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한 남자의 말로 시작한다. 어느 공공장소에서 한 남자가 화자에게 다가와 말한다. "저는 당신을 항상 알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당신이 젊었을 때 아름다웠다고 말하지요. 저는 지금의 황폐해진 얼굴이, 젊은 시절의 얼굴보다 더 좋다고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이상한 문장이다. 보통 회고는 잃어버린 젊음을 그리워하면서 시작한다. 그러나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정반대로 시작한다. 망가진 얼굴이 진실하다고. 진실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간이 지나면서 표면 아래 있던 무언가가 위로 올라온다는 것이다. 평탄한 피부 아래 감춰져 있던 균열, 가면 아래 숨어 있던 진짜 얼굴이.
『연인』은 이 황폐해진 얼굴에서 출발해서, 그 얼굴 아래 묻혀 있던 한 소녀의 이야기를 발굴해낸다. 1929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사이공으로 가는 메콩강의 페리 위에서 한 백인 소녀가 있었다. 열다섯 살 반. 검은 펠트 모자에 금끈이 달린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페리 위에 한 부유한 중국인 남자가 있었다. 스물일곱 안팎. 검은 리무진. 이 두 사람의 만남이 한 권의 책이 된다.
하지만 그 책은 단순한 연애담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과 식민과 기억과 글쓰기에 관한 철학적 명상이다. 어떻게 한 인간의 가장 사적인 경험이 시대 전체의 진실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잊혀진 것이 가장 깊이 기억되는가. 어떻게 쓸 수 없는 것을 써야 하는가.
뒤라스는 1984년 일흔 살에 이 책을 써서 공쿠르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 책의 진짜 시작은 그보다 55년 전, 메콩강의 그 페리 위였다.
━━━━━━━━━━━━━━━━━━━━━━━━━━━━━━━━━━━━━━━━
2. 사이공으로 가는 페리 — 식민지의 비대칭
장면을 다시 보자. 1929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한 가난한 백인 소녀가 메콩강을 건너는 페리 위에 서 있다. 어머니는 거의 미친 것 같고, 큰오빠는 폭력적이고, 가족의 재산은 무능한 어머니의 부동산 투자로 모두 날아갔다. 그녀는 사이공의 기숙학교로 가는 길이다.
같은 페리에 검은 리무진을 탄 중국인 남자가 있다. 그의 아버지는 인도차이나의 부유한 화교 자본가다. 그는 파리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가 차에서 내려 그녀에게 다가간다. 담배를 권한다. 손이 떨린다.
이 만남은 식민지적 위계의 기묘한 역전이다. 식민 본국 출신인 백인이지만 그녀의 가족은 가난하다. 피지배 민족인 중국인이지만 그는 부자다. 그녀의 백인성은 상징 자본이지만, 그녀의 가난은 그것을 무력화한다. 그의 부는 경제 자본이지만, 그의 인종은 그를 결혼 상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다. 그의 아버지는 절대로 그가 백인 소녀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가족은 절대로 그를 사위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둘 다 서로를 욕망한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1935~2003)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1978)에서 서구가 동양을 '여성적이고 수동적이며 신비로운 타자'로 구성했다고 분석했다. 동양은 서구 남성의 욕망의 대상이지, 욕망의 주체가 아니다. 그러나 뒤라스의 소설은 이 도식을 부분적으로 뒤집는다. 욕망의 주체는 누구인가. 페리 위에서 먼저 시선을 보낸 것은 중국인 남자다. 그러나 그를 침대로 데려가기로 결정하는 것은 백인 소녀다. 그를 흐느끼게 하는 것도, 그를 절망에 빠뜨리는 것도, 결국 그를 떠나는 것도 그녀다.
