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거대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소설은 이 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설명이 없다. 이유가 없다. 전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저주가 내렸는지,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그는 벌레가 되어 있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가 『변신』(Die Verwandlung, 1915)에서 만들어낸 이 첫 장면은 20세기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오프닝 중 하나다. 그리고 이 장면이 충격적인 이유는 사건의 기괴함 때문이 아니다. 사건이 기괴한데도 소설 속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는 점이 진짜 충격이다.
그레고르 본인은 "조금 일찍 일어나야 했는데" 하고 출근 걱정을 한다. 어머니는 그가 늦잠 잔다고 문을 두드린다. 회사 지배인은 지각을 따지러 집을 찾아온다. 가족은 처음에 당혹스러워하다가, 이내 적응하고, 결국 그를 짐덩어리로 취급한다. 세계는 계속된다. 한 인간이 벌레로 변했는데도 세계는 일상의 논리로 굴러간다.
이것이 카프카가 던지는 질문이다. 인간이 벌레가 되는 사건보다 더 이상한 것이 있다. 그것은 벌레가 된 인간을 그냥 받아들이는 세계다. 그리고 그 세계는 우리가 사는 세계와 얼마나 다른가.
2. 그레고르는 왜 벌레가 되었는가 — 소외의 해부
카프카는 이유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소설을 읽다 보면 이유는 이미 거기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레고르는 변신 이전에 이미 벌레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직물 회사의 외판원이다.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기차를 타고, 낯선 도시를 돌며 물건을 판다. 음식은 불규칙하고, 관계는 피상적이며, 인간적 온기라고는 없다. 집에 와서도 쉬지 못한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진 빚을 갚기 위해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도구다.
이것은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가 『경제학-철학 수고』(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1844)에서 분석한 소외(Entfremdung, alienation) 개념과 정확하게 겹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는 네 가지 차원에서 소외된다. 자신이 만든 생산물로부터 소외되고, 노동 행위 자체로부터 소외되며, 다른 인간들로부터 소외되고, 마침내 자기 자신의 본질(유적 존재, Gattungswesen)로부터 소외된다.
그레고르는 이 네 가지 소외를 모두 살고 있다. 그가 파는 직물은 그의 것이 아니다. 외판원이라는 일 자체가 그에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다. 회사 지배인과의 관계는 통제와 복종이지 인격적 관계가 아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모른다. 변신 이후 천장에 매달리는 것이 재미있다는 것을 처음 발견하면서, 그는 벌레로서 오히려 인간이었을 때보다 자신의 몸을 자유롭게 쓰고 있다.
변신은 사건이 아니다. 변신은 이미 일어나 있던 것의 가시화다.
3. 아버지의 사과 — 권위와 폭력의 가족 드라마
소설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 중 하나는 아버지가 그레고르에게 사과를 던지는 장면이다. 사과는 그레고르의 등에 박혀 썩어 들어간다. 결국 그것이 그레고르를 죽음으로 이끄는 원인이 된다.
이 장면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다. 아버지-아들 관계의 본질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카프카 자신의 삶이 이 관계를 설명한다. 그는 1919년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는 생전에 전달되지 않았지만, 훗날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Brief an den Vater, 1952년 사후 출판)로 알려졌다. 카프카는 그 편지에서 아버지가 자신에게 미친 압도적인 영향을 분석한다. 거대한 체구와 목소리, 냉혹한 기준, 아들의 어떤 시도도 사소하게 만들어버리는 존재감. "당신은 세계의 기준이었습니다"라고 카프카는 썼다.
그레고르의 아버지도 같은 구조다. 사업에 실패하고 무기력해졌던 아버지는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자 오히려 활력을 되찾는다. 제복을 입고, 권위적으로 걷고, 아들을 향해 사과를 던진다. 아들의 추락이 아버지를 부활시켰다. 이것은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이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 1941)에서 분석한 권위주의적 성격(authoritarian character)의 메커니즘이다. 권위주의적 인간은 복종할 때 안정을 얻고, 지배할 대상이 있을 때 힘을 얻는다. 그레고르가 벌레가 됨으로써 아버지는 마침내 지배할 수 있는 대상을 얻었다.
가족은 사랑의 공동체인가, 아니면 경제와 권력의 단위인가. 카프카는 이 질문을 날카롭게 제기한다.
4. 그레테의 변신 — 또 다른 변신
소설의 제목은 『변신』이다. 단수다. 그러나 소설이 끝날 때 독자는 두 번째 변신을 목격한다.
처음에 그레테는 오빠를 보살피는 유일한 가족이다. 음식을 가져다 주고, 방을 청소하고, 그레고르의 취향을 파악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도 변한다. 그레고르를 "저것"이라고 부르기 시작하고, 마침내 "저것을 없애버려야 해요. 저것이 그레고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라고 선언한다.
