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 살 소년이 또 학교에서 쫓겨났다. 네 번째다. 이유는 단순하다. 공부를 안 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하고 싶지 않았다.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외워야 하는 것들이 죄다 가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J.D. 샐린저(J.D. Salinger, 1919~2010)의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 1951)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Holden Caulfield)는 그냥 문제아가 아니다. 그는 철학적으로 민감한 소년이다. 다만 그 철학이 아직 언어를 얻지 못한 상태일 뿐이다.
홀든의 입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단어는 "phonies"다. 우리말로는 흔히 '가짜들'이라고 번역된다. 그에게 세상은 온통 phonies로 가득하다. 학교 선생들, 부잣집 아이들, 나이트클럽의 어른들, 인사치레를 하는 모든 사람들. 그는 그것들을 견디지 못한다.
이 단 하나의 단어에서 소설 전체의 철학적 핵심이 나온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려는 강박, 그리고 그 구분이 무너지는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는 고통. 홀든의 이야기는 사실 아주 오래된 철학적 물음이다. 진정성(authenticity)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진정하게 살 수 있는가.
2. 가짜 세계의 해부 — Phonies의 철학
홀든이 "phony"라고 부르는 것들을 분류해보면 흥미롭다.
우선 공연적 행동이 있다. 악수하면서 반갑지도 않은데 반갑다고 하는 것. 파티에서 모르는 사람과 "정말 잘 지내세요"를 주고받는 것. 이것은 사회적 의례(ritual)이지만, 홀든에게는 거짓말이다.
다음으로 역할 연기가 있다. 선생이 학생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자기 직업을 지키고 있을 뿐이라는 것. 어른들이 성공을 말하면서 사실은 돈과 지위를 말하고 있다는 것. 언어와 실제 의도 사이의 간극.
마지막으로 자기기만이 있다. 사람들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보지 않고, 사회가 원하는 것을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
이 목록을 보면, 홀든이 비판하는 것은 사실 20세기 철학이 '소외(alienation)'라고 부른 현상과 정확히 겹친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경제학·철학 수고』(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1844)에서 소외 개념을 처음 체계화했다. 노동자가 자신이 만든 생산물로부터, 노동 행위 자체로부터, 다른 인간으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의 본질로부터 분리되는 현상. 마르크스에게 이것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결과였지만, 그 핵심 구조—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것—는 홀든이 느끼는 것과 다르지 않다.
홀든은 마르크스를 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몸으로 소외를 경험하고 있다. 펜시 고등학교의 학생들이 성적을 위해 공부하고, 인맥을 위해 사귀고, 취직을 위해 활동하는 것을 보면서—그는 그 안에서 진짜 인간이 어디 있는지 찾지 못한다.
3. 실존주의의 청소년 — 사르트르와 홀든
홀든이 phonies를 혐오하는 방식은 실존주의(existentialism) 철학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출판된 1951년은 유럽 실존주의가 미국 지식층에 막 상륙하던 시기였다.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 1943)에서 '나쁜 믿음(mauvaise foi, bad faith)'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그 자유가 무섭기 때문에 스스로를 고정된 역할이나 정체성으로 규정하려 한다는 것이다. 웨이터가 자신을 "웨이터"라는 역할로만 정의할 때, 아버지가 자신을 "아버지"라는 역할의 수행자로만 볼 때—그것이 나쁜 믿음이다. 자유를 부정하고 자신을 사물화하는 자기기만.
홀든이 phonies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정확히 사르트르의 나쁜 믿음 속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회가 부여한 역할을 자신의 전부로 받아들이고, 그 역할 바깥의 자유를 외면한다. 그리고 그 외면을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부른다.
홀든은 그 어른 되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그 거부가 무엇을 향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그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느끼지만, 그 자유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것이 그의 비극이자 그의 진실이다.
사르트르는 자유를 "형벌"이라고 불렀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L'homme est condamné à être libre)." 자유는 선물이 아니라 짐이다. 아무도 대신 결정해주지 않는다. 아무도 의미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홀든의 방황은 이 저주 위에서 일어나고 있다.
