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첫 문장은 문학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자기소개 중 하나다. 화자는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병인지도 확실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치료하기를 거부한다. 오기(傲氣)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오기가 진짜인지도 확신하지 못한다. 독자는 첫 페이지부터 이 인물이 무한한 자기모순의 미로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느낀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evsky, 1821~1881)가 1864년 발표한 『지하로부터의 수기』(Записки из подполья)는 소설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짧고, 서사적 사건이 거의 없다. 1부는 지하인(地下人, the Underground Man)의 독백으로만 이루어진다. 2부에서야 과거의 에피소드 몇 가지가 등장하지만, 그것들도 결국 독백의 재료일 뿐이다.
그런데 이 얇은 책이 19세기 이후 서양 철학과 문학의 방향을 바꾸었다. 실존주의, 허무주의, 심리주의 소설의 원형이 여기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가 읽었고,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가 읽었으며,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가 읽었다. 그들이 씨름한 문제의 출발점이 이 지하실에 있었다.
지하인은 왜 그토록 중요한가. 그는 무언가를 새롭게 발명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근대적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이미 있었지만 아무도 직시하지 않으려 했던 것을 끄집어낸 것이다.
2. 이성의 궁전을 거부하다 — 수정궁 비판
1860년대 러시아 지식인 사회는 낙관주의로 들끓고 있었다. 과학이 발전하고, 이성이 인간을 구원할 것이며, 합리적 이기심(rational egoism)에 기반한 사회를 설계하면 모든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Nikolai Chernyshevsky, 1828~1889)는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Что делать?, 1863)에서 이 이상을 구체적으로 그렸다. 합리적 사회공학이 실현된 미래, 그 상징이 수정궁(水晶宮, Crystal Palace)이었다.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를 위해 건설된 유리와 철골의 거대한 건물, 인간 이성과 기술의 승리를 상징하는 그것.
도스토옙스키는 이 낙관주의를 정면으로 공격하기 위해 지하인을 창조했다. 그리고 지하인은 수정궁을 이렇게 거부한다.
"수정궁에 혓바닥을 내밀고 싶다."
이 한 문장은 당시 러시아 진보주의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지하인의 논리는 이렇다. 인간이 완전히 합리적인 존재라면, 그래서 진정한 이익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그것을 추구하는 존재라면, 인간은 계산표처럼 작동하는 기계가 된다. 2더하기 2는 4다. 항상, 반드시, 예외 없이.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는 어디 있는가.
지하인의 가장 중요한 주장이 여기서 나온다. 인간은 자신에게 이로운 것만을 원하지 않는다. 때로 인간은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의도적으로 선택한다. 왜냐하면 그 선택 자체가 자신이 자유롭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계산된 이익이 아니라 자의(自意, 즉 свое хотение, 자기 자신의 욕구)야말로 인간의 가장 귀한 소유물이다.
이 논리를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언어로 번역하면 흥미롭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1788)에서 인간을 자율적 존재로 정의했다. 자율(autonomy)이란 외부의 강제가 아니라 스스로 세운 법칙에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지하인이 보기에, 합리적 이익 계산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결국 자연 법칙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그 계산 자체를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이다. 2더하기 2가 5라고 우길 수 있는 자유.
3. 원한의 철학 — 르상티망의 해부
지하인은 40세다. 하급 관리직에서 퇴직한, 사회적으로 아무런 위치도 없는 인물. 그는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 앞에서 굴욕을 당하고, 그 굴욕을 되갚지 못하며, 그 분노를 자기 자신에게 돌린다.
이 심리 구조를 니체는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1887)에서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는 개념으로 분석했다. 르상티망은 단순한 원한이나 복수심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행동할 수 없는 약자가 강자에 대해 품는 복합적 감정이다. 직접적인 복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감정은 내면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 내면화 과정에서 가치의 전도가 일어난다. 강자가 가진 것은 나쁜 것이고, 약자가 가진 것은 좋은 것이라는 논리. 힘, 건강, 자신감은 천박하고, 고통, 병약함, 자기비하는 고귀하다는 역설적 도덕.
지하인이 정확히 이 패턴을 보인다. 그는 자신이 굴욕을 당할 때, 그 굴욕에 맞서지 않는다. 대신 그 굴욕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그것을 느끼는 자신의 민감함이 오히려 우월함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두꺼운 피부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자들보다, 아프게 느끼는 자신이 더 고등한 존재라고. 이것은 자기위로인 동시에 자기기만이다.
니체는 이 르상티망을 극복하지 못한 인간을 비판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좀 더 복잡한 입장에 서 있다. 지하인은 자신의 르상티망을 의식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다. 그리고 바로 그 자의식이 그를 더 깊은 함정으로 밀어 넣는다.
4. 과잉의식의 함정 — 생각이 너무 많아서 아무것도 못 한다
지하인 스스로의 진단이 있다. "지나치게 의식적인 것(сознание, consciousness)이 병이다." 그는 어떤 행동을 하려 할 때, 그 행동의 동기를 분석하고, 그 분석의 결과를 또 분석하며, 그 분석이 또 다른 분석을 낳는 무한 후퇴에 빠진다. 자신이 굴욕을 당했을 때 복수하려 한다. 그런데 복수하려는 그 욕구는 과연 정당한가. 복수가 정당하다고 느끼는 이 감각은 어디서 오는가. 자연 법칙에서 오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선택인가, 아니면 그냥 반사적 반응인가.