그레테의 변신은 그레고르의 변신보다 어떤 의미에서 더 충격적이다. 그레고르는 육체적으로 변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인간이다. 그는 가족을 사랑하고, 그들의 말소리를 들으며 위안을 얻고, 자신이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인다. 반면 그레테는 육체적으로 인간이지만 정신적으로 그레고르를 인간으로 대우하기를 그쳤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가족 세 명은 트램을 타고 교외로 소풍을 나간다. 짐을 덜었다는 안도감, 그레테의 아름다운 몸에 대한 부모의 만족스러운 시선,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 이 밝은 결말은 소설에서 가장 어두운 부분이다. 그들은 잊었다. 아니, 잊기로 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1958)에서 인간이 서로를 인격으로 대하는 것, 즉 행위(action)와 말(speech)을 통해 서로에게 나타나는 것이 공적 영역의 핵심이라고 했다. 그레고르는 벌레가 된 순간부터 이 공적 영역에서 배제된다. 그는 말할 수 없고(의사소통 불능), 행위할 수 없다. 그리고 그를 인격으로 대우하기를 멈춘 가족은, 그를 죽임으로써 공적 영역의 논리를 완성시킨다.
5. 카프카의 세계 — 부조리의 구조
카프카의 소설 세계에는 독특한 논리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세계와 비슷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르다. 이 세계에서는 규칙이 있지만 규칙의 이유가 없다. 권위가 있지만 권위의 근거가 없다. 죄가 있지만 죄의 내용이 없다. 『심판』(Der Proceß, 1925)의 요제프 K는 이유도 모른 채 체포되고 재판받고 처형된다. 『성』(Das Schloß, 1926)의 K는 성에 들어가려 하지만 결코 들어가지 못한다. 그리고 『변신』의 그레고르는 벌레가 된 이유를 모른다.
이 세계를 개념화한 것이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의 부조리(absurde) 철학이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1942)에서 부조리를 이렇게 정의한다. 부조리는 세계의 비이성성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이성적 욕구에 있는 것도 아니다. 부조리는 그 둘의 충돌, 즉 의미를 요구하는 인간과 의미를 주지 않는 세계 사이의 간극에 있다.
그레고르는 의미를 요구한다. 왜 벌레가 되었는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족과 어떻게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가. 그러나 세계는 답을 주지 않는다. 세계는 그냥 계속된다. 이것이 부조리의 구체적 얼굴이다.
카뮈는 카프카를 부조리 문학의 선구자로 보았다. 그러나 카뮈와 카프카는 결론에서 갈린다. 카뮈는 부조리 앞에서 반항과 긍정을 선택한다. "시지프를 행복한 인간으로 상상해야 한다"고 그는 썼다. 카프카는 그 반항의 몸짓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레고르는 결국 스스로 사라지기를 선택한다. 그것이 더 솔직한 것인지, 더 비극적인 것인지는 독자가 판단해야 한다.
6. 음식과 몸 — 인정받지 못한 욕구
소설에서 음식은 중요한 모티프다. 그레고르가 벌레가 된 후 그레테는 여러 음식을 가져다 시험한다. 신선한 채소, 치즈, 오래된 소스—그레고르는 신선한 것보다 썩어가는 것을 좋아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기괴한 세부사항이 아니다. 인정(recognition)의 문제다.
독일 철학자 악셀 호네트(Axel Honneth, 1949~)는 『인정 투쟁』(Kampf um Anerkennung, 1992)에서 인간의 정체성이 세 가지 차원의 인정을 통해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사랑(가족적 인정), 법적 권리(시민으로서의 인정), 사회적 평가(능력과 기여에 대한 인정). 그레고르는 변신 이후 이 세 가지를 모두 잃는다.
그런데 변신 이전에도 그는 이것들을 진정으로 가지고 있었는가. 가족의 사랑은 그의 수입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의 법적 권리는 채무자로서 묶여 있었다. 그의 사회적 평가는 외판원이라는 역할에 국한되어 있었다. 변신은 이 허약한 인정 구조를 단번에 드러냈다. 그레고르는 벌레가 됨으로써 비로소 그 인정이 얼마나 조건부였는지를 알게 된다.
그가 썩은 음식을 좋아하게 된 것은, 신선한 음식—즉 정상적 사회가 제공하는 것들—이 더 이상 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신호다. 그는 세계의 잉여물과 함께 살게 된다.
7. 침묵의 언어 — 말할 수 없는 것
그레고르는 변신 직후부터 말을 잃는다. 그의 목소리는 벌레의 소리로 변했고, 가족은 그 소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가족의 말을 모두 듣는다. 가족이 자신에 대해 나누는 대화, 재정 상태에 대한 걱정, 자신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모두 들린다. 그러나 그는 응답할 수 없다.
이 구조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의 유명한 명제를 연상시킨다.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1921)의 마지막 문장: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Worüber man nicht sprechen kann, darüber muss man schweigen)."
