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ë, 1818~1848)의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 1847)은 이 물음으로 시작하고, 이 물음으로 끝난다. 소설 내내 히스클리프의 출신은 밝혀지지 않는다. 그는 어느 날 언쇼 씨가 리버풀에서 데려온 검은 피부의 아이였다. 집시인지, 사생아인지, 노예 후손인지—아무것도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불명확함은 결함이 아니다. 그것은 소설의 핵심 장치다. 히스클리프는 사회적 범주로 설명될 수 없는 존재다. 그는 계급도, 혈통도, 정체성도 없다. 그는 오직 캐서린 언쇼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이 배신당한 이후의 복수심으로만 존재한다. 그는 사회 바깥에서 온 힘이고, 문명이 억압해온 무언가의 귀환이다.
이 에세이는 그 귀환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2. 요크셔의 황야 — 자연과 문명의 경계선
소설의 공간은 크게 둘로 나뉜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이 자란 워더링 하이츠(Wuthering Heights)는 황야 위의 거칠고 어두운 농장이다. 그 맞은편 계곡 아래에는 에드거 린턴이 사는 스래쉬크로스 그레인지(Thrushcross Grange)가 있다. 화사하고 질서 잡힌 저택이다.
이 두 공간의 대립은 단순한 배경 묘사가 아니다. 그것은 철학적 이분법의 공간화다. 워더링 하이츠는 자연, 본능, 욕망, 무질서의 세계다. 스래쉬크로스 그레인지는 문명, 교양, 규범, 질서의 세계다. 캐서린은 이 두 세계 사이에서 찢긴다. 히스클리프를 사랑하면서 린턴과 결혼하는 것, 그것은 단순한 배신이 아니라 분열이다.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는 『에밀』(Émile, 1762)과 『인간 불평등 기원론』(Discours sur l'origine de l'inégalité, 1755)에서 인간이 문명에 의해 타락했다고 주장했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순수하고 자유로웠으나, 재산과 계급과 허영이 그 자유를 앗아갔다. 루소의 시선으로 보면 워더링 하이츠는 순수한 자연의 공간이고, 스래쉬크로스 그레인지는 타락한 문명의 공간이다.
그러나 브론테는 루소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워더링 하이츠의 자연은 아름답지 않다. 그것은 폭풍이고, 황무지이며, 으르렁거리는 야성이다. 문명이 억압한 것은 순수함이 아니라 맹렬함이다.
3. 캐서린의 분열 — "나는 히스클리프다"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을 꼽는다면 이것이다. 캐서린이 가정부 넬리 딘에게 털어놓는 고백: "나는 히스클리프가 항상 내 마음속에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야—그는 나 자신보다 나 자신에 더 가까이 있어. 내 영혼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든, 그의 영혼과 내 영혼은 같은 것이야."(I am Heathcliff)
이것은 낭만적 사랑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정체성의 선언이다. 캐서린에게 히스클리프는 연인이기 이전에 자신의 다른 반쪽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n, BC 428~348경)은 『향연』(Symposium, BC 385~370경 추정)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원래 하나의 완전한 구체(球體)였으나 신들에 의해 둘로 쪼개졌고, 그 반쪽을 찾아 헤매는 것이 사랑이라고. 에로스는 결핍에서 비롯되며, 잃어버린 전체성을 회복하려는 욕망이다.
캐서린의 "나는 히스클리프다"는 이 플라톤적 의미에서의 사랑이다. 그러나 브론테는 여기서도 낭만주의 철학의 아름다운 결말을 허용하지 않는다. 전체성을 찾았다고 믿는 그 순간, 캐서린은 그 전체성을 스스로 파괴한다. 린턴을 선택함으로써.
왜 그러는가. 캐서린 자신의 대답은 솔직하다. 히스클리프는 가난하고, 린턴은 부유하다. 히스클리프와 결혼하는 것은 사회적 추락이고, 린턴과 결혼하는 것은 지위의 상승이다. 계급이 사랑을 이긴다. 문명이 자연을 이긴다.
