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는 마을에 도착한다. 눈이 내린다. 언덕 위 성은 분명히 보인다. 그런데 K.는 끝내 그 성에 들어가지 못한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가 미완성 유고로 남긴 『성』(Das Schloss, 1926)은 이 단순한 구도 위에 세워진다. 한 남자가 측량사로 부임하기 위해 어느 마을에 왔다. 그러나 마을을 지배하는 성의 관청은 그를 인정하지도,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저 무한히 미룰 뿐이다. 허가를 받으려 하면 다른 창구로 넘겨지고, 담당자를 만나려 하면 담당자는 자리를 비웠다고 한다. 전화를 걸면 잡음만 들린다.
이 소설이 1926년에 출판된 뒤 한 세기가 지났다. 그런데 누구나 이 풍경을 안다. 구청 민원실, 보험사 고객센터, 대기업 채용 공고—우리는 K.의 경험을 매일 한다. 카프카는 20세기 초 프라하의 관료제를 묘사했지만, 그것은 동시에 모든 시대의 권력 구조를 해부한 철학적 지도였다.
여기서 질문이 시작된다. 성은 왜 K.를 들이지 않는가. 아니, 더 근본적으로—성은 애초에 존재하는가.
2. 관료제의 해부 — 막스 베버가 본 성
성의 내부는 소설에서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독자가 아는 것은 K.가 접촉하려 했던 담당 관료 클람(Klamm)이라는 인물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클람을 직접 본 사람은 없다. 아니,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이 묘사하는 클람의 모습은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그가 키가 크다고 하고, 어떤 이는 작다고 한다.
이것은 카프카의 장치가 아니라 관료제의 본질이다.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경제와 사회』(Wirtschaft und Gesellschaft, 1922)에서 근대 관료제(Bürokratie)를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근대 관료제의 특징은 세 가지다. 첫째, 비인격성(impersonality)이다. 관료제는 특정 인물이 아니라 규칙과 절차에 따라 작동한다. 클람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어떤 직함을 가진 어떤 직위에 있는지가 중요하다. 둘째, 위계성(hierarchy)이다. 모든 결정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고, 모든 보고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다. 중간을 건너뛸 수 없다. 셋째, 전문화(specialization)다. 각 담당자는 자기 영역만 안다. 다른 영역은 모른다고, 담당이 아니라고 한다.
K.의 비극은 이 세 가지 특징이 만드는 미로에서 비롯된다. 비인격적 규칙이 그를 처리하지 않고, 위계의 꼭대기는 닿을 수 없으며, 모든 담당자는 자기 권한 밖의 일이라고 한다. 결국 아무도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시스템이 결정하지 않음으로써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베버는 이 관료제를 "쇠우리(iron cage)"라고 불렀다. 한번 완성된 관료제는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가두는 철창이 된다. 효율성을 위해 만들어진 도구가 인간을 지배하는 목적이 된다. 카프카는 이 쇠우리를 소설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3. 부조리의 구조 — 카뮈가 읽은 카프카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1942)에서 카프카를 부조리(absurde) 문학의 대표적 사례로 분석한다. 카뮈에게 부조리는 단순히 '이상하다'는 뜻이 아니다. 부조리는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요구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 사이의 충돌에서 발생한다.
인간은 의미를 원한다.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왜 내가 이 상황에 있는지, 어떻게 하면 해결되는지,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 K.는 끊임없이 이 질문들을 던진다. 그리고 세계—성의 관료제—는 답하지 않는다. 아니, 답하는 척하면서 아무것도 답하지 않는다.
카뮈는 이것을 부조리의 핵심으로 본다. 부조리는 세계가 악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세계가 무관심하기 때문에 생긴다. 성은 K.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은 K.를 거의 인식하지 않는다. 그 무관심이 K.를 소진시킨다.
중요한 것은 카뮈가 이 부조리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다. 그는 부조리 앞에서 세 가지 태도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첫째, 자살—부조리한 삶을 끝내는 것. 둘째, 신앙으로의 도약—부조리를 초월적 의미로 덮는 것. 셋째, 부조리와 함께 반항하며 사는 것. 카뮈가 선택한 것은 세 번째다. 시지프는 바위를 굴리다 굴러 내려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밀어 올린다. 그리고 카뮈는 말한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K.는 카뮈적 영웅인가.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계속 시도한다. 그러나 행복하지는 않다. 카프카는 카뮈보다 더 어두운 곳에 서 있다. 반항이 가능한지조차 불분명한 세계를 그렸다.
4. K.는 누구인가 — 정체성 없는 주체
소설의 주인공은 성씨도 이름도 없다. K.다. 이니셜 하나. 그는 스스로를 측량사라고 주장하지만, 성 측에서는 그런 측량사를 부른 적이 없다고도 하고, 부른 것 같기도 하다고도 한다. K. 자신도 자신이 정말 측량사인지, 정말 그 마을에 부임하기로 되어 있었는지를 완전히 확신하는 것 같지 않다.
