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개츠비는 부자다. 맨해튼 맞은편 웨스트에그의 저택에서 매주 수백 명의 파티를 연다. 샴페인이 넘쳐흐르고, 오케스트라가 밤새 연주하며, 온갖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러나 개츠비는 그 파티에서 거의 혼자다. 그는 손님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저택 끝에 홀로 서서 강 건너 이스트에그 쪽을 바라본다. 그곳에 초록 불빛이 깜박인다.
그 불빛은 데이지 뷰캐넌의 부두 끝에 달린 것이다. 그리고 개츠비의 모든 것, 저택도 파티도 돈도, 그 불빛 하나를 향해 있다.
F.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 1896~1940)의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 1925)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욕망의 구조에 관한 이야기이고, 과거를 되살릴 수 있다는 환상에 관한 이야기이며, 아메리카라는 나라가 스스로에게 걸어온 가장 오래된 주문(呪文)에 관한 이야기다.
개츠비는 왜 위대한가. 그리고 그 위대함은 진짜인가.
2. 1920년대 미국 — 재즈 에이지의 황금 먼지
소설의 배경인 1920년대 미국은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호황기였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이 폐허를 수습하는 동안 미국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자동차가 거리를 채웠고, 라디오가 가정에 들어왔으며, 주가는 연일 상승했다. 금주법(禁酒法, Prohibition, 1920~1933)이 시행되었지만, 오히려 밀주와 불법 클럽이 성행하며 지하 쾌락 경제가 번창했다. 피츠제럴드 자신이 이 시대에 '재즈 에이지(Jazz Age)'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번영은 그러나 불균등했다. 모두가 부자가 된 것이 아니었다. 소수의 구귀족 계층인 이스트에그 사람들과, 벼락부자 신흥 계층인 웨스트에그 사람들과, 그 어디에도 낄 수 없는 '재의 계곡(Valley of Ashes)' 사람들이 공존했다. 개츠비는 웨스트에그에 산다. 그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스트에그로 건너갈 수 없다. 그 강은 돈으로 건너는 강이 아니었다.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1905)에서 자본주의의 정신적 뿌리를 분석했다. 금욕과 근면을 통해 세속적 성공을 이루는 것이 신의 선택받은 자임을 증명한다는 칼뱅주의적 믿음이 자본주의의 정신적 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츠제럴드의 소설 속 미국은 이미 그 청교도적 금욕의 껍데기만 남기고, 내용은 순수한 욕망으로 채워져 있다. 근면의 미덕은 사라지고, 성공의 전시만 남았다.
3. 개츠비의 욕망 — 대상 없는 욕망의 구조
개츠비는 데이지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가 진짜 사랑하는 것은 데이지인가, 아니면 데이지라는 기호가 상징하는 무언가인가.
개츠비와 데이지가 재회한 장면을 보면 흥미로운 일이 일어난다. 5년을 기다려 마침내 데이지와 다시 만난 개츠비는, 기묘하게도 실망한다. 닉 캐러웨이는 이것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의 꿈의 막대한 중요성이 그를 지나쳐 간 것이다. 그는 저 너머, 도시 저쪽의 어두운 물 뒤편 어딘가에서 그것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은 욕망의 구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욕망은 결코 그 대상을 향한 것이 아니다. 욕망은 욕망 자체를 욕망한다(『에크리』, Écrits, 1966). 우리가 무언가를 원할 때, 사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 무언가가 아니라 그것을 원하는 상태, 즉 '결여'의 충족이 주는 완전함의 환상이다. 그래서 욕망하는 대상을 손에 넣는 순간, 욕망은 새로운 대상으로 이동한다.
개츠비가 욕망한 것은 데이지가 아니었다. 그는 데이지로 표상되는 어떤 완전한 과거, 아직 아무것도 잃지 않았던 시절, 모든 것이 가능했던 순간을 욕망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존재했던 것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환상이었다.
4. 초록 불빛 — 기호와 환상의 철학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이미지는 개츠비가 강 건너를 바라보며 손을 뻗는 장면이다. 그의 손이 향하는 곳에 초록 불빛이 있다.
초록은 무엇의 색깔인가. 신호등의 초록은 '가도 좋다'는 허가다. 달러 지폐의 초록은 돈이다. 자연의 초록은 성장과 희망이다. 피츠제럴드의 초록 불빛은 이 모든 함의를 한꺼번에 담고 있다.
소설의 화자 닉 캐러웨이는 결말에서 이렇게 쓴다. "개츠비는 초록 불빛을, 해마다 우리 앞에서 멀어져가는 기묘한 미래를 믿었다. 그것은 그때 우리에게서 달아났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내일 우리는 더 빨리 달릴 것이고, 팔을 더 멀리 뻗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좋은 아침에—"
이 문장은 끝나지 않는다. 피츠제럴드는 의도적으로 문장을 미완으로 남겼다.