식민지의 권력 구조는 인종·계급·성별·자본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단일한 위계로 환원되지 않는다. 호미 바바(Homi Bhabha, 1949~)가 『문화의 위치』(The Location of Culture, 1994)에서 말한 양가성(ambivalence)이 식민지적 욕망을 지배한다. 지배자는 피지배자를 멸시하면서 욕망하고, 피지배자는 지배자를 모방하면서 거부한다. 이 양가성의 한복판에서 뒤라스의 두 연인은 서로를 발견한다.
━━━━━━━━━━━━━━━━━━━━━━━━━━━━━━━━━━━━━━━━
3. 찍히지 않은 사진 — 부재가 더 진실하다
『연인』 전체를 관통하는 이미지가 하나 있다. 페리 위의 그 소녀. 검은 펠트 모자, 금끈 신발, 어른스러운 화장. 뒤라스는 이 이미지를 거듭 묘사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이것이다. 그 사진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도 찍지 않았다. 그날 페리 위에 카메라는 없었다. 그 이미지는 오직 기억 속에만, 그리고 글 속에만 존재한다.
뒤라스는 쓴다. 그 이미지는 분리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로 떨어져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사진으로 찍히지 않았기 때문에, 사진으로 찍힐 수도 있었던 다른 모든 이미지들과 함께 그것은 사라질 수 있었다. 그런데 사라지지 않았다.
이 역설은 깊다. 사진으로 찍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미지는 변형되지도, 시간에 의해 마모되지도 않았다. 그것은 현실의 흔적이 아니라 절대적 이미지로 보존되었다. 사진은 시간을 멈춤으로써 그 시간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찍히지 않은 이미지는 시간 안에서 계속 살아남는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는 『카메라 루시다』(La chambre claire, 1980)에서 사진을 분석하면서 두 개념을 제시했다.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 스투디움은 사진의 일반적 정보, 문화적 맥락이다. 푼크툼은 그 사진에서 우리를 찌르는 어떤 디테일, 의도되지 않은 진실의 순간이다.
바르트는 어머니의 어린 시절 사진을 두고 깊은 사색을 펼친다. 그 사진을 보면서 그는 어머니의 본질을 발견했다고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사진은 그녀의 죽음을 증명한다. '그것이-있었다(ça-a-été)'는 사진의 본질이지만, 그 '있었음'은 곧 '더 이상 없음'이기 때문이다.
뒤라스의 페리 이미지는 이 바르트적 사진학을 거꾸로 뒤집는다. 그것은 사진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을 증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글쓰기 안에서만 존재하므로, 글쓰기가 계속되는 한 살아 있다. 그리고 그것은 푼크툼만으로, 즉 디테일의 진실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검은 모자, 금끈 신발, 페리의 햇빛, 강물의 색깔. 이 디테일들이 한 시대를, 한 식민지를, 한 가족을, 한 사랑을 응축한다.
찍히지 않은 사진이 가장 진실한 사진이다. 글쓰기는 그 사진을 구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
4. 어머니의 검은 태양 — 멜랑콜리의 유산
『연인』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인가. 표면적으로는 화자인 소녀와 그녀의 중국인 연인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어른거리는 인물이 있다. 어머니다.
어머니는 가난한 시골 출신의 프랑스 여자였다. 식민지의 교사가 되어 인도차이나로 왔다. 남편을 일찍 잃고 세 자녀를 키웠다. 그리고 평생 모은 돈을 메콩강 하구의 농지에 투자했다가 모두 잃었다. 그 농지는 매년 바닷물이 들어와서 농사가 되지 않는 땅이었다. 식민지 행정의 부패가 그녀에게 그 쓸모없는 땅을 팔았다. 그녀는 평생 둑을 쌓아 바닷물을 막으려 했지만,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
이 어머니는 미쳐 있다. 그녀의 광기는 폭발적이지 않다. 그것은 깊은 우울이다. 그녀는 큰아들을 광적으로 사랑하고, 그 큰아들은 어머니의 돈을 도박과 아편에 쓴다. 그녀는 작은 딸과 작은 아들을 거의 보지 못한다. 그녀의 사랑은 비대칭적이고 파괴적이다.