캐서린은 그 선택의 결과를 직접 겪는다. 그녀는 린턴의 저택에서 서서히 죽어간다. 몸이 아니라 영혼이 먼저 죽는다.
4. 히스클리프의 복수 — 원한(르상티망)의 철학
히스클리프는 문학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복수자 중 하나다. 캐서린이 린턴을 선택한 뒤, 그는 사라진다. 3년 후 돌아왔을 때 그는 부유해져 있고, 냉혹해져 있으며, 체계적이다. 그의 복수는 감정적 폭발이 아니다. 그것은 수십 년에 걸친 설계다.
그는 워더링 하이츠를 빼앗고, 스래쉬크로스 그레인지를 빼앗으며, 자신을 짓밟은 계급 질서 전체를 역전시킨다. 그리고 다음 세대인 힌들리의 아들 해어턴과 린턴의 딸 캐시를 자신의 복수 계획 속으로 끌어들인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1887)에서 르상티망(ressentiment)의 개념을 분석했다. 르상티망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억압한 타자를 향한 복수심이 내면화되어 삶 전체를 지배하게 된 상태다. 강자는 자신의 힘으로부터 가치를 만들지만, 약자는 강자를 증오하는 것으로부터 가치를 만든다. 니체는 이것을 노예도덕의 기원으로 봤다.
히스클리프는 르상티망의 화신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약자가 아니다. 그는 한때 사랑받았고, 그 사랑이 계급에 의해 부정당했다. 그의 복수는 계급 질서 자체를 향한 것이다. 그 점에서 히스클리프는 니체가 경멸한 수동적 르상티망의 인물이 아니라, 계급 질서의 폭력성을 가장 극단적 방식으로 폭로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니체의 분석은 여기서도 유효하다. 복수에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바친 자는 복수가 완성되는 순간 공허해진다. 히스클리프가 소설 말미에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목표를 이루었고, 그래서 살아야 할 이유를 잃었다.
5. 숭고의 미학 — 폭풍과 황야의 철학
『폭풍의 언덕』을 읽으면서 독자는 불편하다. 히스클리프는 악당이다. 그는 아이들을 학대하고, 여성을 도구로 쓰며, 인간으로서의 모든 온기를 스스로 소거한다. 그런데 독자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의 잔혹함은 혐오스럽지만, 동시에 무언가 압도적인 힘을 발산한다.
이 역설을 설명하는 미학적 범주가 숭고(the Sublime)다.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1797)는 『숭고와 미에 관한 철학적 탐구』(A Philosophical Enquiry into the Origin of Our Ideas of the Sublime and Beautiful, 1757)에서 숭고와 미를 구분했다. 미(beauty)는 부드럽고, 작고, 조화롭고, 쾌락을 준다. 숭고(sublime)는 크고, 어둡고, 거칠며, 공포와 경외를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버크에 따르면 숭고의 핵심은 위험에 대한 지각이다. 죽음을 연상시키지만 실제로는 안전한 거리에서 마주할 때, 그 압도적 힘은 쾌락의 일종으로 변환된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판단력 비판』(Kritik der Urteilskraft, 1790)에서 숭고를 한 걸음 더 철학화했다. 칸트에게 숭고는 자연의 거대한 힘이 인간의 감각 능력을 압도할 때, 그럼에도 인간의 이성이 그 힘을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경험이다. 숭고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물리적 왜소함과 동시에 정신적 위대함을 깨닫는다.
요크셔의 황야, 끝없이 부는 바람, 언덕 위의 어두운 농장—이것들은 숭고의 무대다. 그리고 히스클리프는 이 숭고한 자연의 일부처럼 그려진다. 그는 단순히 악한 인간이 아니라, 문명이 길들이지 못한 자연의 힘 그 자체다. 독자가 그에게 매혹되는 것은 그가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숭고하기 때문이다.
