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광주 전남도청으로 진입한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사람들이 총에 맞아 쓰러진다. 그중에 열다섯 살 소년 동호가 있다.
한강(韓江, 1970~)의 『소년이 온다』(2014)는 이 하룻밤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소설이 다루는 시간은 그 하루가 아니다. 그 하루가 이후의 수십 년 동안 산 자들의 내부에서 어떻게 계속 살아남았는지, 혹은 어떻게 사람을 죽여왔는지를 다룬다.
소설의 형식 자체가 이미 철학적이다. 1인칭, 2인칭, 3인칭이 뒤섞인다. 죽은 자가 직접 말한다. 산 자가 죽은 자에게 말을 건넨다. 시제가 흔들린다. 과거가 현재형으로 쓰인다. 이것은 문학적 실험이기 이전에 하나의 존재론적 주장이다. 과거는 지나가지 않았다. 죽은 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사건은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
이 물음에서 시작한다. 국가는 왜 소년을 죽였는가. 그리고 그 죽음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2. 국가 폭력의 논리 — 홉스에서 아감벤까지
국가가 자국민을 학살한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단순히 나쁜 정권이 나쁜 짓을 했다는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국가는 어떤 조건에서 특정 인간을 '죽여도 되는 존재'로 분류하는가.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리바이어던』(Leviathan, 1651)에서 국가 권력의 기원을 설명한다.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bellum omnium contra omnes) 속에 살기 때문에, 자신의 권리 일부를 국가에 위임하고 보호를 받는다. 국가 권력은 이 사회계약에서 나온다. 그런데 홉스의 논리에는 역설이 숨어있다. 국가는 보호하기 위해 폭력을 독점한다. 그 독점된 폭력이 보호의 대상을 향할 때, 그것을 막을 원리가 계약 안에 없다.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1942~)은 『호모 사케르』(Homo Sacer, 1995)에서 이 역설을 날카롭게 분석한다. 아감벤은 고대 로마법의 개념 '호모 사케르(homo sacer)'를 끌어온다. 호모 사케르란 신에게 바칠 수도 없고, 죽여도 살인죄가 성립하지 않는 인간이다. 아감벤은 이것이 단순한 고대 법률 개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근대 국가는 언제나 일부 인간을 이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의 상태로 밀어넣는 권력을 보유한다. 법의 보호 밖에 놓인 자, 죽어도 죽음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자.
1980년 5월 광주의 시민들이 정확히 이 상태에 놓였다. 계엄 포고령이 선포되면서 그들은 법의 보호 바깥으로 밀려났다. '폭도'라는 호명이 그들에게 붙었다. 폭도는 국가가 진압해야 할 대상이다. 그들의 죽음은 사건이 아니라 작전의 결과다. 동호는 열다섯 살이었지만, 그 순간 그는 '폭도'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3. 죽은 자의 목소리 — 2인칭 서술의 윤리학
소설의 2장은 죽은 동호의 친구 정대가 1인칭으로 말한다. 그는 이미 총에 맞아 죽었다. 영혼이 몸을 떠나지 못하고 시신 옆을 맴돈다. 관을 기다리며 상무관 바닥에 쌓인 시체들 사이를 돌아다닌다. 살아있는 것처럼 친구를 찾고, 자신이 왜 죽었는지 이해하려 한다.
이 형식적 선택은 단순한 기법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윤리적 입장이다.
엠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전체성과 무한』(Totalité et Infini, 1961)에서 타자의 얼굴(le visage de l'autre)이 나에게 요구하는 윤리적 의무를 이야기한다. 타자의 얼굴은 명령한다. "나를 죽이지 말라." 이 요청은 논리적 추론이나 계약에 앞선다. 그것은 가장 근본적인 윤리적 호소다. 그런데 레비나스의 철학에서 죽은 자는 어떤 위치를 갖는가. 죽은 자의 얼굴은 이미 사라졌다. 더 이상 나를 향해 "나를 죽이지 말라"고 말할 수 없다.