쥘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1941~)는 『검은 태양: 우울증과 멜랑콜리』(Soleil noir: Dépression et mélancolie, 1987)에서 멜랑콜리의 핵심을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찾았다. 멜랑콜리커는 어머니라는 첫 사랑의 대상의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이다. 그 상실은 무의식 안에 동결되어 있고, 모든 후속 관계는 이 동결된 상실의 그림자 아래 놓인다. 검은 태양은 그 동결된 상실이 한 사람의 삶 위에 드리우는 빛이다. 빛이지만 어두운 빛.
이것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가 「애도와 멜랑콜리」(Trauer und Melancholie, 1917)에서 제시한 도식의 발전이다. 애도는 상실의 대상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대상으로 리비도를 옮기는 작업이다. 멜랑콜리는 이 작업이 실패하고, 상실의 대상을 자아 안에 동결시켜 버리는 병리다. 멜랑콜리커는 잃어버린 것을 자기 자신 안에 가두고, 그 가둠 때문에 자기 자신을 공격한다.
뒤라스의 화자는 어머니를 잃지 않았다. 어머니는 살아 있고, 같은 집에 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미 떠났다. 그녀의 사랑은 큰아들에게 갔고, 큰아들은 그것을 파괴하고 있다. 화자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어머니를 사랑한다. 이것이 그녀의 멜랑콜리의 원천이다.
중국인 연인은 이 어머니의 부재를 메우려는 시도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어머니의 사랑이 실재한 적 없는데, 어떻게 그 부재를 메울 수 있는가. 화자가 중국인 연인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거듭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랑은 그녀에게 가능한 감정이 아니다. 그녀가 배운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부재다.
그리고 글쓰기가 시작된다. 크리스테바는 말한다. 멜랑콜리에서 빠져나오는 한 길은 상징화, 즉 글쓰기다. 잃어버린 것을 언어로 가두고, 그 언어를 통해 상실을 견뎌내는 것. 『연인』은 어머니에게 바쳐진 책이다. 비록 그 어머니가 화자를 충분히 사랑한 적 없을지라도.
━━━━━━━━━━━━━━━━━━━━━━━━━━━━━━━━━━━━━━━━
5. 식민지의 두 몸 — 인종화된 욕망
15세의 백인 소녀가 27세의 중국인 남자와 잠자리를 가진다. 1929년의 식민지 인도차이나에서. 이 사실 하나로 소설은 1984년 출간 당시에도 충격적이었고, 지금은 더욱 그렇다. 미성년자, 인종간 관계, 식민지적 권력 비대칭. 이 모든 것이 한 장면 안에 응축되어 있다.
프란츠 파농(Frantz Fanon, 1925~1961)은 『검은 피부, 하얀 가면』(Peau noire, masques blancs, 1952)에서 식민지의 인종화된 욕망을 분석했다. 식민지에서 흑인 남자가 백인 여자를 욕망하는 것은 단순한 개인적 끌림이 아니다. 그것은 백인성을 통해 자신의 흑인성을 부정하려는 시도다. 그리고 백인 여자가 흑인 남자를 욕망하는 것 역시 단순한 개인적 끌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백인성에 대한 위반이고, 그 위반의 짜릿함이다.
파농의 분석은 흑인-백인 관계에 집중되어 있지만, 그 구조는 다른 식민지적 인종 관계에도 적용된다. 뒤라스의 소설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인종을 의식한다. 중국인 남자는 그녀가 백인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화자는 자신이 백인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서 사랑하는 거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두 진술이 모두 진실이고 모두 거짓이다. 식민지의 두 몸은 인종에 의해 구성되었으면서도, 인종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것이 그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권력은 균등하지 않다. 그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돈, 보호, 욕망의 충족이다. 그녀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백인성이라는 상징적 위신, 그리고 결코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약속이다. 그가 결혼할 수 없는 사람을 그가 사랑한다. 그녀는 그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 비대칭이 두 사람의 관계를 지탱한다.