기호학의 창시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는 기호(sign)가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로 구성된다고 했다. 그런데 개츠비의 초록 불빛에서 기의는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불빛은 데이지를 가리키지만, 데이지는 그 자체로 과거를 가리키고, 과거는 아메리칸 드림을 가리키며, 아메리칸 드림은 다시 닿을 수 없는 무언가를 가리킨다. 기표는 고정된 기의를 갖지 못하고 영원히 다음 기표를 향해 미끄러진다. 이것이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가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De la grammatologie, 1967)에서 말한 '기표의 유희(play of signifiers)'다.
초록 불빛은 닿을 수 없기 때문에 초록 불빛이다. 닿는 순간 다른 불빛을 찾아야 한다.
5. 계급의 벽 —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개츠비는 엄청난 부를 쌓았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것을 살 수 없다. 데이지는 이미 톰 뷰캐넌과 결혼해 있고, 톰은 이스트에그의 정통 구귀족이다. 개츠비가 아무리 웅장한 파티를 열어도, 이스트에그 사람들에게 그는 '새로운 돈(new money)'에 불과하다. 출신을 알 수 없고 돈의 출처도 불분명한 서부 출신의 신흥 벼락부자.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는 『구별짓기』(La Distinction, 1979)에서 계급을 단순히 경제 자본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그는 문화 자본(cultural capital)과 사회 자본(social capital)의 개념을 도입한다. 문화 자본은 교육, 예술적 취향, 말투, 몸가짐, 세련된 소비 방식 등 계급이 문화적으로 각인된 형태다. 사회 자본은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느냐, 누구를 아느냐의 문제다.
개츠비는 경제 자본을 갖췄지만 문화 자본과 사회 자본이 없다. 그의 과장된 말투("old sport"), 과도하게 화려한 셔츠들, 어딘가 어색한 파티의 분위기—이것들이 그의 계급적 한계를 드러낸다. 이스트에그의 사람들은 한눈에 그것을 알아본다. 돈은 계급을 위장할 수 있지만, 대체할 수 없다.
톰 뷰캐넌이 개츠비를 경멸하는 방식은 이 계급 논리를 잘 보여준다. 그는 개츠비의 부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종류 자체를 다르게 본다. "그는 우리 중 하나가 아니야." 이 문장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6. 과거를 반복할 수 있는가 — 시간의 철학
소설의 핵심 대화 중 하나는 닉과 개츠비 사이에서 일어난다. 닉이 말한다. "과거는 반복할 수 없어." 개츠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묻는다. "반복할 수 없다고? 물론 할 수 있어!"
이 짧은 교환이 소설의 철학적 핵심이다.
앙리 베르그손(Henri Bergson, 1859~1941)은 『물질과 기억』(Matière et mémoire, 1896)에서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살아있다고 했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의 아래에서 계속 작동하며, 우리의 지각과 판단을 형성한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는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이미 현재 안에 있다.
그러나 개츠비가 원하는 것은 베르그손적 의미의 기억이 아니다. 그는 물리적 시간을 되감고 싶다. 5년 전의 그 순간, 데이지와 처음 키스하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고 싶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시간은 방향이 있고, 되돌릴 수 없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7)에서 인간 존재(Dasein)의 본질적 특성으로 시간성(Zeitlichkeit)을 제시했다. 우리는 시간 속에 던져진 존재다. 과거는 이미 결정되었고(기재성, Gewesenheit), 현재는 지금 이 순간이며(현재성, Gegenwart),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도래성, Zukunft).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과 시간성을 직면할 때, 비로소 진정한 실존이 가능하다. 개츠비는 이 유한성을 거부한다. 그는 과거로 향하는 문이 어딘가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 그를 위대하게도 만들고, 비극적으로도 만든다.
7. 데이지라는 인물 — 욕망의 대상, 계급의 목소리
데이지 뷰캐넌은 소설에서 다소 납작하게 그려진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녀는 아름답고 매혹적이지만, 깊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피츠제럴드의 실수가 아니다. 데이지의 납작함은 의도된 것이다.
닉은 데이지의 목소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문장은 소설 전체에서 가장 날카로운 사회비판이다. 목소리는 계급을 담는다. 데이지의 매혹은 그녀의 개인적 자질이 아니라 그녀가 체현하는 계급적 우아함, 즉 오래된 돈, 당연한 듯한 여유, 아무것도 애쓰지 않아도 되는 삶의 냄새에서 나온다.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는 『제2의 성』(Le Deuxième Sexe, 1949)에서 여성이 주체가 아닌 타자(the Other)로 구성되는 방식을 분석했다. 데이지는 이 분석의 완벽한 예다. 그녀는 개츠비의 욕망 안에서 주체가 아니라 투사(projection)의 스크린이다. 개츠비가 그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자신의 꿈을 투영하는 것이다. 데이지 자신은 이 욕망의 구조 안에서 자신만의 의지와 공포와 선택을 가진 존재지만, 개츠비의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데이지가 자동차 사고 후 개츠비를 버리고 톰과 함께 짐을 싸서 떠나는 장면은 이 관점에서 다르게 읽힌다. 그녀는 단순히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속한 계급의 논리를 따른 것이다. 이스트에그는 위기의 순간에 뭉친다. 개츠비는 그 울타리 안에 없었다.
