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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한다.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해보려고 애써 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배자이다.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나는 항상 시간이 있으며, 정확하며, 일찍 도착하기까지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기다리게 하는 것, 그것은 모든 권력의 변함없는 특권이요, “인류의 오래된 소일거리이다.”
프랑스의 지성,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 등장하는 단상 - 담론의 조각(파편) 가운데 한 편입니다. 자신도 약속 시간에 늦게 도착해 보려는, 사랑에 빠진 사람의 헛수고를 이렇게 적었군요…. 허경 선생님이 철학자이자 기호학자, 비평가, 문학자인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을 읽습니다. 또한 이 수업에 참여하는 분들은 (희망자에 한해) 각자 <사랑의 단상>을 써서 낭독하며 바르트와의 보다 깊은 대화를 시도합니다.
<사랑의 단상>의 원제는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입니다. 그대로 번역하면 ‘ 사랑에 빠진 어떤 담론의 조각들’ 혹은 ‘사랑에 빠진 자가 하는 담론의 파편들’입니다. 제목대로 책은, 괴테의 작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바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담론을 여러 문학 작품과 자신의 글로 적은 조각 글 모음입니다. 철학과 심리학, 정신분석학을 가로지르고 문학과 예술과 인생에 대한 통찰을 아우르되 철학서도, 소설이나 수필도 아닌 이 텍스트를 통해 바르트가 사유한 것은 무엇일까요?
대개 독서는 저자의 글을 따라가며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르트에 따르면 저자와 독자는 일방적인 생산자/소비자의 관계가 아니라 텍스트 속에서 서로를 찾고 만나고 텍스트를 즐겨야 할 관계입니다. 바르트는 문학 작품이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글의 반복이자 반향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전의 작가들이 남겨놓은 것을 조립하되 새로운 방식으로 옮겨쓴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르트는 저자라는 단어 대신 ‘필사자(scripteur)’라는 단어를 쓰기도 했지요.
이 수업에서는 바르트가 쓴 <사랑의 단상>을 한줄 한줄 읽으며 롤랑 바르트의 사유 체계를 살피고 그가 글로 풀어낸 사랑의 관념을 곱씹어 봅니다. 우선은 바르트의 텍스트를 따라가며 그 의도를 파악하는 겁니다. 수업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바르트를 지금 여기 우리의 교실로 불러와 그와 깊이 만나고 대화하며 즐기는 겁니다. 방법은, (희망자에 한해) 수업 참가자들이 또 다른 <사랑의 단상>을 써서 나누는 것입니다. 재미있겠지요?!
허경(인문연구자)
고려대 불어불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철학과에서 서양철학을 전공, ‘미셸 푸코의 윤리의 계보학’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석학 필립 라쿠-라바르트의 지도를 받아 논문 <미셸 푸코와 근대성>을 제출, 최우수 등급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및 철학연구소 연구교수를 역임하며 여러 대학과 인문학 공동체에서 가르치는 동안 철학, 문학, 과학 분야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무수한 글을 읽고 썼다. 옮긴 책으로 질 들뢰즈의 『푸코』(동문선) 등이 있으며, 현재 『푸코 선집』(길)을 번역 중이고, 조만간 저술 『미셸 푸코 - 개념의 고고학』, 『푸코와 근대성』(이상 그린비)을 출간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