4. 홀든이 사랑하는 것들 — 순수성의 철학
홀든이 모든 것을 혐오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몇 가지를 열렬히 사랑한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것들을 보면, 그의 철학이 무엇인지 더 잘 이해된다.
첫째, 어린아이들이다. 특히 그의 여동생 피비(Phoebe). 아이들은 phony가 아니다. 그들은 아직 사회적 역할을 완전히 내면화하지 않았다. 웃고 싶으면 웃고, 울고 싶으면 운다. 꾸밈이 없다.
둘째, 자연사박물관이다. 홀든은 뉴욕 자연사박물관을 좋아한다. 이유가 인상적이다. 거기 있는 것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스키모 인형은 항상 같은 자리에 있고, 유리 너머의 새는 영원히 날개를 펼친 채로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고 썩고 phonies가 되어가는 동안, 박물관만은 그대로다.
셋째, 죽은 동생 앨리(Allie)다. 앨리는 열한 살에 백혈병으로 죽었다. 홀든은 그를 "가장 똑똑하고 가장 착한 아이"라고 기억한다. 앨리는 다시는 phony가 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 순수함이 영원히 보존되어 있다.
이 세 가지—아이, 정지된 것, 죽은 것—에 공통점이 있다. 변질되지 않은 것, 타협하지 않은 것, 사회적 역할에 오염되지 않은 것이다. 홀든이 추구하는 것은 순수성(purity)이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있는 세계 안에서 유지될 수 없는 것들이기도 하다.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는 『에밀』(Émile, 1762)에서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선하지만 사회가 타락시킨다고 주장했다. 홀든의 어린이에 대한 사랑은 이 루소적 직관과 맞닿아 있다. 아이는 아직 사회화되기 전, 즉 타락하기 전의 인간이다. 그 상태가 진짜이고, 그 이후가 가짜다.
그러나 루소 자신도 알고 있었듯, 인간은 사회 없이 살 수 없다. 홀든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가 사랑하는 것들은 보존될 수 없고, 그가 증오하는 것들은 피할 수 없다.
5. 호밀밭의 파수꾼 — 환상과 책임의 사이
소설의 제목이 된 장면이 있다. 홀든이 피비에게 꿈을 말하는 장면이다.
"나는 커다란 호밀밭 같은 데서 조그만 애들이 뛰어노는 상상을 해. 수천 명의 조그만 애들이 있고 나 말고는 어른이 아무도 없어. 나는 낭떠러지 가장자리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누군가가 낭떠러지 쪽으로 달려오면 재빨리 붙잡는 거야. 애들은 어디로 달리는지 보지 않으니까. 나는 하루 종일 그 일만 해야 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거야."
(J.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공경희 역, 민음사, 2001, 230-231쪽)
이 이미지는 소설 전체의 철학을 압축한다.
아이들은 낭떠러지를 모르고 달린다. 그들의 순수함이 그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홀든은 그 아이들을 지키고 싶다. 순수한 것들이 세상의 낭떠러지—타락, 소외, 사회적 역할—로 떨어지지 않도록.
그러나 이 꿈에는 두 가지 모순이 있다.
첫째, 홀든 자신은 이미 낭떠러지에 가까이 있다. 지키겠다는 그가 가장 위험하다. 그는 자신을 구하지 못하면서 남을 구하려 한다.
둘째, 낭떠러지는 막을 수 없다. 아이들은 언젠가 어른이 된다. 순수함은 보존할 수 없다. 홀든이 그토록 지키려는 것이 사실은 지킬 수 없는 것이다.
이 이미지는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의 시시포스를 연상시킨다. 카뮈는 『시시포스의 신화』(Le Mythe de Sisyphe, 1942)에서 산 위에 바위를 밀어 올리지만 다시 굴러 내려오는 시시포스를 부조리(absurde)의 상징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카뮈는 말한다. "시시포스는 행복했다고 상상해야 한다." 결과가 없어도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홀든의 파수꾼 꿈도 그렇다. 실현 불가능하지만, 그 불가능한 꿈을 꾼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윤리적 태도다.