한강은 소설을 통해 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한다. 죽은 자에게 목소리를 돌려준다. 정대는 말한다. 동호는 2인칭 '너'로 호명된다—그 '너'는 독자이기도 하다. 이 서술 전략은 죽은 자의 얼굴을 다시 독자 앞에 세우는 행위다. 당신은 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이 죽음은 당신과 관계가 있다. 외면할 수 없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우정의 정치학』(Politiques de l'amitié, 1994)에서 죽은 자에 대한 산 자의 의무를 '애도의 작업(the work of mourning)'으로 개념화한다. 죽은 자를 내 안에 살아있게 하는 것, 그들의 목소리를 보존하는 것, 그것이 산 자의 윤리적 책무다. 『소년이 온다』는 문학이 어떻게 이 애도의 작업을 수행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강렬한 사례 중 하나다.
4. 트라우마의 언어 —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소설의 3장과 6장은 생존자들의 이야기다. 은숙은 도청을 빠져나온 뒤 수십 년을 살았다. 그러나 그 수십 년은 살아있음이 아니었다. 악몽, 불면, 자책, 분노, 침묵. 그녀는 자신이 살아남은 것이 잘못이라고 느낀다.
이것은 심리학에서 생존자 죄책감(survivor's guilt)이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그러나 단순히 심리 용어로 분류하고 끝내는 것은 이 경험의 깊이를 축소한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와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 1930~1992)는 『천 개의 고원』(Mille Plateaux, 1980)에서 강렬한 외상 경험이 어떻게 주체를 분열시키는지 분석한다. 트라우마는 경험을 언어화 가능한 서사로 만드는 능력을 파괴한다. 경험은 파편으로 남는다.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 순간이 계속해서 현재 속으로 침입한다.
정신분석학에서 이것을 가장 체계적으로 다룬 것은 캐시 카루스(Cathy Caruth, 1955~)의 트라우마 이론이다. 카루스는 『트라우마: 경험의 탐색』(Trauma: Explorations in Memory, 1995)에서 트라우마가 언어화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사건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경험 당시에 온전히 인식되지 못한다. 그것은 나중에, 간접적으로, 반복과 증상의 형태로 출몰한다. 트라우마는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알아버린 것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한강의 소설이 파편적 서술과 뒤섞인 시제를 사용하는 것은 이 트라우마의 언어 구조를 그대로 모방한다. 독자가 읽으며 느끼는 불안과 혼란은 작가의 기술적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인간의 내면 구조를 독자가 직접 경험하도록 하는 전략이다.
5. 몸의 정치학 — 고통은 어떻게 공유되는가
소설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들은 신체적 폭력에 관한 것들이다. 고문, 구타, 총격. 한강은 이것을 외면하지 않는다. 직접적이고 상세하게 서술한다. 읽는 행위가 불편할 만큼.
이 선택은 의미가 있다. 엘레인 스캐리(Elaine Scarry, 1946~)는 『고통받는 몸』(The Body in Pain, 1985)에서 신체적 고통이 언어를 파괴한다고 주장한다. 고통은 표현될 수 없다. "아프다"는 말은 고통의 내용을 전달하지 못한다.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상상할 수 없고, 고통을 겪는 사람은 그것을 언어화할 수 없다. 이것이 고문이 권력의 도구가 되는 이유다. 고통은 그 안에 갇힌 자를 언어로부터 박탈한다. 목소리를 빼앗는다.