호미 바바의 식민지적 양가성 개념을 다시 생각해보자. 식민지는 단순한 지배-피지배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욕망과 거부, 모방과 차이가 끊임없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뒤라스의 화자는 프랑스 식민자의 딸이지만, 동시에 식민지에서 자란 사람이다. 그녀의 모국어는 프랑스어지만, 그녀가 사는 거리는 베트남어가 들리는 거리다. 그녀는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 중국인 연인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부유한 화교지만, 백인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베트남 사회에서는 외부자다. 두 사람은 모두 식민지의 내부 망명자다. 그래서 그들은 만난다.
━━━━━━━━━━━━━━━━━━━━━━━━━━━━━━━━━━━━━━━━
6. 위반의 강도 — 바타유와 보부아르 사이
15세 소녀가 능동적으로 욕망하고, 능동적으로 침대를 결정하고, 능동적으로 떠난다. 이것이 『연인』이 1984년에도 충격이었던 진짜 이유다. 여성의 능동적 성욕망, 그것도 미성년 소녀의.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1897~1962)는 『에로티즘』(L'Érotisme, 1957)에서 에로티즘을 위반(transgression)의 경험으로 정의했다. 사회는 금기(taboo)를 통해 유지된다. 살인, 근친상간, 특정 성행위 등이 금기로 설정되고, 그 금기가 사회적 질서의 토대가 된다. 그러나 인간은 이 금기를 위반함으로써만 자신의 한계 너머로 나아갈 수 있다. 위반은 금기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보존하면서 넘는 것이다. 에로티즘은 죽음과 가까이 있고, 신성한 것과 가까이 있다.
뒤라스의 소녀가 중국인 연인의 침대로 갈 때, 그녀는 여러 금기를 동시에 위반한다. 인종간 금기, 미성년자에게 부과된 금기, 가족에게 숨겨야 한다는 금기, 결혼하지 않은 자의 금기. 이 다중적 위반이 그녀의 경험에 강도를 부여한다. 바타유의 용어로 말하면, 그녀는 그 위반을 통해 일상적 자아의 한계를 넘는다.
그러나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는 『제2의 성』(Le Deuxième Sexe, 1949)에서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여성의 성적 경험은 가부장제 안에서 항상 양가적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자기 발견과 해방의 경험이 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자기 대상화의 경험이 될 수도 있다. 여성은 욕망의 대상이 됨으로써 비로소 자신을 인지하도록 사회화되어 왔기 때문이다.
뒤라스의 화자는 이 양가성 안에 있다. 그녀는 능동적이지만, 그녀의 능동성은 '남자가 나를 욕망한다'는 사실을 통해서만 인식된다. 그녀는 자유롭지만, 그 자유는 가난한 백인 소녀가 부유한 중국인의 후원을 받는 형태로 실현된다. 그녀의 욕망은 진짜이지만, 그 욕망의 구조는 그녀가 만든 것이 아니다.
보부아르의 분석을 따르면, 진정한 해방은 여성이 욕망의 주체이자 대상으로 동시에 인지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뒤라스의 소녀는 그 경계를 위태롭게 걷는다. 그래서 이 소설이 페미니즘적이면서도 동시에 페미니즘적이지 않다고 읽힐 수 있는 것이다.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이 소설을 여성 욕망의 해방으로 읽고,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이 소설을 식민지적 자기 대상화의 무비판적 미화로 비판한다. 두 독해 모두 텍스트 안에 근거가 있다. 그리고 이 양가성을 인정하는 것이, 텍스트를 정직하게 읽는 첫걸음이다.
