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는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잎이 없거나, 거의 없거나. 두 남자가 서 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그들은 기다린다. 고도를. 고도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언제 올지도 모른다. 오긴 올 것인지도 불확실하다.
막이 바뀐다. 2막. 무대는 거의 같다. 나무에 잎이 몇 개 돋았다. 두 남자는 여전히 거기 있다. 여전히 기다린다. 여전히 고도는 오지 않는다.
비평가 비비언 머천트(Vivien Merchant)는 이 희곡을 두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두 번(Nothing happens, twice)"이라고 표현했다. 이보다 정확한 요약은 없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긴다. 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연극이 20세기 연극사에서 가장 많이 상연되고 가장 많이 논의된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가 쓴 이 희곡은 1953년 파리 초연 이후 세계를 뒤흔들었다.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연극이 이토록 강렬한가. 그 안에 무엇이 있기에.
그 안에는 철학이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철학이 감당하지 못한 것들이 있다.
2. 부조리의 구조 — 세계는 우리에게 대답하지 않는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왜 고도를 기다리는가. 그 이유를 그들 자신도 모른다. 고도가 오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그것도 모른다. 고도가 온다는 보장이 있는가. 없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1942)에서 부조리(absurde)를 이렇게 정의했다. 부조리는 인간이 세계에 의미를 요청할 때, 세계가 그 요청에 침묵으로 답할 때 발생한다. 인간은 명확성과 의미를 원한다. 세계는 그것을 주지 않는다. 이 충돌, 이 간격이 바로 부조리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상황이 정확히 이것이다. 그들은 의미를 원한다. 고도가 올 것이라는 믿음이 그들에게 하루하루를 버틸 이유를 준다. 그러나 고도는 오지 않는다. 세계는 그들의 기다림에 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부조리의 핵심 구조다.
카뮈는 시지프를 예로 들었다.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지만, 정상에 닿는 순간 바위는 굴러 내려간다. 영원히 반복되는 무의미한 노동. 그런데 카뮈는 말한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반복 자체를 의식적으로 껴안는 것, 그것이 부조리에 대한 인간적 응답이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역시 매일 다시 나타나 기다린다. 그것이 그들의 시지프적 반복이다.
그러나 베케트는 카뮈보다 한 발 더 나아간다. 카뮈에게는 그래도 저항하는 인간의 존엄이 남아 있었다. 베케트의 인물들에게는 그 존엄마저 흔들린다.
3. 기다림의 존재론 — 시간은 흘러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기다림은 독특한 시간 경험이다. 병원 대기실에서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려본 적이 있는가. 군 입대 통지를 받고 입대일을 기다려본 적이 있는가. 기다리는 동안 시간은 기묘하게 느려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일이 된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7)에서 인간 존재를 시간성(Zeitlichkeit)으로 분석했다. 인간은 과거로부터 던져져(Geworfenheit, 피투성) 미래를 향해 기투(Entwurf)하는 존재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조건 속에 이미 던져져 있고, 그 안에서 가능성을 향해 나아간다. 시간은 이 실존 구조의 근간이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시간은 이 하이데거적 구조를 뒤튼다. 그들은 과거도 흐릿하다. "어제 우리 여기 있었지?" 라고 한쪽이 묻는다. 다른 쪽은 확신하지 못한다. 미래는 고도가 오느냐 안 오느냐는 불확실성 속에 떠 있다. 현재는 기다림으로 가득하지만 그 기다림은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라는 개념도 이 희곡 속에서 비틀린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앞둔 유한한 존재이고, 그 유한성을 직시할 때 비로소 진정한 삶이 가능하다고 하이데거는 보았다. 그런데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자살을 논한다. 떠나는 것을 논한다. 그러면서도 결국 떠나지 않는다. "가자." "그래." — 그러나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것이 희곡의 마지막 지문이다. 죽음조차 행동으로 실현되지 않는 존재. 끝을 향해서도 기투하지 못하는 인간.
이것은 하이데거가 묘사한 진정한 실존이 얼마나 요원한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4. 언어의 배반 — 말은 아무것도 전달하지 않는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대사는 희한하다. 두 인물은 쉬지 않고 말한다. 그런데 그 말들이 무언가를 진전시키지 않는다. 같은 말이 반복된다. 질문이 되돌아온다. 대화는 제자리를 맴돈다.