한강은 이 불가능한 전달을 시도한다. 언어로 고통을 서술하되, 그 서술이 독자의 몸에 반응을 일으키도록. 독자의 위장이 뒤틀리고, 눈을 내리깔고 싶어지는 그 반응 자체가 전달이다. 완전한 전달은 불가능하지만, 불완전한 전달이 아무것도 전달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실천이성비판』(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1788)에서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의무론적 윤리의 근본 원칙을 제시했다. 고문은 이 원칙의 가장 노골적인 위반이다. 인간의 몸을 정보 추출의 수단으로, 공포 확산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 소설이 고통을 서술하는 것은 이 위반이 얼마나 근원적인지를 독자가 실감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6. 침묵의 공모 — 역사는 어떻게 은폐되는가
사건이 끝난 뒤, 더 긴 억압이 시작된다. 광주는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 되었다. 생존자들은 입을 닫았다. 또는 입을 닫도록 강요받았다. 그것을 말하면 '빨갱이'가 되었다. 가족의 생계가 위협받았다. 다시 잡혀갔다.
이것은 1차 폭력과는 다른 종류의 폭력이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는 『전쟁의 틀』(Frames of War, 2009)에서 애도 가능성(grievability)의 불평등을 분석한다. 모든 죽음이 동등하게 애도받지 않는다. 누구의 죽음이 애도받을 가치 있는 죽음으로 인식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권력이다. 애도받지 못하는 죽음, 기억되지 못하는 죽음—그것은 죽음이 두 번 일어나는 것이다. 한 번은 몸이 죽을 때, 한 번은 기억에서 지워질 때.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Ü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 1940)에서 역사는 승자의 관점에서 쓰인다고 주장한다. 패자의 기억, 억압된 자의 목소리는 지워진다. 역사가의 임무는 이 지워진 것들을 현재 안에서 소환하는 것이다. 잿더미 속에서 파편을 줍는 것.
한강의 소설이 1980년 5월을 다시 쓰는 것은 이 베냐민적 역사 기획에 정확히 응답한다. 공식 역사에서 '진압된 폭동'이었던 것을 '학살'로 다시 명명한다. 이름을 되찾는 것이 기억을 되찾는 것이고, 기억을 되찾는 것이 두 번째 죽음에 저항하는 것이다.
7. 가해자의 내면 — 악의 평범성
소설의 7장, 작가의 후기적 성격을 띠는 부분에서 한강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떻게 이것을 썼는가. 쓸 수 있었는가. 쓰는 것이 옳은가.
이 물음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개념과 연결된다.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1963)에서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분석하면서, 거대한 악이 괴물 같은 존재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평범한 관료에 의해 수행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이히만은 명령에 따랐다. 규칙을 지켰다. 그것이 전부였다.
1980년 광주에서 방아쇠를 당긴 군인들은 대부분 갓 스무 살이 넘은 청년들이었다. 그들도 명령에 따랐다. '폭도'를 진압하라는 명령. 그들 개개인이 특별히 잔인한 사람들이었을까. 아렌트의 분석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의 정지가 폭력의 조건이 된다.
소설은 가해자를 단순히 악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더 불편한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그 상황에서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명령 앞에서, 집단 속에서, 생각 없이 움직이는 몸들 사이에서.
8. 애도의 불가능성과 필요성 — 슬픔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애도와 멜랑콜리아」(Trauer und Melancholie, 1917)에서 정상적 애도와 병리적 멜랑콜리아를 구분했다. 정상적 애도는 상실한 대상에 투여된 리비도를 점차 거두어들여 새로운 대상에 투여하는 과정이다. 애도가 완성되면 다시 살아갈 수 있다. 멜랑콜리아는 이 과정이 실패한 상태다. 상실이 수용되지 않는다. 자아가 상실한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스스로를 공격한다.
광주 생존자들의 고통은 프로이트가 말한 정상적 애도의 경로를 밟지 못했다. 애도 자체가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을 공개적으로 슬퍼할 수 없었다. 그들은 '폭도'였고, 그들을 애도하는 것은 위험한 행위였다. 금지된 애도, 억압된 슬픔은 몸 안으로 들어갔다. 병이 되고, 악몽이 되고, 자해가 되고, 침묵이 되었다.