━━━━━━━━━━━━━━━━━━━━━━━━━━━━━━━━━━━━━━━━
7.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욕망한다 — 라캉의 결핍
중국인 연인은 자주 운다. 화자는 거의 울지 않는다. 그가 운다는 사실이 그녀를 그에게서 밀어내면서 동시에 그에게 묶어둔다. 이 역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의 욕망 이론이 여기 도움을 준다. 라캉은 욕망(désir)이 욕구(besoin)나 요구(demande)와 다르다고 주장했다. 욕구는 생물학적 필요다. 요구는 그 필요가 언어로 표현된 것이다. 그러나 욕구가 언어 안에 들어오는 순간, 거기에는 항상 잉여가 발생한다. 사랑받고 싶다는 요구는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어떤 사랑도 충분하지 않다. 욕망은 이 영원한 잉여의 자리, 결코 채워지지 않는 자리다.
욕망의 대상은 라캉이 '대상 a(objet petit a)'라고 부른 것이다. 그것은 실제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의 자리에 있는 어떤 환영적 결핍이다. 우리는 대상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안에서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어떤 것을 욕망한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것은 결코 회복되지 않는다.
뒤라스의 두 연인은 라캉적 욕망의 교과서적 사례다. 중국인 연인은 화자를 욕망한다. 그러나 그가 욕망하는 것은 화자라는 한 인격이 아니라, 화자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만들어내는 결핍이다. 그녀가 그를 사랑한다면, 그의 욕망은 만족되고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욕망은 영원히 만족되지 않고, 영원히 그를 그녀에게 묶어둔다.
화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가 그를 욕망하는 것은 그가 그녀를 욕망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의 욕망의 대상이 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러나 그녀가 그를 사랑하게 되면, 그녀는 자신의 욕망의 자리를 잃는다. 그래서 그녀는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욕망의 구조를 유지한다.
이것이 두 사람의 관계가 왜 그렇게 강렬했고 동시에 왜 그렇게 단명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한다. 욕망의 구조는 결핍을 필요로 한다. 결핍이 채워지면 욕망은 사라진다. 그래서 둘은 헤어진다. 그래야 욕망이 보존되기 때문이다.
수십 년이 지난 어느 날, 노년의 뒤라스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고 한다. 수화기 너머의 남자는 자신이 그녀를 평생 사랑했다고 말한다. 그 남자가 바로 그 중국인 연인이었다. 50여 년의 결핍이 그의 욕망을 증류시켜 평생의 사랑으로 만들었다. 라캉의 도식이 정확히 작동한 셈이다. 만족되지 않는 욕망만이 영원하다.
━━━━━━━━━━━━━━━━━━━━━━━━━━━━━━━━━━━━━━━━
8. 흐르는 글쓰기 — 식수와 블랑쇼의 형식 실험
『연인』의 문장은 이상하다. 시제가 자주 흔들린다. 1인칭과 3인칭이 같은 단락 안에서 교차한다. 사건은 시간 순서대로 서술되지 않고, 같은 장면이 여러 번 다른 각도에서 묘사된다. 이것은 미숙한 글쓰기가 아니다. 의도된 형식이다.
뒤라스 자신은 이 스타일을 '흐르는 글쓰기(écriture courante)'라고 불렀다. 흘러가는, 통제되지 않는, 그러나 동시에 정확한 글쓰기. 의식의 흐름과는 다르다. 의식의 흐름은 한 의식의 내적 독백이다. 뒤라스의 글쓰기는 여러 시간, 여러 시점, 여러 목소리가 동시에 흘러가는 텍스트다.
