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죽은 신부의 방에서 이상한 안도감을 느낀다. 에블린은 배의 갱웨이 앞에서 얼어붙고, 손을 놓아버린다. 가브리엘은 아내의 눈물을 보며 자신이 평생 살아온 삶의 공허함을 직면한다.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1882~1941)의 단편집 『더블린 사람들』(Dubliners, 1914)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떠나지 못한다. 더 정확하게는, 떠나려다 실패하거나, 떠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거나, 떠나고 싶다는 욕망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조이스는 이 책을 쓴 이유를 스스로 밝혔다. "나는 아일랜드의 도덕적 역사를 쓰고자 했고, 그 출발점으로 더블린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그 도시가 마비(paralysis)의 중심지로 보였기 때문이다."
마비. 조이스 자신이 쓴 이 단어가 열다섯 편 단편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어다. 몸이 마비된 것이 아니다. 의지가, 욕망이, 상상력이 마비되었다. 사람들은 살아 있지만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 마비의 원인은 무엇이고, 그것은 어디서 오는가.
2. 마비의 해부 — 식민지 의식과 내면화된 복종
더블린은 1914년 영국 식민지 아일랜드의 수도다. 조이스가 그린 이 도시는 정치적으로 지배받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며, 문화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그런데 조이스가 포착한 것은 외부의 폭력이 아니라 내면화된 복종이다.
프란츠 파농(Frantz Fanon, 1925~1961)은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Les Damnés de la Terre, 1961)에서 식민지 지배의 가장 교묘한 효과는 피지배자가 자신의 열등함을 내면화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지배자의 언어로 생각하고, 지배자의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며, 지배자의 문화를 우월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사슬은 외부에서 내부로 이동한다.
『더블린 사람들』의 인물들은 정확히 이 지점에 있다. 그들은 영국에 저항하지 않는다. 저항할 생각조차 없다. 더 정교하게는, 저항해야 할 대상이 어디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다. 「이비」(Ivy Day in the Committee Room)의 정치 활동가들은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영웅 파넬(Charles Stewart Parnell, 1846~1891)을 그리워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부패한 선거 운동에 몸을 팔고 있다. 「어머니」(A Mother)의 칸 부인은 아일랜드 문화 부흥 운동을 지지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딸의 공연료를 한 푼도 양보하지 않는 속물 근성을 드러낸다. 해방의 언어와 복종의 행동이 같은 몸 안에 공존한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1935~2003)는 『문화와 제국주의』(Culture and Imperialism, 1993)에서 식민지 문학이 제국의 서사를 어떻게 내면화하는지 분석했다. 지배 문화의 관점에서 자신을 보는 것, 지배자의 언어로 자신의 결핍을 설명하는 것—이것이 문화 제국주의의 심층 작동 방식이다. 더블린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허접하고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들이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도록 훈련되었기 때문이다.
3. 에피파니 — 마비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순간
조이스는 이 마비를 서사적으로 설명하거나 분석하지 않는다. 그 대신 특별한 기법을 사용한다. 에피파니(epiphany).
에피파니는 원래 신학 용어다. 신이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 즉 현현(顯現). 조이스는 이것을 세속화했다. 일상의 평범한 순간 속에서 사물이나 상황의 본질이 갑자기 투명하게 드러나는 경험. 그것이 조이스적 에피파니다.
「자매들」(The Sisters)에서 소년은 죽은 플린 신부의 집에서 이상한 해방감을 느낀다. 신부는 살아 있는 동안 소년을 억압했고, 그 억압은 종교적 권위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신부의 죽음은 그 권위의 공허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소년은 이것을 개념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그냥 이상하게 홀가분하다. 이것이 에피파니다—이해되기 전에 느껴지는 진실.
「죽은 사람들」(The Dead)에서 가브리엘은 아내 그레타가 오래전 자신을 사랑했던 청년 마이클 퓨리를 떠올리며 우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그는 평생 자신이 아내를 사랑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순간 그는 깨닫는다—자신은 아내를 진정으로 알지 못했고, 아내의 가장 깊은 곳은 자신과 무관한 곳에 있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삶 전체가 어쩌면 이런 방식으로 표면만 스친 것은 아닐까.