6. 고딕 소설의 전통 — 억압된 것의 귀환
『폭풍의 언덕』은 고딕 소설(Gothic novel)의 전통 위에 서 있다.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된 고딕 소설은 호레이스 월폴(Horace Walpole, 1717~1797)의 『오트란토의 성』(The Castle of Otranto, 1764)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낡은 저택, 유령, 비밀, 광기, 억압된 욕망—이것들이 고딕 소설의 소재들이다.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가 「두려운 낯섦」(Das Unheimliche, 1919)에서 분석한 언캐니(uncanny)의 개념은 고딕 소설의 공포 원리를 이론화한다. 언캐니는 단순히 낯선 것에서 오는 공포가 아니다. 그것은 친숙했던 것이 억압된 뒤 다시 귀환할 때 생기는 불안이다. 우리가 오래전 알고 있었으나 억눌러왔던 무언가가 변형된 형태로 돌아올 때의 소름 끼치는 낯섦.
소설에서 캐서린의 유령이 대표적이다. 죽은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의 환각 속에서, 소설 첫 장에서 록우드가 꾸는 악몽 속에서, 반복적으로 귀환한다. 그 유령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언캐니한 것이다. 잊힌 것, 억압된 것, 봉인된 것이 돌아오는 것.
히스클리프 자신도 마찬가지다. 그는 워더링 하이츠 가문이 쫓아낸 존재였다. 힌들리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를 하인으로 격하시키고 굴욕을 줬다. 그는 쫓겨났고, 사라졌으며, 그리고 귀환했다. 억압된 것의 귀환—언캐니의 공식이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7. 계급과 욕망 — 빅토리아 시대의 불안
『폭풍의 언덕』이 출판된 1847년은 빅토리아 시대의 한복판이다. 산업혁명이 영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었고, 새로운 부유 계급이 형성되는 동시에 전통적 지주 계급이 흔들리고 있었다. 계급의 경계선이 느슨해지면서 오히려 계급 불안은 더 극심해졌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1848)에서—브론테가 소설을 쓰던 바로 그해에 집필되고 있던—자본주의 사회의 계급투쟁을 분석했다. 마르크스의 언어로 보면 히스클리프는 계급 체계의 희생자이자 동시에 그 체계 안에서 역전을 꾀하는 자다. 그러나 그의 역전은 체계를 붕괴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체계를 내면화하여 그 논리를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부와 토지가 인간을 결정한다는 논리를 거꾸로 들이밀어 적들을 파멸시킨다.
히스클리프의 비극은 여기 있다. 그는 계급 질서의 피해자이면서, 그 질서의 도구로 복수를 수행한다. 그는 체계 밖에서 체계와 싸우지 않는다. 체계 안으로 들어가, 체계의 무기로 체계의 수혜자들을 친다. 그 전쟁에서 이기지만, 이김으로써 자신도 그 체계의 일부가 된다.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가 『경제와 사회』(Wirtschaft und Gesellschaft, 1922)에서 분석한 것처럼, 사회 구조는 단순히 외부에서 가해지는 억압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개인들이 내면화하고 재생산하는 것이다. 히스클리프는 그 내면화의 가장 극단적 사례다.
8. 캐서린의 죽음 — 분열된 주체의 귀결
캐서린은 죽는다. 히스클리프와의 마지막 만남 이후, 린턴의 딸을 낳다가. 그녀의 죽음은 신체적 사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신을 둘로 찢는 것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결과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정신현상학』(Phänomenologie des Geistes, 1807)에서 의식의 자기분열을 다룬다. 정신은 자기 자신과 대립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 변증법적 운동이 실패할 때—즉, 분열이 종합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주체는 파멸한다.