이런 글쓰기를 이론화한 것이 엘렌 식수(Hélène Cixous, 1937~)다. 그녀는 「메두사의 웃음」(Le Rire de la Méduse, 1975)에서 '여성적 글쓰기(écriture féminine)'를 제안했다. 가부장적 언어는 직선적이고, 위계적이며, 명료한 의미를 향해 나아간다. 여성적 글쓰기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신체의 리듬과 가깝고, 기존의 문법을 위반하며, 의미의 다중성을 받아들인다.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는 본질주의로 비판받기도 했다. 모든 여성이 그렇게 쓴다는 말이 아니고, 모든 남성이 직선적으로 쓴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가부장적 언어 질서에 대한 대항적 글쓰기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뒤라스의 글쓰기는 이 의미에서 식수적이다. 그것은 통제되지 않는 정동, 신체의 기억, 시간의 비선형성을 텍스트 안으로 끌어들인다.
또 다른 참조점은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2003)의 『카오스의 글쓰기』(L'Écriture du désastre, 1980)다. 블랑쇼는 어떤 경험들은 직접적으로 서술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트라우마, 죽음, 절대적 상실 같은 경험들. 이런 경험들은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다. 그러나 글쓰기는 그 도달할 수 없는 것을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한다. 도달하지 못함을 통해 도달하는 것. 침묵을 통해 말하는 것.
『연인』의 파편적 형식은 이 블랑쇼적 도전이다. 식민지 어린 소녀의 경험은 직접적 서술로는 잡히지 않는다. 가족의 폭력과 어머니의 광기와 첫사랑과 이별이 동시에 한 의식 안에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차례로 줄지어 쓸 수 있는가. 그래서 뒤라스는 시간을 부수고, 시점을 흔들고, 같은 장면을 다시 또 다시 쓴다. 이 부서진 형식 자체가, 잡힐 수 없는 진실을 잡으려는 시도다. 형식이 곧 철학이다.
━━━━━━━━━━━━━━━━━━━━━━━━━━━━━━━━━━━━━━━━
9. 자전과 허구 사이 — 진실의 다른 형식
『연인』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 허구인가. 뒤라스는 실제로 1929년 메콩강의 페리에서 한 중국인 남자를 만났다. 가족 구성도 일치한다. 그러나 디테일들은 변형되어 있다. 1991년 그녀는 『북중국에서 온 연인』(L'Amant de la Chine du Nord, 1991)이라는 책을 다시 써서, 같은 이야기를 다른 버전으로 제시했다. 어느 것이 진실인가.
이 질문은 자서전이라는 장르의 본질에 닿는다. 필리프 르죈(Philippe Lejeune, 1938~)은 『자서전의 협약』(Le Pacte autobiographique, 1975)에서 자서전을 정의하는 것이 사실의 정확성이 아니라 '협약(pacte)'이라고 주장했다. 작가가 독자에게 '이 글의 화자와 주인공과 작가는 같은 사람'이라고 약속하는 것. 이 약속이 자서전을 자서전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 협약은 명시적일 수도, 모호할 수도 있다. 1977년 세르주 두브로프스키(Serge Doubrovsky, 1928~2017)는 자신의 소설 『아들』(Fils, 1977)의 표지에 '자전적 허구(autofiction)'라는 새로운 장르명을 제안했다. 자서전의 진실 협약과 소설의 허구 협약을 동시에 작동시키는 글쓰기. 이것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작동한다.
『연인』은 이 자전적 허구의 정전이 되었다. 뒤라스는 이 책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고 명시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름들은 변형되어 있고, 시간은 압축되어 있고, 어떤 장면들은 분명히 재구성된 것이다. 독자는 이 책을 자서전으로 읽으면서 동시에 소설로 읽는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이중적 독해 안에서만, 한 사람의 진실에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진실은 사실의 정확성과 다르다. 사실은 외부에서 검증 가능한 것이지만, 진실은 한 인간이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살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외부에서 보면 그녀와 그 중국인 남자는 어쩌다 만나서 잠깐 사귀다가 헤어진 두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의 경험 안에서, 그것은 평생을 결정한 사건이었다. 자전적 허구는 이 내부의 진실을 외부의 사실보다 우선시하는 글쓰기 형식이다.