베케트 자신이 고백했다. 그는 언어가 의사소통의 완벽한 도구라는 환상을 믿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언어는 의사소통의 실패를 은폐하는 관습적 장치에 가깝다고 보았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은 후기 철학의 핵심 저작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1953)에서 언어의 의미는 고정된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형식(Lebensform)'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용(Gebrauch)에 있다고 주장했다. 의미는 맥락과 용법에 달려 있다. 그런데 베케트의 인물들은 공유된 맥락을 잃어가고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삶의 형식이 붕괴 직전이거나 이미 붕괴했다.
"우리 뭐 하지?" "고도 기다리는 거지." "아, 맞아." 이 대화의 순환은 언어가 현실을 파악하는 도구가 아니라 현실의 공허함을 잠시 메우는 소음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목소리와 현상』(La Voix et le phénomène, 1967)에서 언어 속에는 항상 흔적(trace)과 차연(différance)이 있다고 주장했다. 의미는 현재 완전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지연되고 미끄러진다. 베케트의 대사들은 이 데리다적 의미의 미끄러짐을 무대 위에서 가시화한다. 고도라는 이름은 의미를 가리키는 것 같지만, 그 의미는 결코 현재에 도착하지 않는다. 기표는 있지만 기의는 영원히 연기된다.
5. 포조와 럭키 — 권력과 예속의 쌍
희곡에는 두 쌍의 인물이 등장한다. 블라디미르-에스트라공과, 포조-럭키. 포조는 럭키를 목줄로 끌고 다닌다. 럭키는 짐을 지고 따라다니며, 포조의 명령에 따라 춤을 추고 생각을 한다. 럭키의 독백은 희곡에서 가장 긴 대사지만, 그것은 뒤엉키고 해체된 사유의 파편들이다. 의미 있는 것들이 의미 없는 순서로 나열된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정신현상학』(Phänomenologie des Geistes, 1807)에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전개했다. 주인은 노예의 노동을 통해 세계를 향유하지만, 그 향유는 점차 노예를 통해서만 가능해지므로 주인은 노예에게 의존하게 된다. 반면 노예는 노동을 통해 세계를 변형하고, 그 과정에서 자기의식을 발전시킨다. 역사는 이 변증법의 운동이다.
포조와 럭키 관계는 이 헤겔적 구도를 패러디한다. 포조는 지배자이지만, 그는 럭키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2막에서 포조는 눈이 멀어 럭키에게 끌려 다닌다. 지배와 예속의 관계가 전도된다. 그러나 이것은 헤겔적 의미의 역사적 진보가 아니다. 단지 무의미한 역전일 뿐이다. 주인이 노예가 되고 노예가 주인을 이끈다고 해서 어떤 해방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베케트가 헤겔의 역사 낙관주의에 던지는 조용한 반론이다. 역사는 자유의 실현을 향해 나아가는가. 베케트의 무대 위에서 그 대답은 회의적이다.
6. 실존주의의 그늘 — 사르트르와의 거리
『고도를 기다리며』가 초연된 파리는 실존주의의 수도였다.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의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 1943)가 출판된 지 10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고 선언했다. 신이 없는 세계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만들어가야 한다. 자유는 저주이기도 하지만, 그 자유 속에서 인간은 책임과 의미를 창조한다.
베케트는 사르트르를 읽었다. 그러나 동의하지 않았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에게는 사르트르적 자유가 없다. 아니, 자유는 있지만 그것이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가자"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말한다. 그러나 떠나지 않는다.
사르트르의 인물들은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진다. 베케트의 인물들은 선택의 언저리에서 맴돌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또는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이것은 사르트르가 '나쁜 믿음(mauvaise foi)'이라고 부른 것, 즉 자신의 자유를 부정하고 필연인 척하는 태도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베케트는 이것을 도덕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냥 보여줄 뿐이다.
이 차이가 결정적이다. 사르트르에게 실존주의는 인간에 대한 낙관적 선언이었다. 베케트에게 그 선언은 너무 쉬웠다.
7. 반복과 습관 — 베케트의 쇼펜하우어
베케트는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를 깊이 읽었다. 쇼펜하우어의 흔적은 『고도를 기다리며』 곳곳에 배어 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1818)에서 세계의 본질을 맹목적인 의지(Wille)로 보았다. 이 의지는 목적도 방향도 없다. 그저 끊임없이 욕망하고, 욕망이 충족되면 새로운 욕망이 생겨난다. 인간의 삶은 이 욕망의 순환 속에서 지속되는 고통이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기다림은 이 쇼펜하우어적 욕망의 구조와 닮아 있다. 고도가 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욕망. 그 욕망이 충족되지 않아도 다음 날 다시 그 욕망으로 돌아온다. 그들이 고도를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그 기다림이 그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의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베케트가 특별히 주목했던 것은 쇼펜하우어의 '습관(Gewohnheit)'론이다. 쇼펜하우어는 습관을 고통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완충재로 보았다. 반복되는 일상이 고통스러워도, 그 반복이 습관이 되면 고통은 배경으로 물러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대화 패턴, 그들이 매일 되풀이하는 소소한 다툼과 화해와 잡담—이것은 바로 이 습관의 기능이다. 기다림의 고통을 희석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는 척한다.
