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투명성, 존재 자체의 안개
‘알다가도 모를 인간이야’라는 말은 완전히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알 수 있는 부분과 알 수 없는 부분이 함께 있다는 의미다. 이 말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변의 사물들과 온 우주와 맺는 관계에도 적용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이성과 체계로는 파악할 수 없는, 안개처럼 불투명한 영역이 존재한다. 멋진 풍경에 안개가 끼어있으면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그건 우리의 시력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존재는 그 자체에 안개가 끼어있다. 그러니까 이건 우리의 인식의 문제가 아니다. 본 강좌는 존재의 근원적 불투명성에 대해 고찰하며, 불투명한 ‘나’와 ‘세계’가 근원적인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사물과 감각을 통한 불투명성의 경험
이성과 명증성(명석 판명함) 너머의, 또는 그 이면에 자리한, ‘도대체가 나타나긴 나타나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존재론을 펼쳐왔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접근 방식이나 사용 용어는 각자 다르지만, 공통으로 엮어낼 수 있는 개념이 바로 사물과 감각을 통한 ‘불투명성’이다. 강좌에서 다뤄질 내용을 언뜻 살펴보자면, 칸트의 사물 자체, 후설의 주어짐,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 사르트르의 끈적끈적함, 메를로-퐁티의 몸과 살, 레비나스의 타인의 얼굴 등은 불투명한 심연의 존재로의 우리의 사유를 확장시킨다.
불안, 공포, 절망이 아니라 신비, 놀라움, 경이로움으로
본 강좌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1-4강)에서는 칸트와 사물 자체의 불투명성에 대해 알아본 후, ‘사물을 감각한다’는 것에 대한 현상학적 사유의 기초가 되는 내용들을 갈무리한다. 후반부(5-10강)에서는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나스의 존재론을 순서대로 톺아본다. 본 강좌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는 저마다의 존재론적 두께와 깊이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가 그 근본적으로 불투명한 힘들에 관심을 두고 사물을, 대상을, 사람을 바라볼 때, 그 불투명성이 불안, 공포, 절망이 아닌 신비함, 놀라움, 경이로움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총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E. 후설의 발생적 지각론에 관한 고찰」로 석사 학위를, 「현상학적 신체론: E. 후설에서 M. 메를로-퐁티에로의 길」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시민을 위한 대안철학학교 <철학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상임이사로 재직 중이며, 한국프랑스철학회 회장, 한국현상학회 이사, 한국예술학회 이사를 맡고 있다. 주로 형상학적인 몸 현상학을 바탕으로 존재론, 예술철학, 매체철학, 고도기술철학, 사회 정치철학 등을 연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