캐서린의 분열은 해소되지 않는다. 그녀는 워더링 하이츠의 히스클리프와 스래쉬크로스 그레인지의 린턴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고, 선택했지만, 그 선택이 진짜 자신을 죽였다. 그녀가 말하는 "나는 히스클리프다"는 단순한 사랑 고백이 아니라, 선택 불가능성의 비명이었다.
정신분석학의 언어를 빌리면, 캐서린은 상징계(린턴의 세계, 계급 질서, 사회적 자아)와 실재계(히스클리프, 황야, 본능적 욕망) 사이에서 찢긴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이 분석한 것처럼, 상징계에 완전히 포획된 주체는 자신의 실재를 잃고, 실재계에 완전히 사로잡힌 주체는 상징적 질서 안에서 기능할 수 없다. 캐서린은 둘 다 포기할 수 없었기에 둘 다를 잃었다.
9. 다음 세대 — 파괴 이후에 오는 것
소설은 단순히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이야기가 아니다. 소설의 절반 이상은 다음 세대의 이야기다. 히스클리프의 아들 린턴, 힌들리의 아들 해어턴, 캐서린의 딸 캐시.
히스클리프는 이 다음 세대를 자신의 복수 계획에 끌어들인다. 해어턴을 무식하게 키워 굴욕을 주고, 캐시를 린턴과 강제로 결혼시켜 재산을 빼앗는다. 부모 세대의 죄와 상처가 자녀 세대에게 반복된다.
이것은 성서적 이미지이기도 하고, 정신분석학적 진실이기도 하다. 부모가 해결하지 못한 것은 자식에게 전달된다. 외상(trauma)은 세대를 건너 전달되며, 당사자가 아닌 자들이 그 무게를 짊어진다.
그러나 소설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히스클리프가 죽고 난 뒤, 해어턴과 캐시는 함께 책을 읽기 시작한다. 해어턴은 캐시에게서 글 읽는 법을 배운다. 이것은 사소해 보이지만 결정적이다. 히스클리프가 해어턴을 무식하게 키운 것은 그를 통제하기 위한 도구였다. 캐시가 그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은 그 지배 구조를 해제하는 행위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1958)에서 탄생성(natality) 개념을 제시했다. 새로운 존재가 세계에 태어나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반복과 파괴의 사슬이 끊어질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인간이 도래하기 때문이다. 해어턴과 캐시의 화해는 이 아렌트적 의미에서의 새로운 시작이다.
10. 지금 여기서 — 사랑과 파괴, 그 현재형
『폭풍의 언덕』은 왜 지금도 읽히는가.
이 소설이 묻는 것들은 19세기 요크셔의 황야에 묶여 있지 않다. 사랑이 왜 파괴적 형태를 띠는가. 억압된 욕망은 어떻게 귀환하는가. 계급과 경제적 조건은 어떻게 사랑의 가능성을 결정하는가. 어린 시절의 상처는 어떻게 평생의 복수심을 만드는가.
현대 심리학은 히스클리프 안에서 애착 장애(attachment disorder)의 전형을 읽는다. 어린 시절 안정적 애착을 형성하지 못한 개인이 성인이 된 후 친밀한 관계에서 보이는 강박적이고 파괴적인 패턴. 사랑하는 대상을 소유하거나, 소유하지 못하면 파괴하려는 충동. 히스클리프는 이것의 극단적 문학적 형상화다.
동시에 소셜 미디어 시대의 스토킹, 집착적 사랑, 파트너 통제 폭력이 히스클리프의 행동 논리와 다르지 않다. 많은 가해자들은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먼저 상처받았고, 자신의 폭력은 그 상처에 대한 정당한 반응이라고. 히스클리프의 자기 서사가 바로 그것이다. 브론테는 이 서사의 매혹과 위험을 동시에 보여준다.
여기서 소설이 던지는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히스클리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해는 정당화인가.
이해와 정당화의 경계선—그것이 『폭풍의 언덕』이 지금도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불편하고 중요한 물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