이 정체성의 불확실성은 철학적으로 중요하다.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 1943)에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고 선언했다. 인간은 미리 정해진 본질 없이 세계에 던져지고,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간다. 망치는 망치로 쓰이기 위해 만들어지지만, 인간은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K.의 문제는 이 사르트르적 자유조차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는 선택하려 하지만, 선택의 효과가 없다. 그가 무엇을 하든 성의 결정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성의 결정이 있는지도 모른다. K.는 자유롭게 행동하지만, 그 행동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세계에 있다.
이것은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Idéologie et appareils idéologiques d'État, 1970)에서 말한 호명(interpellation) 개념과 연결된다. 권력은 개인을 특정 주체로 불러냄으로써 그를 그 주체로 만든다. "이봐요, 거기!"라고 경찰이 외칠 때,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자신이 호명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K.의 비극은 그가 호명되기를 기다리지만, 성은 그를 제대로 호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측량사로 인정받으려 하지만, 시스템은 그를 측량사도 침입자도 아닌 어떤 것으로 처리한다. 아니, 처리하지 않는다.
5. 성이라는 공간 — 권력의 위상학
『성』에서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공간 자체가 권력을 표현한다.
성은 언제나 보인다. 언덕 위에 서 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멀어지는 것 같다. K.가 성을 향해 걷다 보면 어느새 마을 입구에 와 있다. 성으로 가는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이 성에 닿지 않는다.
이 공간적 역설을 미셸 푸코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 개념으로 읽을 수 있다. 푸코는 「다른 공간들」(Des espaces autres, 1967)에서 유토피아와 대비되는 헤테로토피아를 이야기한다. 유토피아가 어디에도 없는 이상적 장소라면, 헤테로토피아는 실재하지만 모든 다른 장소와 이질적인 공간이다. 감옥, 정신병원, 묘지, 성소(聖所)—이 공간들은 실재하지만 일상적 사회 공간의 논리로 작동하지 않는다.
성은 카프카적 헤테로토피아다. 그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K.의 세계와는 다른 논리로 작동한다. 성의 시간표, 성의 절차, 성의 언어가 있다. K.는 자신의 논리—목적, 효율, 합리성—로 성에 접근하려 한다. 그러나 성은 그 논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일상에서도 이런 경험은 있다. 대학병원 예약 시스템, 세금 신고 절차, 아파트 입주 서류—이것들은 나의 논리가 아니라 시스템의 논리로 움직인다. K.가 느끼는 좌절은 이 경험의 극단적 형태다.
6. 기다림의 형이상학 — 베케트와의 대화
카프카의 K.는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의 블라디미르·에스트라공과 자주 비교된다.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 1952)에서 두 인물은 고도를 기다린다. 고도가 누군지, 왜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고도는 오지 않는다. 그래도 기다린다.
K.의 기다림과 블라디미르의 기다림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K.는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그는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는다. 사람을 만나고, 편지를 보내고, 계략을 세운다. 그러나 그 행동들이 결국 기다림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두 텍스트는 만난다.
베케트는 카프카를 읽었다. 그리고 카프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카프카의 인물들은 목표가 있다. K.는 성에 들어가려 한다. 베케트의 인물들은 목표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고도가 오면 무엇이 달라지는지 모른다. 이것이 실존주의 이후 부조리 문학이 걸어간 길이다. 목표의 부재가 아니라 목표 자체의 의미 붕괴.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7)에서 인간의 존재 방식을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로 규정한다. 인간은 항상 이미 세계 안에 던져져 있다(Geworfenheit). 그 던져짐의 의미를 묻는 것이 실존의 과제다. K.는 이 질문을 묻지 않는다. 그는 성에 들어가는 것에 집중할 뿐이다. 그러나 성에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 그의 진짜 문제다.
7. 여성 인물들 — 성의 매개자이자 희생자
『성』에서 여성 인물들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K.의 연인 프리다(Frieda), 바나바스(Barnabas)의 여동생 아말리아(Amalia), 페피(Pepi)—이들은 모두 성과 마을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
프리다는 클람의 정부(情婦)였다. 성의 관료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마을에서 특별한 지위를 가졌다. K.는 그녀를 통해 클람에게 접근하려 한다. 이것은 냉혹하게 읽으면 그녀를 도구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리다 역시 K.를 이용하고 있다. 그들의 관계는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 각자의 생존 전략이다.
아말리아는 더 비극적이다. 그녀는 성의 관료 소르티니(Sortini)의 성적 요구를 거부했다. 그 결과 그녀의 가족 전체가 마을에서 배척당한다. 공식적인 처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마을 사람들이 그 가족을 피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명시적 폭력 없이, 판결 없이, 사회적 배제가 이루어진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에서 전체주의 체제가 폭력보다 더 두려운 것은 개인의 의지를 완전히 무력화하는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아말리아의 경우, 성은 그녀를 처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처벌받는 것보다 더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처벌이라면 대응할 수 있다. 그러나 침묵과 배제에는 싸울 상대가 없다.
