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날, 한 여자가 케임브리지 대학 잔디밭을 가로질러 걷다가 제지당한다. 잔디밭은 교수와 학자들만을 위한 것이다. 여자는 허락 없이 그 위를 걸을 수 없다. 그녀는 자갈길로 돌아간다.
같은 날, 그녀는 도서관 문 앞에서도 막힌다. 여성은 학교 구성원의 동행 없이, 혹은 추천장 없이는 입장할 수 없다. 문은 닫혀 있다.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가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 1929)의 첫 장면에서 묘사하는 이 두 장면은 단순한 일화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철학적 진단이다. 공간에서 배제된다는 것, 지식의 문 앞에서 멈춰야 한다는 것—이것이 여성의 지적 역사가 다른 방식으로 흘러온 이유다.
울프는 이 에세이를 강연 원고로 썼다. 1928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여자 칼리지 뉴넘(Newnham)과 거튼(Girton)에서 행한 두 차례 강연이 그 출발이었다. 청중은 바로 그 잔디밭에 들어갈 수 없었던 여학생들이었다. 울프의 말은 그들에게 건네는 것이었지만, 그 말은 훨씬 멀리까지 가닿았다.
핵심 명제는 간명하다. "여성이 소설을 쓰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명제의 단순함은 기만적이다. 그 안에는 공간, 경제, 젠더, 창조, 역사, 그리고 존재 자체에 관한 깊은 철학이 압축되어 있다.
2. 방이란 무엇인가 — 공간의 존재론
방 한 칸. 잠글 수 있는 문. 밖에서 들어오지 못하는 공간.
오늘날 이것은 당연한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울프가 살던 시대, 대부분의 여성에게 이것은 당연하지 않았다. 중산층 가정의 여성이라도 개인 공간을 갖는 것은 흔하지 않았다. 거실은 가족 공간이었고, 부엌은 노동 공간이었으며, 침실은 남편과 공유하는 공간이었다. 글을 쓰기 위해, 생각하기 위해, 혼자이기 위해 필요한 공간—그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문제를 철학적으로 번역하면, 그것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가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7)에서 논한 '세계-내-존재(In-der-Welt-sein)'의 문제와 연결된다. 인간은 추상적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언제나 어떤 구체적 장소에, 어떤 조건 속에 던져져 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느냐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규정한다.
울프의 '방'은 이 하이데거적 의미에서의 존재 조건이다. 방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불편하다는 뜻이 아니다. 방이 없다는 것은 특정한 종류의 존재 방식—사유하고, 창조하고, 자기 자신이 되는 방식—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는 『공간의 시학』(La Poétique de l'espace, 1957)에서 집과 방이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내면의 확장이라고 주장했다. 방은 꿈꾸는 장소이고, 상상이 발원하는 장소이며, 자아가 비로소 자신에게 돌아오는 장소다. 울프가 요구하는 방은 정확히 이 의미의 방이다. 창조적 자아가 살 수 있는 내면의 거처.
셰익스피어에게는 그 방이 있었다. 그의 누이, 울프가 '줄리엣 셰익스피어'라고 이름 붙인 가상의 인물—그에게는 없었다. 오빠와 똑같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오빠는 런던으로 가서 극장에서 일할 수 있었고, 누이는 집에 남아 결혼을 강요받았다. 결국 그 누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 줄도 쓰지 못하고 죽었다. 천재성은 방이 없으면 꽃피지 못한다.
3. 돈의 철학 — 경제적 종속과 정신의 자유
울프는 솔직하다. 추상적 자유를 이야기하기 전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조건을 먼저 말한다. 연 500파운드. 1929년의 이 액수는 오늘날로 치면 적지 않은 금액이다. 울프는 이 돈이 어디서 왔는지도 이야기한다. 그녀의 이모가 유산을 남겼다. 그 유산이 그녀를 자유롭게 했다.
"내가 유산을 받았다는 사실은 나를 남성의 권력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것은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가 『경제학-철학 수고』(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1844)에서 분석한 소외(Entfremdung) 개념과 연결된다. 경제적으로 타인에게 종속된 존재는 자신의 노동과 창조물로부터 소외된다. 자신의 글을 팔아야 살 수 있는 사람, 혹은 아예 글을 쓸 시간 자체가 없는 사람—그는 자신의 정신적 생산으로부터 분리된다.
