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니체의 '위버멘쉬(Übermensch)'만큼 번역 과정에서 본래 의미가 왜곡된 철학 개념도 드물다. 영어권에서는 'Superman'으로, 한국어에서는 '초인'으로 번역되면서 이 단어는 마치 슈퍼히어로나 초능력자를 연상시키는 개념으로 변질되었다. 하지만 독일어 원문에서 '위버멘쉬'가 담고 있는 철학적 깊이는 단순한 '초월적 인간'의 의미를 훨씬 넘어선다.
독일어 'Über'는 단순히 '위에' 또는 '넘어서'라는 공간적 개념이 아니다. 이 접두사는 '완전히', '철저히', '너머로'라는 의미를 동시에 포함한다. 예를 들어 'überwinden'은 '극복하다'를 뜻하지만, 단순히 장애물을 뛰어넘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을 완전히 소화하고 변화시켜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사용한 '위버멘쉬'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독일 낭만주의 전통 속의 위버멘쉬
니체의 '위버멘쉬' 개념은 독일 관념론과 낭만주의 전통에서 나온 '자기실현(Selbstverwirklichung)'과 '자기극복(Selbstüberwindung)' 개념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주인공이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려 하는 의지,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이 자기 자신을 부정하며 발전해나가는 변증법적 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
특히 독일어권 문화에서 'Mensch'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를 살펴봐야 한다. 영어의 'human'이나 'man'과 달리 독일어 'Mensch'는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 단어는 도덕적,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 즉 '인간다운 인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위버멘쉬'는 생물학적 인간을 넘어선 슈퍼맨이 아니라, 기존의 도덕적, 정신적 틀을 넘어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를 뜻한다.
언어철학적 관점에서 본 번역의 한계
번역학자 발터 베냐민은 『번역자의 과제』에서 모든 번역은 원문의 '잔존하는 생명(Überleben)'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위버멘쉬'의 경우 각국 언어로 번역되면서 니체가 의도한 철학적 뉘앙스가 크게 훼손되었다.
영어 'Superman'으로 번역되면서 이 개념은 조지 버나드 쇼의 연극을 거쳐 결국 DC 코믹스의 슈퍼맨 캐릭터로까지 이어졌다. 이는 니체의 원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다. 니체의 위버멘쉬는 기존 가치체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인 반면, 슈퍼맨은 기존 도덕체계를 수호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어로는 'Surhomme'으로 번역되는데, 이 역시 '인간 위의 인간'이라는 위계적 의미로 해석되기 쉽다. 일본어 '초인(超人)'을 거쳐 한국어로 들어온 번역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번역들은 모두 니체가 강조한 '되어가는 존재(Werdender)'로서의 동적 성격을 놓치고 있다.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던 철학에 미친 영향
니체의 '위버멘쉬' 개념이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면 번역의 중요성이 더욱 명확해진다. 하이데거는 니체의 위버멘쉬를 '존재자 전체에 대한 새로운 가치정립을 수행하는 존재'로 해석했다. 이는 단순한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사르트르는 니체의 이 개념을 '자기투사(projet de soi)'와 연결시켰다. 인간은 본질이 미리 정해진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존재이며, 위버멘쉬는 이런 자기창조의 극한을 보여주는 개념이라고 봤다. 들뢰즈 역시 『니체와 철학』에서 위버멘쉬를 '능동적 힘들의 승리'로 해석하며, 기존 가치체계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조하는 존재로 규정했다.
현대적 맥락에서의 재해석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니체의 '위버멘쉬' 개념은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맞고 있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의 발달로 인간 존재 자체가 변화하고 있는 현실에서, 니체가 말한 '자기극복'과 '가치창조'의 의미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니체의 위버멘쉬가 기술적 진보나 유전적 개량을 통한 '향상된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독일어 원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니체는 오히려 기존의 모든 '개선' 프로젝트를 비판하며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존재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현대 독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인간의 미래』에서 니체의 위버멘쉬 개념이 현대의 유전공학 논의에서 잘못 인용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니체가 말한 것은 생물학적 변화가 아니라 정신적, 문화적 차원의 근본적 전환이라는 것이다.
언어의 한계와 철학적 사유의 깊이
결국 '위버멘쉬'라는 단어가 각국 언어로 번역되면서 겪은 의미 변화는 언어철학의 근본 문제를 보여준다.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지만, 니체는 오히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기존 언어의 한계를 드러냈다.
독일어라는 특정 언어 체계 안에서 탄생한 '위버멘쉬'는 단순한 번역을 통해서는 온전히 전달될 수 없는 철학적 개념이다. 이는 모든 심층적 철학 개념이 갖는 운명이기도 하다. 하이데거의 '존재(Sein)', 레비나스의 '타자(Autrui)',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 등 모두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번역을 통해 이런 개념들과 만난다. 중요한 것은 번역된 개념을 원문의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니체의 '위버멘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단순히 한국어 '초인'이나 영어 'Superman'이 아니라, 19세기 독일 철학의 맥락과 독일어의 언어적 특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