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별다른 이유 없이 체포된다. 죄목도 모르고, 재판 날짜도 모르고, 자신을 기소한 법원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일상은 계속된다. 회사에 출근하고, 은행 업무를 보고, 여자를 만나고, 밥을 먹는다. 다만 어딘가에 '소송'이 걸려 있다는 사실이 삶의 배경처럼 붙어 다닌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소송》(*Der Process*, 1925)은 이런 불가해한 상황에서 시작된다. 주인공 요제프 K는 30세 생일 아침에 갑자기 체포 통보를 받는다. 그는 무엇을 했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게 전부다. 이 소설은 유죄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법정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는다. 결말은—K가 "개처럼" 처형당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 처형 역시 아무런 설명 없이.
카프카는 오랫동안 '부조리 문학'의 대명사로 불려 왔다. 그러나 1975년,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는 《카프카: 소수문학을 위하여》(*Kafka: Pour une littérature mineure*)를 통해 전혀 다른 독법을 제안한다. 카프카는 그저 '불안한 실존'을 그린 작가가 아니라, 지배 언어 안에서 그 언어를 파열시키는 정치적 기계를 작동시킨 작가라는 것이다. 이 글은 그 독법을 《소송》에 적용해 본다.
2. 소수문학이란 무엇인가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소수문학'(*littérature mineure*)은 소수자가 쓴 문학이 아니다. 정확히는, 다수 언어 안에서 소수자가 그 언어를 탈영토화하는 방식으로 쓰는 문학이다.
카프카는 프라하 출신의 유대인이었고, 그의 모국어는 체코어도 히브리어도 아닌 독일어였다. 그런데 그 독일어는 프라하 유대인 공동체가 사용하는 독일어였다—표준 독일어와 다르고, 체코어의 리듬에 물든, 어딘가 어색한 독일어.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것이 단순한 언어적 결함이 아니라 하나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언어의 변두리에 서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언어의 내부 구조를 비틀 수 있는 위치에 놓인다는 것이다.
소수문학의 세 가지 특성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들뢰즈·가타리, 《카프카》, 1975):
첫째, 언어의 탈영토화(déterritorialisation). 소수 작가는 다수 언어를 사용하되, 그것을 매끄럽게 사용하지 않는다. 문법을 어기거나, 문장을 기묘하게 비틀거나, 상식적 의미를 굴절시킨다. 카프카의 문장이 대표적이다. 그의 독일어는 논리적으로 완벽하지만, 그 논리가 지시하는 세계는 독자의 상식과 끝없이 마찰을 일으킨다.
둘째, 모든 것의 정치화. 다수 문학에서 개인의 이야기는 가족, 연인, 자아 같은 '사적 영역'에 머물 수 있다. 그러나 소수 문학에서 개인의 문제는 곧바로 집단의 문제, 정치의 문제로 연결된다. 카프카의 K는 '한 개인의 불안'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관료제·법·권력이라는 구조 전체와 싸우는 존재다.
셋째, 집단적 언표(énonciation collective). 소수 작가는 자신의 목소리만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가 쓸 때, 그와 유사한 처지에 있는 공동체 전체가 그 글을 통해 발언하는 것처럼 기능한다. 카프카의 소설이 특정 유대인 공동체의 경험이나, 더 나아가 현대적 관료제 아래 살아가는 인간 일반의 경험으로 읽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3. 탈영토화된 언어: 《소송》의 문장들
《소송》을 펼치면 이상한 점이 곧 눈에 띈다. 문장은 매우 명료하고 정밀하다. 수식어를 남발하지 않고, 과잉된 감정도 없다. 그런데 그 명료함이 묘사하는 상황은 전혀 명료하지 않다.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누군가가 요제프 K를 중상모략한 것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어느 날 아침 그가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Jemand musste Josef K. verleumdet haben, denn ohne dass er etwas Böses getan hätte, wurde er eines Morgens verhaftet.*)
이 문장의 구조를 보라. '중상모략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먼저 제시하고, '왜냐하면'이라는 인과 접속사로 그 근거를 댄다. 그런데 그 근거는 '체포되었다'는 사실뿐이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체포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중상모략이 있었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카프카의 문장은 마치 이것이 당연한 삼단논법인 양 서술한다.