울프의 시대 여성들은 이중으로 소외되어 있었다. 첫째, 유급 노동의 기회 자체가 제한되어 있었다. 전문직은 남성의 영역이었고, 여성의 노동은 가정 안에 가두어져 임금이 지불되지 않았다. 둘째, 설령 글을 쓴다 해도 그 글은 남성의 기준으로 평가받았다. 출판사, 비평가, 독자—이 모든 권위의 자리는 남성이 점하고 있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는 『제2의 성』(Le Deuxième Sexe, 1949)에서 이것을 '타자화(othering)'로 개념화했다. 여성은 스스로를 주체로 정의하지 못하고 항상 남성을 기준으로 한 타자, 즉 '제2의 성'으로 존재해왔다. 경제적 독립은 이 타자화에서 벗어나는 첫 조건이다. 울프가 유산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녀가 말하는 것은 돈 자체가 아니다. 타자로 존재하기를 멈출 수 있는 조건이다.
비토리아 콜론나(Vittoria Colonna), 아프라 벤(Aphra Behn), 조지 엘리엇(George Eliot)—울프가 열거하는 여성 작가들의 역사는 이 경제적 조건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들이 쓸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 예외적 조건이 허락한 결과였다. 그 조건이 없는 수백만의 여성들은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역사에서 지워졌다.
4. 분노는 왜 글을 망치는가 — 감정의 인식론
울프가 19세기 여성 소설들을 읽으면서 발견하는 것이 있다. 분노의 흔적. 글 속 어딘가에서 저자의 분노가 문장을 비틀어놓는다. 주제에서 일탈하고, 논조가 흔들리며, 목소리가 삐걱거린다.
샬럿 브론테(Charlotte Brontë, 1816~1855)의 『제인 에어』(Jane Eyre, 1847)에서 울프는 이것을 읽는다. 제인의 분노는 실재했다. 지붕 위를 거닐며 더 넓은 세상을 갈망하는 그 장면—울프는 그것이 샬럿 브론테 자신의 좁힘, 자신의 분노라고 본다. 그 분노는 소설을 간헐적으로 뒤틀었다.
울프는 이것이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분노가 어디서 오는지, 그리고 그것이 예술에 무엇을 하는지를 묻는다. 분노는 사실의 인식에서 온다. 불의한 조건에 대한 정확한 반응이다. 그러나 분노가 글을 지배할 때, 글은 호소문이 되거나 고발장이 된다. 그것도 가치 있는 글이지만, 소설이나 시가 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322)가 『시학』(Poetica)에서 논한 카타르시스(catharsis)의 문제와 연결된다. 예술은 감정을 날 것 그대로 토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형식으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분노, 슬픔, 기쁨은 예술의 재료이지 예술 그 자체가 아니다. 재료가 형식을 압도할 때, 예술은 선전이 된다.
그러나 울프의 논점은 더 깊다. 여성 작가들이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그들의 의지나 능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분노를 일으키는 조건이 실재했고, 끊임없이 글쓰기를 방해했다. 방이 없으면 글이 끊긴다. 돈이 없으면 쓰다 멈춰야 한다. 그 조건 속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라는 것은 불가능한 요구였다.
울프가 꿈꾸는 것은 '조건이 갖춰진 분노 없음'이다.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평정심이 아니라, 방과 돈이 있고, 더 이상 분노를 일으키는 불의가 없는 상태에서 가능한 고요한 집중. 그것이 예술을 가능하게 한다.
5. 셰익스피어의 누이 — 지워진 천재들의 계보
울프의 에세이에서 가장 강렬한 부분 중 하나는 '셰익스피어의 누이' 이야기다. 그녀는 줄리엣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줄리엣 셰익스피어.
그녀는 오빠만큼 총명하고, 오빠만큼 상상력이 풍부하다. 그러나 그녀는 학교에 가지 못한다. 책은 혼자 몰래 읽어야 한다. 열여섯이 되자 부모는 결혼을 강요한다. 결혼을 거부하면 아버지는 회유하고 협박한다. 그녀는 도망쳐 런던으로 간다. 극장에서 일하고 싶다고 한다. 비웃음만 돌아온다. 여자는 무대에 설 수 없다. 결국 임신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어느 버스 정류장 근처에, 이름도 없이 묻힌다.
이것은 가상의 이야기다. 그러나 울프는 이것이 수백만의 실제 이야기라고 말한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성들, 쓰지 못하고 죽은 여성들, 자신의 천재성을 한 줄도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여성들. 역사가 기억하는 작가의 목록 뒤에는 기억되지 못한 자들의 방대한 침묵이 있다.