6. 뉴욕의 이틀 밤 — 도시와 소외
홀든이 펜시를 나와 뉴욕을 떠도는 이틀 밤은 소설의 핵심 공간이다. 뉴욕은 홀든에게 phonies의 집결지다.
그는 나이트클럽에 간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폼을 잡고 있다. 멋있는 척, 세련된 척, 연인인 척. 그는 콜걸을 불러놓고 성관계 대신 대화를 원한다. 그녀가 떠난 뒤 포주에게 맞는다. 그는 옛 여자친구 샐리를 만나 뮤지컬을 보고, 충동적으로 둘이 어딘가로 도망가자고 말한다. 샐리는 당연히 거절한다. 그는 또 혼자가 된다.
이 장면들에서 홀든은 계속 연결을 시도하고 계속 실패한다. 그는 진짜 대화를 원하지만, 세상은 진짜 대화를 하지 않는다. 그는 진심을 원하지만, 세상은 역할을 교환할 뿐이다.
독일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 1858~1918)은 「대도시와 정신적 삶」(Die Großstädte und das Geistesleben, 1903)에서 근대 대도시의 인간 관계를 분석했다. 대도시에서 사람들은 너무 많은 자극과 너무 많은 관계에 노출되기 때문에 감각을 둔화시키는 방어 기제를 발달시킨다는 것이다. 무관심, 냉담, 역할적 관계. 그것이 도시인의 생존 전략이다. 홀든이 만나는 모든 phonies는 사실 이 도시적 방어 기제를 체화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나쁜 사람들이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그들의 생존 방식이기 때문이다.
홀든은 이 방어 기제를 갖추지 못했다. 그것이 그를 고통스럽게 하고, 동시에 그를 특별하게 만든다. 둔감해지지 않은 것이 그의 병이자 그의 인간성이다.
7. 안트롭의 오리들 — 사라지는 것들의 철학
홀든이 뉴욕에서 여러 사람에게 묻는 질문이 있다. "겨울에 센트럴파크 호수의 오리들은 어디로 가나요?" 그는 진지하게 이것을 알고 싶어 한다.
이 질문이 우스워 보이지만, 사실 깊은 함의가 있다.
겨울이 되면 호수가 언다. 오리들이 있던 자리가 사라진다. 오리들은 어디로 갔는가. 누가 그들을 챙겨주는가.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홀든이 진짜 묻는 것은 오리가 아니다. 그는 사라지는 것들이 어디로 가는지 묻고 있다. 죽은 앨리는 어디로 갔는가. 순수한 것들이 사라지면 어디로 가는가. 세상이 얼어붙었을 때 연약한 것들은 누가 지켜주는가.
이 물음은 신정론(theodicy)의 물음이기도 하다.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는 이 세계가 신이 만들 수 있는 최선의 세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캉디드』(Candide, 1759)에서 이것을 냉정하게 비웃었다. 최선의 세계에서 아이들은 왜 죽고, 오리들은 왜 혼자 추위를 견뎌야 하는가.
홀든은 볼테르처럼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않는다. 그는 그냥 묻는다. 오리들은 어디 갔어요? 그 물음 안에 신학도 있고, 윤리도 있고, 슬픔도 있다.
8. 피비의 회전목마 — 돌아오는 것과 떠나는 것
소설의 후반, 홀든은 피비에게 서쪽으로 도망가겠다고 말한다. 혼자서. 카우보이가 되겠다는 식의 이야기다. 피비는 자기도 데려가라고 한다. 홀든은 거절한다.
그들은 센트럴파크로 간다. 피비가 회전목마를 타고 싶다고 한다. 홀든은 비를 맞으며 벤치에 앉아 피비가 회전목마를 타는 것을 지켜본다. 그는 갑자기 너무 행복한 나머지 울음이 날 것 같다고 말한다.