베케트는 이것을 냉소적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이 인간의 실제 모습이라고, 담담하게 응시한다.
8. 고도는 누구인가 — 해석의 역사와 베케트의 침묵
고도(Godot)가 신(God)을 암시하는가. 이것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둘러싼 가장 오래된 질문이다. 영어로 God에 프랑스어 지소사(指小辭) '-ot'를 붙이면 Godot가 된다는 해석. 베케트 자신은 이 해석을 부인했다. "내가 고도가 신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이름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는 텍스트의 의미를 독점하지 않는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가 「저자의 죽음」(La Mort de l'auteur, 1967)에서 주장했듯, 텍스트가 완성되는 순간 저자는 텍스트로부터 분리된다. 텍스트의 의미는 저자의 의도가 아니라 독자와의 만남 속에서 생성된다.
그렇다면 고도는 무엇인가. 신일 수도 있다. 죽은 신, 부재한 신, 침묵하는 신. 카뮈가 부조리의 원천으로 지목했던 바로 그 침묵하는 세계. 또는 고도는 의미 자체일 수 있다. 인간이 끊임없이 추구하지만 결코 완전히 손에 넣지 못하는 의미. 또는 고도는 미래일 수 있다. 지금보다 나은 무언가, 오늘의 고통을 정당화해줄 내일.
해석이 복수로 열려 있다는 사실이 이미 철학적 메시지다. 고도의 정체가 확정될 수 없다는 것, 그 불확정성이 곧 현대인의 의미 경험을 포착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향해 산다.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말할 수 없어도.
9. 친구라는 구원 —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
소설 속 인물들이 홀로 내면의 고통과 씨름하는 동안,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함께다. 이것이 처음에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싸운다. 서로를 비난한다. 헤어지겠다고 말하고는 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에스트라공이 두들겨 맞고 돌아왔을 때, 블라디미르는 그를 받아들인다. 에스트라공이 잠들 때, 블라디미르는 그 위에 외투를 덮어준다. 그리고 혼자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두 사람 모두다.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전체성과 무한』(Totalité et Infini, 1961)에서 윤리는 타인의 얼굴(le visage de l'Autre)과의 만남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했다. 타인의 얼굴은 나에게 책임을 요청한다. 그것이 존재보다 앞서는 윤리의 기원이다. 블라디미르가 잠든 에스트라공에게 외투를 덮어주는 행위는, 아무런 철학적 논증도 없이, 레비나스적 윤리의 실천이다. 세계가 부조리하더라도,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추위는 구체적이다.
베케트의 희곡은 결국 두 인물이 함께 있다는 사실로 유지된다. 고도가 오지 않더라도, 서로가 있다. 이 단순한 사실이 희곡의 어두운 배경 위에서 빛난다. 어두울수록 작은 빛이 더 선명하듯.
10. 지금 여기서 —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베케트가 이 희곡을 쓴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였다. 홀로코스트가 일어났다. 히로시마가 불탔다. 유럽의 철학과 문명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을 세계는 목격했다. 그 잔해 위에서 베케트는 물었다. 이 이후에도 인간이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가능한가.
이 물음은 2025년에도 살아 있다.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다.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기다린다. 취업이 되면, 연애가 시작되면, 집을 사면, 이 프로젝트가 끝나면, 그때 제대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그 '그때'는 항상 미래에 있다. 지금 이 순간은 늘 기다림의 시간이 된다. 현재는 미래를 위한 대기실이 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고도 기다림은 이 현대적 삶의 구조를 무대 위에 올려놓는다. 우리가 기다리는 고도는 무엇인가. 그것이 온다면 정말 달라지는가. 그것이 오지 않더라도 우리의 오늘은 의미가 없는가.
베케트는 답을 주지 않는다. 그는 질문만 던지고, 무대 위에서 조용히 떠난다. 막이 내린다. 관객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간다. 내일 또 출근한다. 어쩌면 그것이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어쩌면 그 기다림 자체가 삶이다.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도 우리는 옆 사람에게 외투를 덮어줄 수 있다. 베케트가 남긴 것은 그것뿐이지만, 그것이면 충분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