이것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계보학(genealogy) 방법론과 공명한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 1975)을 비롯한 여러 저작에서, 역사는 승자의 서사이며 패자들의 경험은 체계적으로 지워진다고 주장했다. 문학사도 마찬가지다. 정전(canon)이라고 불리는 것은 특정 젠더, 특정 계급, 특정 언어가 선점한 목록이다. 그 목록 바깥에 있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처리된다.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Ü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 1940)에서 역사가의 과제를 "지워진 자들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울프의 '셰익스피어의 누이'는 이 베냐민적 프로젝트의 문학적 실천이다. 이름 없이 죽은 그 여성들을 호명하는 것, 그들의 침묵을 침묵으로 두지 않는 것.
6. 남성성과 여성성 — 양성적 정신의 이상
울프의 에세이에서 가장 많은 오해를 받는 개념 중 하나가 '양성적(androgynous) 정신'이다. 울프는 위대한 예술가는 남성과 여성의 두 가지 정신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양성적 마음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차이를 지우자'는 주장이 아니다.
울프가 비판하는 것은 순수하게 남성적인 정신과 순수하게 여성적인 정신 모두다. 순수하게 남성적인 정신은 타자를 인식하지 못하는 폐쇄성을 갖는다. 순수하게 여성적인 정신은—울프의 시대에 강요된 의미에서—자기 자신을 주체로 세우지 못하는 종속성을 갖는다. 둘 다 반쪽이다.
이것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의 변증법(Dialektik)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Phänomenologie des Geistes, 1807)에서 대립하는 두 계기가 지양(Aufhebung)되어 더 높은 차원으로 통합된다고 보았다. 울프의 양성적 정신은 남성성과 여성성이 단순히 합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완전한 창조적 의식으로 지양되는 것이다.
현대의 젠더 이론, 특히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가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 1990)에서 전개한 수행성(performativity) 이론은 울프의 직관을 다른 방식으로 심화시킨다. 버틀러는 젠더가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반복적 수행을 통해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울프는 그보다 수십 년 앞서, 문학과 창조의 영역에서 젠더의 고정성을 의심했다.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것은 어떤 고정된 '남성적' 자질 때문이 아니라, 그가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 모두를 자신 안에서 자유롭게 다룰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울프는 본다.
7. 여성과 소설 — 장르의 젠더 정치학
울프는 왜 여성들이 소설을 주로 썼는지도 묻는다. 시나 희곡이 아니라 소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19세기 소설은 거실에서 쓸 수 있었다. 누군가 들어오면 원고를 덮을 수 있었다. 거실의 공유된 공간에서 조각조각 이어 쓸 수 있는 형식. 소설은 방해를 버티는 장르였다. 시는 집중을 요한다. 희곡은 극장을 요한다. 소설은 부엌에서도, 아이가 우는 동안에도, 잠깐 잠깐 틈을 내어 쓸 수 있었다.
제인 오스틴(Jane Austen, 1775~1817)은 작은 쪽지에 글을 썼다가 누군가 오면 감추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조지 엘리엇(George Eliot, 1819~1880)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비웃음 받을까봐 남자 이름을 필명으로 썼다. 이 전략들은 재능이 얼마나 굴곡진 길을 걸어야 했는지를 보여준다.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는 『예술의 규칙』(Les Règles de l'art, 1992)에서 문학장(literary field)이 중립적이지 않다고 분석했다. 어떤 작품이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받는가, 어떤 작가가 정전에 편입되는가—이 모든 것은 문화적 권력관계의 산물이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18~19세기에 여성 작가들에게 유독 열려 있었던 것도, 그 당시 소설이 '진지한' 문학 장르로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역설이 있다. 낮은 위상의 장르였기에 여성에게 허용되었다. 소설의 위상이 높아지자, 이번에는 여성 작가들의 기여가 지워지거나 평가절하되기 시작했다.
8. 익명성의 전통 — '애니 엘리엇'과 이름 없는 목소리들
울프는 에세이 전체를 '메리 비튼(Mary Beton)', '메리 시튼(Mary Seton)', '메리 카마이클(Mary Carmichael)'이라는 가상의 이름들로 채운다. 화자인 '나'는 이 이름들 중 어느 것도 아닐 수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독자에게 요청한다. 자신을 화자와 동일시하지 말고, 말해지는 것과 씨름하라고.
