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통 감각의 붕괴
한때 정치는 "함께 살아가는 법"에 대한 예술로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란, 점점 더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싸움처럼 느껴진다. 진보와 보수, 좌와 우, 찬성과 반대의 극단 사이에서 우리는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상대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고 배척한다. 정치적 양극화는 단순한 이념 갈등을 넘어, 사회적 신뢰의 구조 자체를 붕괴시키고 있다.
아렌트는 공적 영역(public realm)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인간은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세계를 함께 구성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공적 영역은, 공유된 현실보다는 각자의 '사실'과 '진실'로 분열되어 있다. SNS 알고리즘은 우리의 세계를 필터링하며,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여준다. 이로써 공통된 경험의 토대는 약화되고, 사회는 '공통 감각'(sensus communis)을 상실한 채 흩어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이념은 그 자체로 악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어떤 가치와 믿음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행동한다는 점에서, 이념은 공동체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도구다. 문제는 이념이 삶을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삶을 판단하고 구획 짓는 무기가 될 때 발생한다. 진리의 자리를 점유한 이념은 질문을 가로막고, 타자의 말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자크 데리다는 '차이(différance)'라는 개념을 통해,
모든 의미는 미뤄지고 열려 있으며 결코 고정될 수 없다고 보았다. 즉, 어떤 정치적 입장도 완전하지 않으며, 타자의 말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적 담론은 끝없이 닫혀가는 방향으로만 움직인다. 우리는 더 이상 상대를 설득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입장을 더욱 명확히 하고 강화하는 데 집중한다.
시민이 아닌 '부대원'들
민주주의의 힘은 서로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공존하고 협의하는 능력에 있다. 하지만 양극화가 심화될수록 사람들은 더 이상 시민이 아니라, '전선의 병사'처럼 행동하게 된다. 정치적 반대자는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물리쳐야 할 적이 된다. 언어는 소통의 매개가 아니라 전투의 무기가 되고, 상대를 무너뜨리는 말들이 박수와 환호를 받는다.
이러한 정치 환경에서는 공공성이 위축되고,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합의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나의 자유'는 외쳐지지만, '우리의 책임'은 사라진다. 결국 민주주의는 단지 제도만 남고, 그 정신은 공허해질 위험에 처한다.
철학은 경청의 기술이다
철학이 오늘날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그것이 "의심하고 질문하는 삶"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양극화를 넘어설 수 있는 첫걸음은, 다시 질문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닫게 되었는가? 왜 우리는 확신만을 추구하고, 의심을 회피하는가?
질 들뢰즈는 철학을 "개념을 창조하는 행위"라 했지만, 동시에 그것은
낯선 사유를 환대하는 일이다. 철학은 답을 제공하기보다, 더 나은 질문을 가능하게 하고, 침묵에 귀 기울이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금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타자'가 아니라, '대화 가능한 타자'로 회복할 수 있다.
정치적 양극화를 해결하는 유일한 해법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시작은, '이해받기보다 이해하려는 용기'일 것이다. 말보다 먼저 귀를 여는 것. 그때 비로소, 우리는 다시 공동의 세계를 향해 걸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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