뒤라스가 같은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쓴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 번의 서술로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 같은 사건이 여러 번 다시 서술되어야 하고, 매번 다른 진실이 드러난다. 진실은 하나가 아니라 다층적이다. 그래서 뒤라스는 죽기 전까지 같은 어린 시절을 변주하면서 썼다. 그것이 그녀가 찾은 가장 진실한 글쓰기의 방식이었다.
━━━━━━━━━━━━━━━━━━━━━━━━━━━━━━━━━━━━━━━━
10. 지금 여기서 — 자기 서사의 시대, 폐허의 윤리
『연인』 출간 후 40년이 지났다. 뒤라스는 1996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 책이 제기한 문제들은 지금 우리에게 더 절실하다.
첫째, 자기 서사의 폭증이다. SNS와 블로그와 유튜브의 시대에, 모든 사람이 자기의 이야기를 한다. 누구나 자기 자서전의 작가다. 그러나 이 자기 서사들은 대체로 일관성과 매력을 위해 편집된다. 황폐해진 얼굴은 보정되어 사라지고, 진실의 디테일은 매끄러움으로 대체된다. 인스타그램의 셀카는 푼크툼이 제거된 사진이다. 뒤라스는 정반대를 보여준다. 글쓰기는 폐허를 더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지, 그것을 덮는 것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자기 서사는 뒤라스가 보여준 자기 서사의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졌다.
둘째, 한국에서의 자전적 글쓰기의 특별한 위치다. 한강(1970~)의 『흰』(2016)은 뒤라스적 글쓰기의 한국적 변주로 읽힌다. 파편적 문장, 시간의 비선형성, 죽음과 모성과 신체에 대한 명상. 한강은 뒤라스를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두 작가는 같은 계보 안에 있다. 김애란, 황정은, 박서련 등 현재 한국 문학의 중요한 여성 작가들 다수가 자전적 요소를 허구의 형식 안에서 작업한다. 이것은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라, 직선적 거대 서사가 신뢰를 잃은 시대에 진실에 도달하는 한 방법이다.
셋째, 식민지의 유산이다. 인도차이나 식민지는 끝났지만, 식민지적 욕망의 구조는 끝나지 않았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여전히 부유한 북반구와 가난한 남반구 사이의 비대칭을 작동시킨다. 한국은 이 도식 안에서 복잡한 위치에 있다. 한때 식민지였지만 지금은 부분적으로 식민자의 위치에 있기도 하다. K-팝, K-드라마의 글로벌 확산은 이 비대칭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낸다. 누가 누구를 욕망하고, 누가 그 욕망의 구조 안에서 누구를 대상화하는가.
넷째, 미투 이후의 독해 문제다. 15세 소녀와 27세 남자의 관계를 지금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미성년자 보호의 관점에서 이것은 명백한 권력 남용이다. 그러나 뒤라스 자신은 그 관계를 자신의 능동적 선택으로 회상한다. 둘 사이에 무엇이 진실인가. 어쩌면 둘 다 진실일 수 있다. 한 경험이 동시에 능동성과 착취일 수 있다. 이 복잡성을 단순화하는 것은 윤리적 정의가 아니다. 그러나 그 복잡성을 핑계로 권력 비대칭을 외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사유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황폐해진 얼굴이라는 이미지다. 우리는 매끄러움과 젊음을 강요받는 시대에 산다. 사진은 모두 보정되고, 늙음은 감춰진다. 그러나 뒤라스는 늙음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더 정확하게는, 늙음이 진실하다고 말한다. 평탄한 표면 아래 숨겨져 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표면 위로 올라온다. 그 진실은 아름답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다.
『연인』이 가르쳐주는 마지막 교훈이 여기 있다. 진실은 매끄러움 아래 있다. 글쓰기는 그 매끄러움을 깨고 그 아래로 내려가는 일이다. 폐허로 내려가는 일이다. 그리고 거기서, 사진으로 찍히지 않은 한 이미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