이 선택은 단순한 수사적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여성 글쓰기의 역사적 조건에 대한 메타적 성찰이다. 역사 속 많은 여성들은 익명으로 썼다. 작가를 알 수 없는 중세 시들, 'A Lady'라는 서명으로 출판된 소설들, 남편이나 오빠의 이름을 빌린 원고들.
이것은 발터 베냐민이 말한 '흔적(Spur)'의 문제와 연결된다. 베냐민은 역사가 지워지는 방식에 주목했다. 이름이 없으면 기억되지 않는다. 기억되지 않으면 없었던 것이 된다. 울프는 그 이름 없음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역설적으로 이름 없음 자체를 기억하게 만든다.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 1943)에서 존재는 그것이 명명될 때 비로소 의식에 포착된다고 했다. 이름 없음은 존재의 부재가 아니다. 그러나 이름이 없으면 그 존재는 타인의 의식에서 사라진다. 울프가 익명의 여성들을 호명하는 것은 그들을 존재하게 하는 행위다.
9. 문장의 형태 — 문체는 젠더화되는가
울프는 단순히 '무엇을 쓰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도 제기한다. 문장의 형태 자체가 남성적 전통에 의해 형성되어왔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19세기의 문학적 문장은 특정한 리듬과 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단호하고, 선형적이며, 결론을 향해 달려가는 형태였다. 이 문장은 남성 작가들의 삶에 맞게 발달했다. 방해받지 않고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삶, 하나의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삶.
울프 자신의 문체는 이에 대한 실천적 저항이었다.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 기법—『댈러웨이 부인』(Mrs Dalloway, 1925), 『등대로』(To the Lighthouse, 1927)에서 울프가 발전시킨 이 기법은 단선적 서사를 해체하고, 내면의 리듬을 따라간다. 생각은 결론을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 감각, 기억, 감정이 뒤섞이며 흐른다. 이 흐름은 문학사의 남성적 문장을 비껴가는, 여성의 시간과 경험에 더 가까운 형식이었다.
루시 이리가레(Luce Irigaray, 1930~)는 『하나이지 않은 성』(Ce Sexe Qui N'en Est Pas Un, 1977)에서 여성의 언어는 선형적이고 단일한 것이 아니라 다중적이고 복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울프는 이 이론보다 수십 년 앞서, 그것을 소설로 실천했다. 의식의 흐름은 단순한 기법이 아니다. 그것은 다르게 살아온 존재의 다른 언어다.
10. 지금 여기서 — 방은 여전히 필요한가
『자기만의 방』이 출판된 1929년 이후 거의 100년이 지났다. 여성들은 대학에 가고, 글을 쓰고, 상을 받고, 도서관 잔디밭을 걷는다. 울프가 묘사한 조건들은 많이 바뀌었다.
그런데 방은 여전히 필요한가.
다른 방식으로, 그렇다. 오늘날의 방은 벽돌과 문으로 만들어진 물리적 방만이 아니다. 주의를 온전히 자신에게 돌릴 수 있는 시간, 타인의 평가와 시선에서 독립된 심리적 공간, 경제적 종속에서 벗어난 자율적 조건—이것들이 오늘날의 방이다.
SNS 시대의 창작 환경을 생각해보자. 글을 쓰는 순간에도 알림이 온다. 독자의 반응이 즉시 측정된다. 좋아요의 수가 가치를 결정한다. 이 환경에서 울프가 말한 '잠글 수 있는 방'은 더욱 절실해진다. 물리적 고립이 아니라, 즉각적 평가의 외압으로부터의 고립. 완성되기 전에 판단받지 않을 권리.
한병철(Byung-Chul Han, 1959~)은 『피로사회』(Müdigkeitsgesellschaft, 2010)에서 현대인이 자기 자신의 착취자가 되었다고 진단했다. '할 수 있다'는 능력사회의 명령 속에서 우리는 쉬지 않고 생산하고, 노출하고, 평가받는다. 피로는 이 과잉 노출의 결과다. 울프의 방은 이 피로사회에서 회복의 공간이기도 하다. 평가받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장소.
그리고 울프의 명제는 젠더를 넘어서도 유효하다. 누구든—어떤 계급에서 태어났든, 어떤 몸을 가졌든, 어떤 배경을 가졌든—자신의 방이 없으면 자신의 목소리를 찾기 어렵다. 방은 특권이 아니라 창조의 기본 조건이다.
줄리엣 셰익스피어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고 울프는 말했다. 그녀가 태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지금도 변하지 않는다. 돈과, 자기만의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