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가 좋았어." SNS에는 오늘도 복고풍 카페 사진이 올라오고, 자개장과 양철 소쿠리로 꾸민 식당 앞에는 줄이 늘어서 있다. 뉴트로라 불리는 이 복고 열풍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다. 2030세대는 자신들이 태어나기도 전 시대의 물건을 찾고, 5060세대는 젊은 날의 추억을 꺼낸다. 그런데 정말 과거가 더 좋았을까. 아니면 우리의 기억이 과거를 미화하는 것일까.
기억은 왜 항상 아름다운가
기억은 선택적이다. 인간의 뇌는 고통스러운 순간보다 행복했던 순간을 더 오래, 더 선명하게 저장한다. 1990년대 한국 경제는 외환위기 직전의 불안정한 시기였고, 1980년대는 군부독재의 억압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그 시절은 다르다. 금성사 컬러 TV 앞에 모여 앉았던 가족의 웃음소리, 자개장에 고이 넣어두었던 첫 월급봉투. 기억은 맥락을 지우고 감정만 남긴다.
복고 열풍이 경기 불황과 함께 찾아온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현재가 불안할수록 과거는 더욱 아름답게 포장된다. 청년실업률이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고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2020년대 한국 사회에서, 1990년대는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었던 시대'로 재구성된다. 하지만 그 시절 역시 IMF와 구조조정, 정리해고의 공포가 일상이었다는 사실은 희미해진다.
니체의 영원회귀, 과거를 긍정하는 법
니체는 과거 미화의 메커니즘을 이미 통찰했다. 그가 제시한 영원회귀 사상은 단순히 시간이 반복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니체는 삶의 모든 순간이, 고통까지 포함하여 영원히 되풀이된다면 그것을 긍정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이는 과거를 선택적으로 미화하는 태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영원회귀는 과거의 좋았던 순간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실직의 고통도, 이별의 아픔도, 모욕과 좌절도 함께 돌아온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강조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우리가 과거를 그리워할 때, 우리는 사실 과거 전체가 아니라 우리가 선택한 일부만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과거 긍정은 고통까지 포함한 전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뉴트로 열풍을 즐기는 젊은 세대는 1990년대의 경제적 불안정을 경험하지 않았기에 그 시대를 순수한 '신선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반면 그 시절을 살았던 세대는 기억 속에서 고통을 지우고 향수만 남겼다. 둘 다 온전한 과거가 아니다.
기억의 정치학 - 누구의 과거인가
과거 미화는 개인의 심리적 현상을 넘어 정치적 함의를 갖는다. "옛날이 좋았다"는 말은 종종 현재의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적 태도로 이어진다. 1990년대를 그리워하는 목소리 속에는 때로 IMF 이전의 종신고용 체제, 가부장적 가족 구조에 대한 향수가 숨어 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안정이었을지 몰라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차별과 억압의 시대였다.
기억은 권력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 우리가 집단적으로 미화하는 '좋았던 시절'은 대개 그 시절의 주류 집단, 즉 남성이고 정규직이었던 이들의 기억이다.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 소수자들의 기억은 복고 열풍 속에서 지워진다. 뉴트로가 소비하는 1980-90년대 미학에는 그 시대의 노동운동, 민주화 투쟁, 성차별 현실은 들어있지 않다.
과거를 미화하는 순간, 우리는 현재의 문제를 직시하기를 멈춘다. "그때는 좋았는데"라는 말은 "지금은 왜 안 좋은가"라는 질문을 회피하게 만든다. 청년들이 자개장 카페에서 사진을 찍을 때, 정작 자개장을 만들던 세대의 저임금 노동 문제는 보이지 않는다. 복고는 과거의 물질적 기호만 소비하고 그 이면의 사회적 맥락은 삭제한다.
니체가 말한 진정한 영원회귀의 긍정은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선택적 기억이 아니라 역사 전체를, 고통과 기쁨을, 진보와 퇴행을 함께 직면하는 것이다. 과거를 미화하지 않고 과거로부터 배우는 것. 그것이 과거와 건강하게 관계 맺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때가 좋았어"가 아니라 "그때 우리는 무엇을 겪었고,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 것. 그때 비로소 과거는 현재를 바꾸는 힘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