이것이 카프카적 언어 탈영토화의 핵심이다. 문장의 논리적 형식은 완벽하게 유지되지만, 그 내용은 논리를 배신한다. 독자는 언어에 익숙한 방식으로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전혀 낯선 땅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것을 '언어가 사막처럼 건조해지는 과정'이라고 불렀다. 감정도, 수사도, 은유도 탈각된다. 남는 것은 순수한 기능과 운동뿐이다.
비교하자면, 같은 시대 도스토옙스키가 쓴 문장들은 정반대다. 인물들은 독백을 쏟아내고, 감정을 과잉으로 표현하고, 독자를 설득하려 한다. 카프카의 인물들은 거의 설명하지 않는다. 요제프 K는 자신의 두려움을 상세히 묘사하지 않는다. 그는 그냥 행동할 뿐이고, 독자는 그 행동의 서늘함에서 두려움을 읽어낸다. 이것이 소수 언어가 감정을 처리하는 방식이다—직접 표현하는 대신, 감정을 구조 안에 숨긴다.
4. 모든 것의 정치화: 법과 관료제라는 기계
《소송》에서 개인의 이야기가 어떻게 즉각 정치적 이야기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장치는 바로 '법원'의 존재 방식이다.
K가 찾아가는 법원은 도시의 어느 허름한 건물 꼭대기 층에 있다. 법정은 세탁물과 피의자들로 가득 찬 다락방이고, 판사는 탁자 위에 올라서서 재판을 진행한다. 법의 공간이 위압적인 신전이 아니라, 생활 공간 한가운데 허름하게 끼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들뢰즈와 가타리의 독법에 따르면, 카프카의 법원은 초월적 권력이 아니라 내재적 관료제다. 그것은 어딘가 높은 곳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안에 이미 스며들어 있다. 결혼 계획, 직장 생활, 이웃 관계—모든 것이 법원과 연루되어 있다. K의 집주인 그루바흐 부인도, K를 돕는다고 나타나는 변호사 훌트도, 법원 화가 티토렐리도 모두 이 거대한 기계의 부품들이다. 그 기계는 중심이 없다. 누가 꼭대기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 구조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감시와 처벌》(1975)에서 분석한 판옵티콘(panopticon) 개념과 공명한다. 중앙에 감시탑이 있고 수감자들이 사방에 배치된 감옥에서, 수감자들은 자신이 언제 감시받는지 모른다. 그래서 항상 감시받는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 카프카의 K도 마찬가지다. 그는 법원이 어디 있는지, 누가 자신을 판결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항상 '소송 중'인 상태로 살아간다. 관료제의 힘은 중심에 있지 않고, 불투명함 자체에 있다.
더 나아가 카프카의 법원은 현대 관료제의 일반적 논리를 폭로한다. 오늘날 우리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민원을 넣으면 "담당부서가 아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오고, 담당부서로 가면 "서류가 부족하다"는 말을 듣는다. 서류를 갖추면 "처리 기간이 있다"는 대답이 온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아무도 결정권자가 아니다. K가 경험하는 것은 20세기 초 프라하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근대 관료제가 개인에게 가하는 보편적 폭력이다.
이것이 소수문학의 두 번째 특성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K의 이야기는 처음에는 한 남자의 억울한 사연처럼 읽힌다. 그러나 소설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깨닫는다—이것은 K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법 앞에 선 모든 개인의 이야기이고, 기계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이야기다.
5. 집단적 언표: 카프카는 누구를 대신해 말하는가
카프카는 유언장에서 자신의 모든 원고를 불태워달라고 친구 막스 브로트(Max Brod)에게 부탁했다. 브로트는 이를 무시하고 출판했다. 그 결과 《소송》, 《성》, 《변신》이 세상에 남게 되었다. 이 에피소드 자체가 카프카 문학의 성격을 암시한다. 그는 자신의 글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나, 적어도 공표될 가치가 있다고 믿지 않았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것을 소수 작가의 조건과 연결시킨다. 소수 작가에게는 확립된 문학 전통이 없다. 자신의 글을 위치시킬 수 있는 탄탄한 선례가 없다. 그래서 그는 혼자 쓰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공동체 전체를 대신해서 쓰게 된다. 카프카가 일기에 썼던 말—"나는 내 민족으로부터 무엇을 공유하고 있는가? 나는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겨우 서 있고, 독일인들 사이에서는 더욱 낯선 존재다"—은 이 이중적 소속 불가능성을 정확히 표현한다.