8. 법 앞에서 — 『소송』과의 연결
카프카의 또 다른 대표작 『소송』(Der Proceß, 1925)에는 유명한 우화가 있다. 「법 앞에서(Vor dem Gesetz)」라는 단편이 소설 안에 삽입되어 있다.
한 남자가 법의 문 앞에 온다. 문지기가 지키고 있다. 문지기는 지금은 들여보낼 수 없다고 한다. 남자는 기다린다. 평생을 기다린다. 그리고 죽기 직전 문지기에게 묻는다. 왜 오랜 세월 동안 자신 말고는 아무도 이 문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냐고. 문지기는 답한다. 이 문은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이 문을 닫겠습니다.
『성』은 이 우화의 장편 버전이다. K.가 들어가려는 성의 문은 어쩌면 K. 만을 위한 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알 방법이 없다. 그리고 그 문은 그가 죽기 전에 닫힌다—소설이 미완으로 끝나기 때문에 우리는 결말을 모르지만, 카프카의 친구이자 유언 집행자였던 막스 브로트(Max Brod, 1884~1968)에 따르면 카프카는 K.가 마침내 성에서 연락을 받지만 그것은 그의 임종 직전이 된다는 결말을 구상했다고 한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법 앞에서」를 분석한 에세이(1982)에서 법(Loi)의 역설을 짚어낸다. 법은 그것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권위를 갖는다. 만약 법 안에 들어갈 수 있다면, 법의 신비는 사라진다. 법의 권위는 그것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기 때문에 유지된다. 성도 마찬가지다. K.가 성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성은 권위를 갖는다. 만약 K.가 성에 들어간다면, 그곳이 그냥 관청 건물이라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9. 카프카적이라는 것 — 언어, 소통, 불가능성
카프카(Kafkaesque)라는 형용사는 이제 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관료적이고 부조리하며 탈출할 수 없는 상황을 뜻한다. 카프카는 자신의 이름을 형용사로 만든 몇 안 되는 작가 중 하나다.
그런데 이 소통의 불가능성에는 언어 철학적 차원도 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은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1953)에서 언어를 '언어 게임(Sprachspiel)'으로 설명한다. 언어는 고정된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특정 삶의 형태(Lebensform) 안에서 사용되는 실천이다. 같은 단어라도 다른 맥락에서 다른 의미를 갖는다.
K.와 성의 관료들은 같은 언어를 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다른 언어 게임을 하고 있다. K.가 "허가"라고 말할 때와 성의 담당자가 "허가"라고 말할 때, 그것은 같은 단어지만 다른 의미의 게임이다. K.는 자신의 언어 게임에서 상대에게 말을 건다. 그러나 상대는 다른 게임을 하고 있다.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평행선을 달린다.
직장 생활에서도 이런 경험이 있다. "검토해보겠다"는 말이 '예스'인지 '노'인지 알 수 없을 때. "연락드리겠습니다"가 영원히 오지 않는 연락을 의미할 때. K.의 불통은 우리의 불통이다.
10. 지금 여기서 — 디지털 성과 새로운 K.들
카프카가 묘사한 성의 관료제는 1920년대 합스부르크 제국의 해체기에 목격한 것이었다. 그러나 100년 뒤 그 구조는 더욱 정교해지고 더욱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오늘날의 성은 플랫폼이다. 구글, 아마존, 메타—이 기업들은 언덕 위의 성처럼 우리 삶을 지배하지만, 그 내부로 들어갈 수 없다. 알고리즘이 왜 내 콘텐츠를 노출시키지 않는지, 왜 내 계정이 정지되었는지, 왜 내 상품이 추천에서 제외되었는지—이유를 알 수 없다. 담당자는 자동응답 메시지다. 이의를 제기할 창구는 있지만 누군가 실제로 읽는다는 보장이 없다.
플랫폼 자본주의를 분석한 쇼샤나 주보프(Shoshana Zuboff)는 『감시 자본주의의 시대』(The Age of Surveillance Capitalism, 2019)에서 디지털 플랫폼이 인간 행동을 예측하고 조작하기 위한 원자재로 만든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플랫폼 안에서 살고 있지만, 플랫폼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정확히 K.의 상황이다.
그러나 카프카는 절망을 결론으로 내리지 않았다. 그는 끝내지 않았다. 소설은 미완이다. K.는 여전히 시도하고 있다. 미완의 소설, 끝나지 않는 시도—이것이 카프카가 남긴 것인지도 모른다. 성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들어가려는 그 몸짓 자체가 인간이라는 것의 정의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