이 무한한 자기분석을 헤겔(G.W.F. Hegel, 1770~1831)의 개념으로 읽으면 흥미롭다. 헤겔은 『정신현상학』(Phänomenologie des Geistes, 1807)에서 자기의식(Selbstbewusstsein)의 발전을 추적했다. 인간 정신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 반성하는 능력을 가지며, 이 능력이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는 특성이다. 그런데 지하인의 경우, 이 자기반성이 끝없이 자기 자신을 먹는 우로보로스(Ouroboros)처럼 작동한다. 자기의식이 너무 발달한 나머지, 어떤 행동도 순수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과잉분석(overthinking) 또는 반추(rumination)라고 부른다. 우울증의 핵심 증상 중 하나이기도 하다. 특히 지성이 높은 사람들에게서 자주 나타난다. 생각이 행동을 막는 것이다. 지하인은 가장 명석한 자들이 왜 가장 불행한지를 보여주는 극단적 사례다.
도스토옙스키 자신도 이 함정을 잘 알았다. 그는 간질 발작을 앓았고, 강박적 도박벽이 있었으며, 시베리아 유형을 경험했다. 지하인은 작가 자신의 어두운 거울이었다.
5. 리자와의 만남 — 타자와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자아
소설의 2부에서 지하인은 과거를 회상한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에피소드는 리자(Liza)와의 만남이다.
우연한 사정으로 지하인은 매음굴에서 젊은 창녀 리자를 만난다. 그는 그녀에게 열변을 토한다. 지금 이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어떻게 살아야 진정한 삶인지. 리자는 그의 말에 감동받아 변화를 결심하고, 그의 주소를 받아 며칠 후 그를 찾아온다.
그런데 지하인의 반응은 충격적이다. 그는 그녀를 따뜻하게 맞이하는 대신 잔인하게 대한다. 자신이 그녀에게 한 말은 다 연극이었다고 선언한다. 감동적인 연설을 통해 그녀를 지배하는 쾌감을 즐겼을 뿐이라고. 그는 도움을 받으러 온 사람을 짓밟는다.
왜인가. 지하인은 스스로 분석한다. 리자가 나타난 것 자체가 그에게 굴욕이었다. 자신이 진심이 아닌 연설로 누군가를 감동시켰다는 것, 그 연설에 실제로 감동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지금 자신에게 진심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그의 통제를 벗어났다. 그래서 그는 공격한다.
이것은 장 폴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 1943)에서 분석한 대타존재(être-pour-autrui)의 문제와 정확히 맞닿는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타자의 시선은 나를 대상화한다. 내가 자유로운 주체라는 자의식은 타자의 시선 앞에서 흔들린다. 타자는 나를 그의 세계 안의 하나의 물건으로 만들려 한다. 따라서 타자와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갈등적이다. "타인은 지옥이다(L'enfer c'est les autres)." 지하인은 이 지옥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6. 자유와 책임 — 도스토옙스키의 신학적 도박
도스토옙스키는 기독교 신자였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단순하지 않았다. 그는 의심을 통해 신앙에 도달한 사람이었고, 인간의 자유가 왜 신의 섭리와 공존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물었다.
지하인의 자유의지 주장은 이 신학적 문제와 연결된다. 도스토옙스키가 보기에, 합리주의적 사회공학이 틀린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완전히 예측 가능하고 계산 가능한 존재라면, 그 인간은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없다. 악을 행했을 때 그것은 그의 책임이 아니라 환경의 책임, 조건의 책임이 된다. 이것은 도스토옙스키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이었다.
자유의지가 있어야 책임이 있고, 책임이 있어야 죄가 있으며, 죄가 있어야 용서와 구원이 의미를 갖는다. 이것이 도스토옙스키의 신학적 직관이다. 따라서 지하인의 자유의지 주장은 단순히 반사회적 오기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도덕적 책임 능력에 대한 역설적 주장이다.
이 점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칸트와 다시 만난다. 칸트는 인간의 도덕적 존엄성이 자유의지에서 온다고 보았다.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 자체로 대우받아야 한다. 지하인은 이 칸트적 인간관을 극단까지 밀고 간 것이다. 그 결과는 처참하지만, 출발점의 직관은 옳다.