이 에피파니들은 해결을 주지 않는다. 그냥 드러낸다. 마비된 삶이 자신의 마비를 잠깐 목격하는 순간.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마비가 덮인다.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판단력 비판』(Kritik der Urteilskraft, 1790)에서 숭고(sublime)의 경험을 분석하면서, 우리의 이성적 능력이 감당할 수 없는 것과 대면할 때 일어나는 특별한 감정적 충격에 대해 서술했다. 조이스의 에피파니는 이 숭고의 세속적 버전이다. 일상의 표면이 찢어지고, 그 아래의 심연이 잠시 보이는 것.
4. 탈출의 실패 — 에블린과 욕망의 구조
열다섯 편 단편 중 「에블린」(Eveline)은 마비의 구조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에블린 힐은 19세 여성이다. 아버지는 폭력적이다. 공장 일은 고달프다. 어머니는 이미 죽었다. 프랭크라는 남자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함께 떠나자고 한다. 배가 준비되어 있고, 티켓도 있다. 탈출의 조건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
그런데 에블린은 배에 오르지 못한다. 갱웨이 앞에서 그녀는 철책을 붙잡고 놓지 않는다. 프랭크가 부른다. 그녀는 듣지 못한다. 아니, 들리지 않는다. 그녀의 눈은 "하얗고 수동적인 것처럼"—바다를 향해 있지만,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왜 에블린은 떠나지 못하는가. 조이스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보여준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의 욕망 이론은 여기에 하나의 언어를 제공한다. 라캉은 『에크리』(Écrits, 1966)에서 주장한다. 인간의 욕망은 결코 대상 자체를 향하지 않는다. 욕망은 타자의 욕망에 대한 욕망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욕망하도록 허락된 것을 욕망한다. 에블린의 욕망은 진정으로 탈출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탈출을 꿈꾸었지만, 그 꿈은 그녀의 실제 주체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권위, 어머니와의 약속, 교회의 도덕—이것들이 그녀의 욕망 구조를 형성했다. 탈출은 그 구조 밖에 있었고, 따라서 실현될 수 없었다.
더 단순하게 말하면 이렇다. 우리는 상상한 적 없는 것을 욕망할 수 없다. 에블린은 자유로운 삶을 상상한 적이 없다. 그녀에게 제공된 상상의 재료들—가정, 의무, 희생—은 모두 그녀를 묶어두는 것들이었다. 그 재료들로는 탈출을 상상할 수 없다.
5. 음주와 허무 — 남성성의 파국
조이스가 그리는 더블린 남성들의 삶에는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직업, 빚, 음주, 가정 폭력, 그리고 다시 술집. 「카운터파츠」(Counterparts)의 패링턴이 그 전형이다.
패링턴은 법률 사무소 서기다. 상사에게 모욕을 당한다. 시계를 전당포에 맡기고 그 돈으로 술을 마신다. 손가락씨름에서 진다. 집에 돌아와 아들을 때린다.
이 짧은 이야기에서 남성성의 폭력적 구조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패링턴은 위에서 받은 굴욕을 아래에 전달한다. 그는 자신이 당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했다면 전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이해 대신 반복을 선택한다—아니, 반복만이 그에게 열려 있는 유일한 출구다.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1895~1973)와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 1903~1969)는 『계몽의 변증법』(Dialektik der Aufklärung, 1947)에서 권위주의적 성격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분석했다. 지배 구조에 굴종하면서 동시에 더 약한 자를 지배하려는 심리—이것이 파시즘의 심리적 토대이기도 하지만, 더블린의 가정 폭력이기도 하다. 패링턴이 아들을 때리는 것은 그가 나쁜 인간이어서가 아니다. 그가 자신이 놓인 구조를 볼 수 없어서다. 구조를 볼 수 없는 자는 구조를 반복한다.
알코올이 그 구조에서 하는 역할은 흥미롭다. 술은 현실을 일시적으로 흐리게 만들지만, 현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더블린 사람들이 마시는 것은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비를 심화시키기 위해서다. 이미 마비된 몸에 더 깊은 마비를 주사하는 것. 그래야 현실이 덜 아프기 때문에.
