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공간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에서는 장소론이 다뤄진다. 그 이후 장소에 대한 논의는 점점 그 설 자리를 잃어갔고, 이른바 천재들의 시대였던 17세기에 이르면 우리는 데카르트, 가상디, 뉴턴, 로크, 라이프니츠가 공통적으로 장소를 공간으로 환원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할 수 있다. 그들의 논의에서 장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대신 철저히 주변화되어 있다. 이들은 왜 공간 중심적으로 사유했을까? 이는 그들 각각의 자연관과 세계관을 살펴봄으로써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체, 공간의 주관화
교재의 저자는 ‘신체’의 의미를 밝혀가는 것이 신체가 놓여있는 ‘장소’의 위상을 밝혀가는 것과 그 궤를 같이 한다고 설명한다. 칸트가 남긴 장소론에 있어서의 유의미함은 첫째로는 17세기 학자들에게 객관적인 구조였던 ‘공간’을 우리 인간이 인식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틀로 인식(공간의 주관화)하게 한 데 있고, 둘째로는 신체와 신체가 거주하는 장소에 대한 논의를 남겼다는 점에 있다. “실제로 사람이 자신의 신체를 통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의 장소 안에 존재할 수 있겠는가?”(p406) 또한 이 시기에, 경험주의자였던 화이트헤드도 ‘모든 신체는 어떤 장소에 있어서의 신체’라는 논의를 남김으로써, 신체와 장소에 대한 사유를 진전시킨다.
‘장소’로의 이행
후설과 메를로퐁티로 대표되는 현상학자들의 등장은 추상적이고 객관적이던 ‘공간’을 인간 삶의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는 ‘장소’로 바꾸어 놓는다. 주체와 객체의 이원론 사이에서 존재하지 않던 ‘신체’는 현상학에서 아주 중요해지며 사물과 지각 장(field)을 이루고 장소와 함께 사유되게끔 했다. 즉, 현상학이 장소 개념의 부상을 낳았고, 기존의 기하학 중심의 공간의 사유에서 완전히 달라진 장소 중심의 사유를 낳았다.
이후 바슐라르, 푸코, 들뢰즈/가타리, 데리다, 이리가레이 등의 철학자를 거쳐 오늘날의 주관적이고 인문학적인 장소론이 자리매김하기까지 장소의 개념사는 많은 변용을 거쳤다. 이정우와 함께 17세기 근대철학에서 20세기 현상학까지 ‘장소’에 대한 개념의 역사를 빠른 걸음으로 주파해보자.
이정우(철학자, 경희사이버대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공학, 미학, 철학을 공부한 후,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로 석사학위를, 미셸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학교 교수, 녹색대학 교수,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 철학아카데미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는 경희사이버대 교수로, 들뢰즈 <리좀 총서> 편집인으로 활동 중이다. 해박한 지식으로 고대철학과 현대철학,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가로지르며, 철학과 과학을 융합하는 등 ‘새로운 존재론’을 모색해 왔다. 다수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