8. 닉 캐러웨이 — 목격자의 윤리
소설의 화자 닉은 개츠비 이야기의 관찰자이지만, 완전히 중립적인 관찰자는 아니다. 그는 개츠비를 사랑한다. 도덕적으로 경멸할 수 있는 것들을 보면서도, 개츠비의 순수한 믿음의 힘에 매료된다.
닉의 유명한 첫 문장이 있다. 아버지가 해준 말, "모든 사람이 너와 같은 혜택을 누린 것은 아니야"를 인용하며 그는 평생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려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설의 끝에서 그는 판단을 내린다. 개츠비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는 등을 돌린다.
이 윤리적 선택은 단순하지 않다. 개츠비는 범죄자다. 밀주로 부를 쌓았고, 거짓 신분을 만들었다. 그러나 닉이 보기에, 그는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진짜 무언가를 믿은 사람이다. 톰은 아무것도 믿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고, 데이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다. 오직 개츠비만이, 비록 환상이라도, 그것을 향해 전부를 걸었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1942)에서 부조리한 세계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태도를 논했다. 신들은 시지프에게 영원히 바위를 굴려 정상에 올리는 형벌을 내렸다. 바위는 정상에 오르는 순간 다시 굴러 떨어진다. 그럼에도 카뮈는 말한다.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무의미함을 직면하고도 굴리기를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부조리에 대한 반항이다. 개츠비는 미국판 시지프다. 닿을 수 없는 초록 불빛을 향해 손을 뻗고, 뻗고, 또 뻗는다. 그리고 그 손짓의 숭고함을 닉은 외면하지 않는다.
9. 재의 계곡 — 보이지 않는 사람들
소설에서 자주 언급되지 않는 공간이 있다. 이스트에그도 웨스트에그도 아닌 곳, 두 에그 사이 어딘가, 산업 폐기물로 뒤덮인 '재의 계곡(Valley of Ashes)'이다. 거기 사는 사람들은 눈이 풍화된 간판 광고 속 안과의사 T. J. 에클버그 박사의 눈이 내려다보는 아래에서, 남의 파티를 위한 재를 치우며 살아간다.
머틀 윌슨은 그 계곡 사람이다. 그녀는 위로 올라가고 싶었다. 톰 뷰캐넌의 정부가 되어, 뉴욕에서 잠시나마 다른 계층의 삶을 흉내 냈다. 그러나 그녀는 데이지의 차에 치여 죽는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톰은 그녀의 남편 조지 윌슨을 개츠비에게 향하게 만들어 문제를 처리한다. 계곡의 사람들은 위 계층의 욕망과 분노가 충돌할 때 희생되는 존재다.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Ü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 1940)에서 역사란 항상 승자의 관점에서 쓰인다고 했다. 역사의 행진 속에서 짓밟힌 사람들, 잊힌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 진정한 역사 쓰기다. 피츠제럴드의 소설 안에서 재의 계곡 사람들은 정확히 이 망각된 존재들이다. 개츠비의 비극이 조명받는 동안, 머틀의 죽음은 배경으로 물러난다. 누가 진짜 비극인가.
10. 지금 여기서 — 우리 시대의 초록 불빛
소설이 출판된 지 100년이 지났다. 그러나 초록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형태만 바뀌었다.
오늘날 초록 불빛은 소셜미디어의 피드에서 깜박인다. 타인의 삶, 타인의 성공, 타인의 행복을 스크롤하며 우리는 개츠비처럼 강 건너를 바라본다. 인스타그램의 라이프스타일 계정들, 유튜브의 성공 스토리들, 링크드인의 커리어 자랑들—이 모든 것이 현대의 이스트에그다. 보이지만 닿지 않고, 욕망하게 만들지만 충족되지 않는다.
아메리칸 드림은 이민자들에게 약속했다.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그러나 피츠제럴드는 1925년에 이미 그 약속의 거짓을 폭로했다. 성공은 노력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디서 태어났는가, 어떤 집안인가, 어느 에그에 사는가가 먼저였다.
한국 사회도 다르지 않다. '수저론'은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금수저, 흙수저—이스트에그와 재의 계곡의 한국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초록 불빛을 끄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끄지 말아야 할지도 모른다. 카뮈의 말처럼,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을 뻗는 그 몸짓 안에서, 인간은 가장 인간답다.
닉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그리하여 우리는 계속 노를 젓는다, 물살을 거슬러,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