6. 종교의 그늘 — 가톨릭교회와 영적 마비
더블린의 마비를 이해하려면 가톨릭교회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조이스 자신이 예수회 교육을 받았고, 그 경험이 그의 의식을 형성했으며, 동시에 그는 가톨릭을 아일랜드 마비의 핵심 원인으로 보았다.
조이스는 한 편지에서 가톨릭교회를 "영혼의 족쇄"라고 표현했다. 과장이 아니다. 『더블린 사람들』에서 종교는 해방의 자원이 아니라 통제의 기제로 작동한다. 「자매들」의 플린 신부는 신비롭고 억압적인 권위다. 「은총」(Grace)에서 수술 신부의 강론은 사업 실패한 남자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실제로는 현실 순응을 정당화한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이것은 위로인가, 마취인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문명과 그 불만』(Das Unbehagen in der Kultur, 1930)에서 문명이 개인의 욕동(drive)을 억압함으로써 존속한다고 분석했다. 종교는 이 억압 기제의 가장 정교한 형태 중 하나다. 죄책감을 생산하고, 죄책감은 복종을 낳는다. 복종은 기존 질서를 유지한다. 더블린의 가톨릭은 이 프로이트적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구현한다.
그러나 조이스는 이것을 단순히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종교가 마비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마비를 견디게 해주는 유일한 언어 자원이기도 하다는 것을 안다. 더블린 사람들은 종교 없이 살 수 없다. 종교가 그들의 세계를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설령 그 의미가 그들을 묶어두는 것이라 해도.
7. 언어와 정체성 — 영어로 쓴 아일랜드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은 영어로 쓰였다. 이것은 당연한 사실처럼 보이지만, 사실 심각한 문제를 내포한다. 아일랜드의 언어는 아일랜드어(Gaeilge)다. 그런데 영국 식민 지배는 아일랜드어를 주변화하고 영어를 공용어로 강제했다. 조이스가 영어로 쓸 때, 그는 식민자의 언어로 피식민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조이스는 이 아이러니를 『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1916)에서 직접 언급한다. 주인공 스티픈은 영국인 학장과 대화하면서 생각한다. "그의 언어, 그렇게 친숙하고 그렇게 낯선—그것은 항상 나에게 낯선 언어일 것이다."
호미 바바(Homi Bhabha, 1949~)는 『문화의 위치』(The Location of Culture, 1994)에서 혼종성(hybridity)과 모방(mimicry)의 개념을 제시한다. 식민지인은 지배자의 언어와 문화를 모방함으로써 생존하지만, 그 모방은 결코 완전하지 않다. 항상 '거의, 그러나 정확히는 아닌(almost but not quite)' 상태에 머문다. 이 불완전한 모방이 역설적으로 저항의 공간이 된다. 조이스의 영어는 이 혼종적 언어다. 표준 영어처럼 보이지만, 더블린의 억양과 리듬과 감각이 그 안에 스며 있다.
그 결과가 자유간접화법(free indirect discourse)이라는 기법이다. 서술자의 목소리와 인물의 목소리가 구분되지 않는다. "가브리엘의 눈물이 흘렀다"가 아니라 "그래, 신문은 옳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온 아일랜드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이것은 서술인가, 가브리엘의 내면인가. 둘 다다. 그리고 그 경계의 용해 속에서, 개인의 의식이 집단의 역사와 녹아드는 순간이 온다.
8. 죽음의 편재 — 산 자보다 많은 죽은 자들
『더블린 사람들』에는 죽음이 넘친다. 「자매들」에서 소설은 신부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마지막 단편 「죽은 사람들」(The Dead)은 제목 자체가 죽음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열네 편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조이스가 창조한 더블린은 산 자보다 죽은 자가 더 강하게 현존하는 공간이다. 더블린 사람들은 죽은 자의 기억과 함께, 죽은 자의 꿈과 함께, 죽은 자의 실패와 함께 산다. 마이클 퓨리는 죽었지만, 그레타의 기억 속에서 가브리엘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 있다. 파넬은 죽었지만, 더블린의 정치 담론 속에서 살아 있는 어떤 정치인보다 더 강하게 현존한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7)에서 죽음을 향한 존재(Sein-zum-Tode)로서의 인간 실존을 분석했다. 죽음을 직면할 때만 삶은 진정한 의미를 얻는다. 죽음을 회피할 때, 인간은 '일상성(das Man)'—군중 속에 묻혀 자신의 고유한 실존을 잃는 상태—에 빠진다.