그러나 카프카적 상황에서 이 명제는 뒤집힌다. 그레고르는 말해야 할 것이 있다. 자신이 여전히 인간임을, 가족을 사랑함을, 이 상황이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그러나 그는 말할 수 없다. 언어 능력을 잃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 그가 있는 위치—벌레, 짐, 수치—가 그를 언어의 공동체에서 배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 1924~1998)가 『쟁론』(Le Différend, 1983)에서 분석한 쟁론(différend)의 상황이다. 리오타르는 어떤 피해는 그것을 표현할 언어 자체가 없기 때문에 호소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그레고르의 피해는 바로 이런 종류다. 그가 자신의 상황을 호소할 수 있는 언어 게임 자체에 그는 참여할 수 없다.
말할 수 없는 자의 고통은 말할 수 있는 자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8. 카프카와 실존주의 — 실존은 본질에 앞서는가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 1946)에서 선언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 인간은 먼저 세계에 던져지고, 그 다음에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만들어간다. 미리 정해진 인간의 본질 같은 것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으로 우리 자신을 만든다.
그렇다면 그레고르는 어떤가. 그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형태로 세계에 던져졌다. 그것도 두 번. 한 번은 외판원으로 태어나(사실 이것도 그의 선택이 아니었다), 한 번은 벌레로 변했다. 그는 자신의 본질을 선택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그러나 카프카의 그레고르는 사르트르적 영웅이 아니다. 그는 저항하지 않는다. 부당함에 분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가족을 위해 스스로 사라지기를 선택한다. 이것은 체념인가, 사랑인가, 아니면 내면화된 억압인가.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는 『제2의 성』(Le Deuxième Sexe, 1949)에서 억압받는 자들이 어떻게 자신의 억압에 동조하는지를 분석했다. 억압이 오래 지속되면, 억압받는 자는 스스로를 억압자의 눈으로 보게 된다. 그레고르가 "나는 가족에게 짐이다, 내가 사라지면 그들이 행복해질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가족이 그를 보는 방식을 그 자신이 내면화한 결과다. 그는 가족의 논리로 자신을 죽인다.
9. 벌레의 시선 — 낯설게 하기의 미학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비평가 빅토르 시클로프스키(Viktor Shklovsky, 1893~1984)는 「기법으로서의 예술」(Iskusstvo kak priem, 1917)에서 '낯설게 하기(ostranenie)'를 예술의 핵심 기법으로 제시했다. 예술은 우리가 익숙해진 것을 낯설게 만들어 다시 보게 한다. 자동화된 지각을 깨고, 사물을 처음 보는 것처럼 경험하게 만드는 것.
『변신』은 이 낯설게 하기의 극단적 실천이다. 카프카는 인간 세계를 벌레의 눈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방 안의 가구, 문과 창문의 높이, 바닥과 천장의 감촉—그레고르가 벌레로서 경험하는 공간은 우리에게 낯설지만, 그 낯섦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공간과 관계를 새롭게 본다.
가족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레고르가 벌레가 됨으로써 독자는 가족이라는 제도, 사랑이라는 감정, 책임이라는 개념을 낯선 각도에서 보게 된다. 우리가 가족이라고 부르는 것의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가. 그레고르가 수입을 잃는 순간 그 밑바닥이 드러난다.
카프카가 만든 벌레는 거울이다. 그 거울 속에서 독자는 자신이 얼마나 '그레고르'인지를, 또는 얼마나 '가족'인지를 보게 된다.
10. 지금 여기서 — 우리 시대의 변신들
『변신』이 출판된 1915년 이후 백 년이 넘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 날카롭게 현재를 찌른다.
오늘날 그레고르 잠자는 어디에 있는가. 그는 과로로 번아웃(burnout)이 온 직장인이다. 어느 날 아침 더 이상 출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 몸이 말을 듣지 않고, 회사는 계속 전화를 하고, 가족은 이해하지 못한다. 현대의 번아웃은 카프카의 변신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생산성을 잃은 존재가 어떻게 처우받는지의 문제.
그레고르는 또한 장애를 가지게 된 사람이다. 사고나 병으로 장애를 얻은 후, 예전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된 사람이 가족과 사회에서 어떻게 다루어지는지. 소설은 이 냉혹한 현실을 벌레라는 극단적 비유로 그려낸다.
그리고 그레고르는 어떤 사회에서든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다. 정신질환자, 노숙인, 이주민, 성소수자—자신의 존재만으로 사회의 불편함을 촉발하는 사람들. 그들 각각은 어떤 형태로든 "왜 당신은 정상적인 인간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카프카는 그 질문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보여준다.
소설의 마지막, 가족이 트램에서 미래를 설계하는 장면. 그들은 더 작은 집으로 이사하고, 그레테에게 좋은 남편감을 찾아주자고 이야기한다. 짐 하나가 사라졌고 삶은 계속된다.
그런데 독자는 안다. 그 짐이 무엇이었는지를. 그것은 그들이 벌레라고 불렀지만, 마지막까지 그들을 사랑했던 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독자는 묻는다. 나는 누군가의 그레고르인가. 아니면 나는 누군가를 그레고르로 만들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