자크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Spectres de Marx, 1993)에서 유령(specter)의 개념을 철학적으로 전개한다. 유령은 제대로 애도받지 못한 죽은 자다. 그들은 현재를 떠나지 못하고 출몰한다. 산 자의 현재 안에서 계속 말을 걸어온다. 유령을 쫓아내는 방법은 하나다. 그들에게 응답하는 것. 그들의 죽음을 온전히 인정하고, 슬퍼하고, 기억하는 것.
한강의 소설은 이 불가능했던 애도를 문학의 공간에서 수행하려는 시도다. 쓰는 행위 자체가 애도이고, 읽는 행위가 그 애도에 동참하는 것이다.
9. 기억과 망각 —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소설이 출판된 2014년, 광주항쟁은 이미 34년 전의 일이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광주는 공식적으로 '5·18 민주화운동'이 되었고, 기념관이 세워지고, 추모제가 열리고, 교과서에 실렸다. 그렇다면 왜 소설을 쓰는가. 이미 기억되고 있지 않은가.
폴 리쾨르(Paul Ricoeur, 1913~2005)는 『기억, 역사, 망각』(La Mémoire, l'Histoire, l'Oubli, 2000)에서 기억의 의무(the duty of memory)를 이야기한다. 기억의 의무란 단순히 과거를 잊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를 정의롭게 기억하는 것이다. 공식화되고 제도화된 기억은 실제 경험을 단순화하고 추상화한다. 기념관에 새겨진 이름들은 그 이름들이 살았던 삶의 두께를 담지 못한다.
동호는 이름이 있다. 그 이름 뒤에 특정한 얼굴이 있고, 죽기 전 마지막으로 먹은 밥이 있고, 보고 싶은 친구가 있고, 두려움이 있고, 어머니가 있다. 한강이 소설을 통해 하려는 것은 바로 이 두께를 복원하는 것이다. 숫자와 이름이 된 죽음을 다시 인간으로 돌려놓는 것.
미국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1947~)은 『시적 정의』(Poetic Justice, 1995)에서 문학이 도덕 철학의 불가결한 보완물이라고 주장한다. 논리적 추론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타자의 내면으로, 문학은 우리를 데려간다. 동호의 어머니가 아들을 찾아다니는 그 하룻밤을 읽으며 독자가 느끼는 것은 추상적인 '인권 침해에 대한 인식'이 아니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이다. 그 무너짐이 윤리적 변화의 출발점이 된다.
10. 지금 여기서 — 소년은 계속 온다
『소년이 온다』가 한국어로 출판된 2014년과 영어로 번역 출판된 2016년 사이, 세계는 변했다. 한강은 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이 소설이 국경을 넘어 읽히는 힘을 증명했다. 번역본 제목 'Human Acts'는 원제와 다르다. 그러나 그 선택도 의미심장하다. 소년의 죽음은 인간의 행위가 빚어낸 결과다. 그것을 인간의 행위로 되돌려야 한다.
그런데 2025년의 세계는 여전히 소년을 죽인다. 팔레스타인에서, 미얀마에서, 수단에서. 국가가 자국민을 향해 총을 겨눈다. '폭도'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그 죽음이 제대로 기억되는지조차 불확실하다. 스마트폰 카메라가 기록하지만, 알고리즘이 유통을 차단한다. 이미지는 범람하지만, 애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감벤이 말한 '호모 사케르'는 사라지지 않았다. 법의 바깥으로 밀려나는 사람들은 계속 만들어진다. 버틀러가 말한 '애도 가능성의 불평등'은 전쟁의 프레임이 달라질 때마다 다시 작동한다. 어느 죽음은 헤드라인이 되고, 어느 죽음은 통계가 된다.
『소년이 온다』를 읽는다는 것은 이 불균형 앞에 서는 것이다. 동호의 얼굴 앞에 서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말했듯, 타자의 얼굴은 명령한다. "나를 잊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