더블린 사람들이 진정으로 마비된 이유는, 그들이 죽음에 직면하지 못해서다. 그들은 죽음을 주변에 두고 살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삶에 던지는 질문을 외면한다. 「죽은 사람들」의 마지막 장면에서 눈이 온 아일랜드 위에 내리는 것은—이 보편적 죽음의 이미지 앞에서—가브리엘이 마침내 자신도 죽어가는 존재임을 직면하는 순간이다. 그때야 비로소 그는 진정으로 눈을 뜬다. 너무 늦었지만.
9. 가브리엘의 에피파니 — 자아의 붕괴와 재생
「죽은 사람들」은 『더블린 사람들』의 마지막 단편이자 가장 긴 작품이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 없이, 영어로 쓰인 단편소설 중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다.
연말 파티. 가브리엘 코니는 박식하고 자신감 있는 남성이다. 그는 대륙 문화를 숭상하고, 아일랜드의 협소함을 경멸한다. 그는 아내 그레타를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날 밤 그는 세 번의 작은 굴욕을 경험한다. 민족주의자 몰리 아이버스에게 아일랜드 문화에 대한 무관심을 지적받는다. 자신이 연설을 멋지게 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아내가 죽은 옛 연인을 그리워하며 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마지막 깨달음 앞에서 가브리엘의 자아는 무너진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이미지—세련된 지식인, 사랑받는 남편, 아일랜드를 넘어선 유럽인—가 허상이었음을 직면한다. 그리고 그 허상의 붕괴 속에서, 이상하게도 해방감이 온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정신현상학』(Phänomenologie des Geistes, 1807)에서 자아는 타자와의 부정적 대면을 통해 성장한다고 주장했다. 자아가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고, 그 한계를 통해 더 높은 차원의 자의식으로 나아가는 것. 가브리엘의 에피파니는 이 헤겔적 의미에서 진정한 자기 인식의 시작이다. 그러나 조이스는 헤겔처럼 낙관적이지 않다. 소설은 가브리엘이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냥 눈이 내린다. 온 아일랜드 위에, 산 자와 죽은 자 모두 위에.
이 결말은 해결이 아니라 공명이다. 모든 것이 같은 눈 아래 덮인다. 차이가 없어진다. 그리고 그 차이 없음 속에서, 역설적으로, 모든 것이 똑같이 소중하다.
10. 지금 여기서 — 더블린은 어디에나 있다
『더블린 사람들』은 1914년 아일랜드의 이야기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도 읽히는 이유는, 더블린이 특정 도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블린은 조건이다.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것. 변하고 싶지만 변할 수 없는 것. 살아 있지만 진정으로 살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 이것은 식민지 아일랜드의 전유물이 아니다. 서울의 고시원에서 취업 준비를 하는 20대, 직장에서 모욕을 당하고 집에 와서 배우자에게 화풀이를 하는 40대, 부모님이 만들어놓은 삶의 경로에서 벗어날 상상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30대—이들의 더블린은 어디인가.
한병철(Byung-Chul Han, 1959~)은 『피로사회』(Müdigkeitsgesellschaft, 2010)에서 현대인의 마비를 진단한다. 금지와 강제가 아니라 자기 착취와 성과의 논리가 인간을 마비시킨다. 우리는 억압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억압한다. 에블린이 갱웨이 앞에서 얼어붙은 것처럼, 우리는 자유가 눈앞에 있을 때 오히려 더 강하게 현재의 마비를 선택한다. 외부의 적이 없는 시대에, 마비는 더 교묘하고 더 철저하다.
조이스는 해결책을 주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위대함이다. 에피파니는 해방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보는 것이다. 마비된 자신을 잠깐 목격하는 것. 그 목격이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지는, 목격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