7. 실존주의의 새벽 — 지하인이 열어놓은 문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은 『지하로부터의 수기』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는 명제로 실존주의를 정의했다. 인간은 미리 정해진 본질이나 목적 없이 먼저 존재하고, 그 존재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간다. 이것은 정확히 지하인이 살고 있는 조건이다. 그는 미리 주어진 역할도, 의미도, 목적도 없다. 그는 자기 자신을 선택해야 하는데, 그 선택의 자유가 그를 마비시킨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1942)에서 부조리(absurde)의 개념을 제시했다. 의미를 갈구하는 인간과 침묵하는 세계 사이의 근본적 불일치, 그것이 부조리다. 지하인도 이 부조리 안에 있다. 그는 세계가 자신에게 응답해주기를 원한다. 자신의 고통이 인정받기를, 자신의 존재가 의미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세계는 응답하지 않는다.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는 『이것이냐 저것이냐』(Enten-Eller, 1843)에서 실존의 세 단계를 이야기했다. 미학적 단계, 윤리적 단계, 종교적 단계. 지하인은 미학적 단계에 갇혀 있다. 감각과 쾌락과 자기연출에 집착하지만, 그 집착이 공허함을 낳고, 그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더 극단적인 자기연출이 필요해지는 악순환. 키르케고르가 말한 절망(Verzweiflung)이 지하인의 존재 방식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실존주의적 조건을 철학적 논문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목소리로 형상화했다. 그것이 이 작품이 철학 논문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 이유다.
8. 언어와 자기기만 — 말하면서 스스로를 속이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독특한 서술 구조를 갖는다. 지하인은 글을 쓰면서 자신이 독자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독자를 의식하는 자신을 또 의식한다. 그래서 그는 계속 자신의 말을 취소하고, 정정하고, 반박한다.
"나는 지금 과시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실제로 과시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과시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또 과시의 일부인가?"
이 구조는 언어철학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를 제기한다. 오스틴(J.L. Austin, 1911~1960)은 『말과 행위』(How to Do Things with Words, 1962)에서 언어가 단순히 사실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수행한다는 언어행위론(speech act theory)을 제시했다. 지하인의 말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구성하고, 방어하고, 공격하는 행위다. 그가 말을 할수록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더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더 알 수 없게 된다.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 1895~1975)은 『도스토옙스키 시학의 문제』(Проблемы поэтики Достоевского, 1929)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기법을 폴리포니(polyphony, 다성성)라고 불렀다. 저자의 목소리가 지배하는 단성(monophony) 소설과 달리,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는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완결된 목소리로 발언한다. 저자는 판단하지 않고 다양한 목소리가 충돌하게 놔둔다. 지하인의 독백은 바로 이 다성성의 극단적 형태다. 한 인물 안에서 여러 목소리가 충돌하고 있다.
9. 도스토옙스키의 답 — 지하로부터의 탈출은 가능한가
도스토옙스키는 지하인에게 동의하는가. 아니다.
소설의 말미에 지하인 스스로가 한계를 인정하는 순간이 있다. 리자를 짓밟고 나서, 그는 그녀를 쫓아가려는 충동을 느끼지만 결국 가지 않는다. 그리고 기록한다. "살아있는 삶(живая жизнь)이 나에게서 너무 익숙하지 않아 무서웠다." 그는 자신이 살아있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음을 안다.
도스토옙스키의 다른 소설들에서 해답의 단초가 보인다. 『죄와 벌』(Преступление и наказание, 1866)의 소냐는 지하인과 비교할 때 훨씬 더 열악한 조건에 있다. 매음굴의 창녀, 가난, 사회적 멸시. 그러나 그녀는 절망하지 않는다. 사랑과 공감의 능력이 그녀를 지탱한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Братья Карамазовы, 1880)의 알료샤는 지하인이 도달하지 못한 지점, 즉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의 실천을 보여준다.
도스토옙스키가 보기에, 지하인의 함정은 자아에의 과잉 집중이다. 자신의 자유, 자신의 존엄, 자신의 고통을 중심에 두는 한, 그 자아는 자기 자신을 갉아먹을 뿐이다. 탈출은 자아의 확장, 즉 타자를 향한 개방 속에 있다. 이것은 합리주의적 해결책이 아니다. 계산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합리적 이익 계산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10. 지금 여기서 — 우리 시대의 지하인들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쓰인 1864년 이후 세계는 기술적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그러나 지하인의 심리는 어디서나 발견된다.
소셜 미디어는 지하인의 지하실을 대규모로 공개했다.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일상을 올리면서 '좋아요'를 확인하고, 그 숫자에 자존감이 흔들리며, 자신의 진짜 감정과 전시된 감정 사이에서 분열되는 현대인. 댓글창에서 낯선 사람에게 분노를 퍼붓는 사람들. 자신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공들여 서술하는 글을 쓰는 사람들. 그들은 모두 지하인의 후손이다.
수정궁의 후손들도 건재하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이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고 최적화한다. 넷플릭스는 당신이 다음에 무엇을 볼지 안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당신이 무엇을 클릭할지 안다. 이 예측이 정확해질수록, 인간은 더 편리해지지만 더 예측 가능한 존재가 된다. 지하인이 두려워했던 계산표 인간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지하인의 저항은 여전히 유효한가. 의미 없는 일탈을 통해 자신이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충동. 그것은 유치하지만, 그 유치함 안에 무언가 진실이 있다. 인간은 최적화될 수 없다. 인간의 욕망은 합리적 계산을 초과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초과가 인간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초과를 가장 정직하게 살아낸 인물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하실에서 아무도 읽지 않을 수기를 쓰고 있는 그 병든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