어로 그들을 고발했다.
5.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하라"고 했다. 첼란은 그 침묵을 언어로 형상화했다.
6. 황금빛 마르가레테와 재빛 줄라미트. 두 이름이 나란히 놓이는 순간, 유럽 문명 전체가 심판대에 선다.
7. 고통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 — 예술인가, 착취인가. 「죽음의 푸가」가 지금도 불편한 진짜 이유.
8. 첼란은 1970년 센 강에 몸을 던졌다. 시인의 죽음은 그의 시를 어떻게 다시 읽게 만드는가.
9. 홀로코스트를 스마트폰으로 검색하고, 다큐를 스트리밍하고, 추모 SNS를 올린다 — 이것으로 충분한가.
10. 재는 사라지지 않는다. 언어 안에서 계속 타고 있다. 우리가 이 시를 읽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