왜 이 장면에서 홀든은 행복해지는가.
회전목마는 돌고 돌아 제자리로 온다. 어디로 가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위에서 황금 고리를 잡으려고 몸을 뻗는다. 잡을 수도 있고 못 잡을 수도 있다. 홀든은 깨닫는다. 아이들이 황금 고리를 잡으려 할 때 어른은 막을 수 없다고. 막으면 안 된다고. 그냥 보아야 한다고.
이것은 홀든의 작은 성장이다. 파수꾼이 되어 모든 아이를 낭떠러지에서 붙잡겠다는 꿈이, 아이들의 자유를 지켜보는 것으로 바뀐다. 보호에서 존중으로. 통제에서 목격으로.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W.F. Hegel, 1770~1831)은 변증법(dialectic)에서 모순이 더 높은 합(Aufhebung)으로 지양된다고 했다. 홀든의 이 순간은 작은 변증법적 지양이다. 세상을 혐오하고 도망치려 했던 홀든이, 세상 안에서 사랑하는 것을 바라보는 존재로 잠시 변한다. 소설이 끝으로 치달을 때, 그는 도망치지 않기로 한다.
9. 분석받는 홀든 — 언어와 치료의 한계
소설은 홀든이 정신과 요양원에서 이야기를 서술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즉 우리가 읽는 이 이야기 전체가 이미 과거 회상이고, 그는 이미 어딘가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이 액자 구조가 의미심장하다. 홀든의 이야기, 그 모든 혼란과 분노와 슬픔이, 결국 "정상화"가 필요한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사회는 홀든의 저항을 이해하지 않는다. 그것을 병으로 분류하고 치료한다.
미셸 푸코는 『광기의 역사』(Histoire de la folie à l'âge classique, 1961)에서 정신 의학이 사회적 규범에 맞지 않는 자들을 통제하는 장치로 기능해왔다고 분석했다. 광인(madman)의 범주는 진단의 범주가 아니라 권력의 범주라는 것이다. 홀든이 요양원에 있다는 사실은 이 푸코적 독해를 자연스럽게 불러온다. 그는 병든 것인가, 아니면 사회에 맞지 않는 것인가.
물론 홀든이 완전히 건강한 것은 아니다. 그는 실제로 고통받고 있다. 그러나 그 고통의 원인이 그에게만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를 둘러싼 세계에도 있는 것인지—소설은 그 판단을 독자에게 미룬다.
"나한테 아무것도 묻지 마세요.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앞으로 뭘 할 거냐고도 묻지 마세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이 마지막 말 속에서 홀든은 여전히 답을 내리지 않는다. 확실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불확실성이 정직함이다.
10. 지금 여기서 — 홀든들의 시대
『호밀밭의 파수꾼』이 출판된 지 70년이 넘었다. 그러나 홀든의 언어는 지금도 유효하다.
지금 시대의 SNS는 phony의 전시장이다. 사람들은 먹지도 않을 음식을 사진 찍고, 가지도 않을 여행을 계획하고, 느끼지도 않을 행복을 연출한다. '좋아요'의 숫자가 자존감이 된다. 팔로워 수가 사회적 가치가 된다. 홀든이 살아 있다면 스마트폰을 가장 먼저 집어던졌을 것이다.
그러나 홀든의 문제의식은 SNS를 비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더 깊은 물음이 있다. 진정성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역할을 연기하며 사는가. 그 연기 뒤에 무엇이 있는가.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발견한 것처럼, 인간은 사회 없이 살 수 없다. 그러나 사회 안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도 인간이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홀든처럼 어색하게 서 있는 것이 인간의 조건일지도 모른다.
가끔 phony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딘가에는 진짜가 있다고 믿는 것. 회전목마를 타는 피비를 비 맞으며 바라보면서 갑자기 울음이 날 만큼 행복해지는 것. 그것이 홀든이 우리에게 남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