《소송》에서 집단적 언표가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성당에서 신부가 K에게 '법 앞에서'(*Vor dem Gesetz*) 우화를 들려주는 대목이다. 우화의 내용은 이렇다. 한 시골 남자가 법의 문 앞에 선다. 문지기가 있어서, 지금은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남자는 기다린다. 평생을. 죽기 직전 그는 묻는다. 왜 다른 사람들은 이 문으로 들어오지 않았냐고. 문지기는 답한다. "이 문은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이제 닫겠다."
이 우화는 단지 K 한 사람의 처지를 비유하지 않는다. 법과 권력 앞에 서서 영원히 입장을 기다리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다. 이민자, 소수자, 관료제 앞에 선 평범한 시민, 제도의 언어를 갖지 못한 이들—그 모두가 이 우화에 겹쳐진다. 카프카가 유대인 공동체를 대신해 발언하는 동시에, 근대적 통치성에 포획된 모든 개인을 대신해 발언하는 순간이다.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호모 사케르》(1995)에서 카프카의 이 우화를 '예외 상태'(stato di eccezione)의 알레고리로 읽는다. 법의 효력이 미치지 않는 공간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법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존재—이것이 호모 사케르이며, K의 처지다. K는 체포되었지만 투옥되지 않고, 기소되었지만 재판을 받지 못한다. 법적 존재이면서 법 바깥에 있는 역설적 위치. 이것은 20세기의 난민, 무국적자, 비정규직 노동자의 구조적 위치와 정확히 겹친다.
6. 도주선과 탈출의 불가능성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론에는 '도주선'(*ligne de fuite*)이라는 개념이 있다. 닫힌 구조를 뚫고 나가는 탈출의 벡터. 소수문학은 항상 이 도주선을 찾는다. 그런데 카프카에서 도주선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소송》에서 K는 여러 번 탈출을 시도한다. 법원을 무시하고 일상을 유지하려 한다. 변호사를 고용한다. 화가에게 부탁한다. 성직자와 대화한다. 그러나 모든 시도가 오히려 그를 더 깊이 법의 그물 속으로 끌어들인다. 탈출하려 할수록 더 깊이 연루된다. 이것은 카프카식 역설이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것을 단순한 패배주의로 읽지 않는다. 그들에 따르면, 카프카 문학에서 도주선은 탈출에 성공하는 방식이 아니라, 탈출의 욕망 자체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K는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한다—무기력하게, 비효율적으로, 그러나 멈추지 않고. 그 저항은 외부의 적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면화한 법적 죄의식을 향한 것이다. K는 자신이 유죄라는 사실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다. "개처럼" 처형되면서도, 그 죽음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것이 소수문학이 다수 권력에 저항하는 방식이다. 정면 돌파가 아니라, 끊임없는 비틀기와 미끄러지기. 언어를 그 언어의 내부에서 뒤흔드는 것. K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동의하지 않음의 최종 형태다.
7. 카프카는 왜 지금 읽혀야 하는가
1883년 프라하에서 태어나 1924년 결핵으로 사망한 카프카는 자신의 소설이 출판되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21세기에 더 선명하게 읽힌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법률과 규정 안에서 살아간다. 개인정보 동의서를 클릭하지만 그 내용을 읽지 않고, 약관에 서명하지만 무엇에 동의하는지 모른다. 알고리즘이 우리의 신용을 평가하고, 플랫폼이 우리의 발언 가능성을 결정한다. 누가 결정권자인지, 어떻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지—많은 경우 우리는 알지 못한다. K가 찾아 헤맸던 법원의 위치를, 우리도 알지 못한다.
소수문학으로서의 카프카는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저항의 영웅적 서사가 아니다. 거대한 기계 안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부정하지 않는 것,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그 부조리함을 최대한 정밀하게 언어로 기록하는 것. 카프카의 문장이 그토록 차갑고 정확한 것은, 그 정밀함 자체가 하나의 저항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를 '미래의 혁명적 기계'라고 불렀다. 혁명은 바리케이드 위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때로는 허름한 다락방 법원을 묘사하는 한 문장, 그 서늘한 정확성 속에서도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