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2호선 강남역 근처 백화점 명품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한 달 치 월급에 해당하는 샤넬 가방을 들고 있다. 그녀는 왜 이 가방을 선택했을까? 단순히 아름다워서? 품질이 좋아서?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라면 이런 대답을 했을 것이다. 그녀는 가방을 산 게 아니라 계급을 샀다고 말이다.
아비투스: 우리 안에 새겨진 계급의 DNA
부르디외는 우리 행동의 근본적 동력을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아비투스는 우리가 태어나서 자란 환경에서 체화된 성향, 취향, 판단 기준의 총체다. 마치 DNA처럼 우리 안에 각인되어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선택을 좌우한다.
강남 아파트에서 자란 아이와 달동네에서 자란 아이가 성인이 되어 보이는 취향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전자는 자연스럽게 클래식 음악을 선호하고 와인을 마시며 미술관을 찾는다. 후자는 트로트를 좋아하고 소주를 마시며 노래방을 간다. 이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각자의 아비투스가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다.
명품 소비 역시 마찬가지다. 명품을 구매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하고 싶은 계급의 아비투스를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명품을 통해 "나는 이런 계급의 사람이다"라고 선언한다.
문화자본: 보이지 않는 계급 재생산의 도구
부르디외는 자본을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 상징자본의 네 가지로 분류했다. 이 중 문화자본은 교육, 취향, 언어 능력, 예술적 소양 등을 포함한다. 중요한 것은 이 문화자본이 경제자본 못지않게 계급 지위를 결정한다는 점이다.
현대 사회에서 명품은 문화자본의 핵심적 표지판이 되었다. 에르메스 버킨백을 든 사람과 동대문에서 산 가방을 든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을 때, 사람들은 즉시 누가 '상류층'인지 판단한다. 이때 작동하는 것은 단순한 경제적 계산이 아니라 문화적 구별짓기다.
문제는 이런 구별짓기가 계급 재생산을 공고히 한다는 점이다. 명품을 소유한 사람들은 배타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결혼하고 사업을 하며 자녀를 교육시킨다. 결국 문화자본은 다시 경제자본으로 전환되고, 계급 구조는 더욱 견고해진다.
명품 소비의 이중적 역설
흥미롭게도 명품 소비는 이중적 역설을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기존 계급질서에 도전하려는 욕망의 표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질서를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중산층 이하 계층이 명품을 구매하는 행위는 분명 상류층의 문화자본을 모방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이들의 명품 소비는 오히려 '진짜' 상류층과 자신들의 차이를 더욱 부각시킨다. 진정한 상류층은 명품을 과시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명품은 당연한 일상이기 때문이다.
부르디외가 지적했듯이, 상류층의 진정한 힘은 자신들의 취향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만드는 능력에 있다. 그들은 명품을 의식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아비투스에 내재된 '자연스러운' 선택일 뿐이다.
문화자본 게임에서 벗어나기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화자본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부르디외는 비관적이었다. 아비투스는 너무 깊이 체화되어 있어서 의식적 노력만으로는 바꾸기 어렵다고 봤다. 하지만 그의 이론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첫 번째 해방의 단계가 될 수 있다.
명품을 구매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정말 이 물건이 필요해서 사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사는가? 내 선택이 진정한 내 취향인가, 아니면 내재된 아비투스의 발현인가?
부르디외의 통찰은 명품 소비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문화자본 게임의 메커니즘을 이해하자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좀 더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를 지배하는 구조를 이해한다면, 그 구조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틈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명품 가방 하나로 계급을 사려는 욕망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부르디외가 우리에게 건네는 첫 번째 해방의 열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