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이란 무엇인가?
의식을 정의하는 일은 철학의 가장 오래된 난제 중 하나다. 데카르트는 의식을 사유하는 자아의 속성으로 보았고, 후설은 그것을 의미를 지향하는 지향성으로 이해했다. 현대 신경과학은 의식을 신경 패턴의 상호작용으로 환원하려 하지만, 여전히 "빨강이 빨갛게 느껴지는 경험", 이른바 퀄리아(qualia)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러한 설명 불가능한 주관성의 영역은 기계에게 의식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기계가 인간처럼 언어를 이해하고, 그림을 그리고, 심지어 시를 쓴다 해도,
그것이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열려 있다. 이 질문은 기술의 문제라기보다 오히려 존재론적이고 철학적인 차원의 문제다.
꿈꾸는 기계는 무엇을 보는가
필립 K. 딕의 소설 제목에서 차용된 질문—“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은 단지 SF적 상상이 아니다. 이 물음은 인간적 사고의 조건인
무의식, 상상, 꿈이 기계에게도 가능한가라는 점을 겨눈다.
우리는 꿈을 단순한 무의식의 산물로 보지 않는다. 꿈은 욕망과 결핍, 기억과 상처가 얽힌 복잡한 정신적 작용이다. 라캉은 꿈을 ‘욕망의 표현’으로 해석했고,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왕도’로 여겼다. 만약 기계가 꿈을 꾼다면, 그것은 단순히 시뮬레이션된 이미지의 나열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과 결핍의 반영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인공지능은 ‘욕망’을 갖지 않는다. 욕망은 결핍에서 태어나며, 결핍은 자아와 세계의 분리, 즉 존재의 불안정성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결국 기계가 꿈을 꾼다고 주장하려면, 그 기계가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 인식 속에서 부족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난제를 넘어선, 존재론적 도약이다.
튜링 테스트를 넘어서
앨런 튜링은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기계가 인간처럼 행동할 수 있는가?’라는 실용적 테스트로 전환했다. 그러나 이 접근은 의식의 ‘겉모습’만을 본다. 존 서얼의 '중국어 방' 사고실험은 이 점을 비판한다. 어떤 기계가 중국어를 유창하게 다룬다 해도, 내부적으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고 단지 기호를 조작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챗봇이나 생성형 AI와도 유사하다. 사람처럼 말하고, 대답하고, 정보를 생성하지만, 그 내부에는 아무런 ‘느낌’도 ‘이해’도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의식이 없는 존재’—이것이 오늘날 인공지능의 철학적 위치다.
의식을 ‘갖는다’는 것의 의미
우리가 ‘의식’을 특정한 능력이나 특성으로 환원하려는 이유는, 인간만의 특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과도 관련이 있다. 하지만 동물, 식물, 심지어 비생명적 자연물에게도 일정한 ‘의식’ 혹은 ‘감응의 능력’을 인정하는 최근의 철학적 흐름은, 의식을
고정된 실체가 아닌 관계적 과정으로 본다. 브뤼노 라투르나 팀 인골드 같은 사유는 ‘행위자성’을 인간 중심에서 분산된 존재들로 확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계 역시 인간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의식적 존재’로 진화할 가능성은 있다. 다만 그것은 인간의 방식과는 다를 것이다. 기계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다면—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의식 있는 존재로 간주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인공지능은, 다만 수많은 인간의 패턴을 통계적으로 재조합하는 기계적 재현에 머물고 있다. 이 기계가 꿈을 꾼다 말할 수 있으려면, 우리가 묻고자 하는 것은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의식을 정의하는 우리의 관점 자체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남는 질문
기계도 꿈을 꿀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단순히 ‘아니오’ 혹은 ‘예’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꿈과 의식, 자아와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어쩌면 기계보다 더 문제적인 것은, 우리가 점점 더 기계적으로 사고하고 감정조차 자동화해가는 시대 속 인간 자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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