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수명의 연장은 축복일까, 숙제일까
21세기 들어 세계는 본격적인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의료 기술과 생활 환경의 개선으로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 오래 살게 되었지만, 우리는 그 ‘긴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준비해야 할지에 대한 사유는 충분히 해왔을까? 단지 ‘장수’는 선물일 수 있지만, 그로 인해 생겨나는 철학적·윤리적 과제들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노년기의 삶은 더 이상 생의 말미에 짧게 머무는 시기가 아니다. 평균 수명이 90세에 가까워지면서, 노년은 이제 삶의 거의 1/3을 차지하는 시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노년은 ‘소멸을 기다리는 단계’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국면이자 독립적인 삶의 양태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정책적 대응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유용성 너머의 인간 존재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인간의 가치를 ‘생산성’으로 평가해왔다. 일할 수 있는가, 사회에 기여하는가, 경제적 부담이 되는가라는 질문들이 고령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형성해왔다. 그러나 철학은 이 같은 효율 중심의 관점을 전복하는 사유를 촉구한다.
칸트는 인간을 “단지 수단이 아닌, 항상 목적 그 자체로 대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간은 단지 수단이 아닌, 언제나 동시에 목적 그 자체로 대우되어야 한다.”
- 『실천 이성 비판』, 임마누엘 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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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명제는 우리가 고령자를, 혹은 노년의 삶 자체를 어떤 존재로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기준이 될 수 있다. 더 이상 생산성이나 사회적 기여도만으로 인간의 존엄을 평가할 수는 없다. 오히려 늙어감 속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 시간과 몸의 관계, 상실과 기억의 의미 같은 심오한 물음들이 드러난다.
의존과 돌봄, 새로운 관계의 윤리
고령화는 필연적으로 ‘돌봄(care)’의 문제를 수반한다. 돌봄은 흔히 일방적인 ‘부담’으로 이해되지만, 철학은 그 속에서 관계의 윤리를 다시 조명한다.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을 마주할 때 윤리는 시작된다고 말한다. 고령자는 더 이상 익명의 통계 수치나 사회적 비용이 아니라, 돌봄의 타자이자 윤리적 관계의 주체로 등장한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누가 누구를 돌보아야 하는가’의 문제를 넘어서, ‘돌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의존성은 실패나 퇴행이 아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 했고, 생의 끝에도 그렇다. 돌봄은 인간됨의 필수 조건이며, 고립된 자율적 주체라는 허상에서 벗어나 상호의존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다시 발견하게 해준다.
늙어간다는 것의 철학
노년은 단지 시간이 흐른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인생을 되돌아보고, 의미를 재구성하며, 타인과 세계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가는 성찰의 시기이기도 하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를 “자신의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로 보았다. 그러나 이 죽음을 향해가는 시간은 단순한 감산의 시간이 아니라, 존재를 더 깊이 이해하고 타자와 연결되는 계기를 제공한다.
늙어간다는 것은 곧 인간의 유한성을 받아들이는 일이며, 그것을 부정하거나 회피하는 대신 정면으로 마주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진실에 다가가는 일이다. ‘노년의 철학’은 단지 생애 말기의 삶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가 아니라, 인간 전체를 성찰하는 새로운 관점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단지 고령화 사회에 대응할 정책을 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관, 새로운 시간관, 새로운 윤리를 설계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늙어간다는 것은 사라져야 할 문제가 아니라, 되묻고 사유해야 할 실존의 질문이다. 철학은 그 물음의 출발점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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