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어 '알라(Allah)'와 히브리어 '엘로힘(Elohim)'은 모두 셈족 언어에서 신을 지칭하는 핵심 단어다. 두 언어는 기원전 3천년경 원시 셈족어에서 갈라져 나온 형제 언어로, 공통의 어근을 공유하면서도 각각 독특한 신학적 의미를 발전시켜왔다.
히브리어 '엘(El)'은 가나안 지역에서 최고신을 뜻하는 일반명사였다. 『구약성경』의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만난 '엘 엘리온(El Elyon,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나 '엘 샤다이(El Shaddai, 전능하신 하나님)' 같은 표현들이 이를 보여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엘로힘'이 '엘'의 복수형이라는 사실이다. 히브리어에서 '-im' 어미는 남성 복수를 나타내지만, 유일신을 지칭할 때도 사용되는 독특한 용법을 갖는다.
아랍어 '알라'는 정관사 '알(al)'과 신을 뜻하는 '일라흐(ilah)'가 결합된 형태다.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 반도에서도 '일라흐'는 신을 뜻하는 일반명사로 쓰였다. 그런데 '알라'라는 형태는 정관사가 붙어 '그 신', 즉 유일한 신을 특정하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언어학적 분석을 통한 신관의 차이
두 단어의 형태론적 분석은 흥미로운 신학적 함의를 드러낸다. '엘로힘'의 복수형 어미는 히브리 신학에서 하나님의 복합적 속성을 암시한다고 해석되어왔다. 중세 유대교 철학자 마이모니데스는 『혼란한 자들을 위한 안내서』에서 이를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들이 하나로 통일된 존재임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반면 아랍어 '알라'는 단수형으로, 이슬람의 철저한 일신론(타우히드)을 언어적으로 구현한다. 『꾸란』 112장 '순수장(Al-Ikhlas)'에서 "알라는 하나이시며(Allahu ahad)"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신의 절대적 단일성을 강조한다.
언어의 음성학적 측면도 중요하다. '알라'는 아랍어 화자들에게 독특한 공명감을 준다. 첫 음절 '알'에서 혀끝이 경구개에 닿는 설측음 'l'이 두 번 반복되면서 입 안에서 울림을 만들어낸다. 이런 음성적 특성은 신명 자체가 가진 신성함을 체험적으로 전달한다고 여겨진다.
역사적 맥락에서 본 의미 변화
두 언어의 신명이 갖는 의미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진화해왔다. 히브리어 '엘로힘'은 바빌로니아 유배 이후 더욱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의미를 획득했다. 유대교 랍비들은 신의 이름을 직접 발음하는 것을 금기시하며 '아도나이(Adonai, 나의 주님)'로 대체해 읽었다. 이는 언어와 신성 사이의 거리감을 만들어내는 신학적 전략이었다.
아랍어 '알라'는 이슬람의 확산과 함께 종교적 맥락을 넘어 문화적 정체성의 표지가 되었다. 아랍 기독교도들도 '알라'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이슬람적 맥락에서의 '알라'와는 미묘한 신학적 차이를 갖는다. 특히 삼위일체 교리를 받아들이는 기독교의 '알라'는 이슬람의 절대적 단일신과는 다른 의미층위를 형성한다.
언어철학적 관점에서의 해석
20세기 언어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이론으로 보면, '알라'와 '엘로힘'은 각각 다른 종교적 언어게임 속에서 작동한다. 같은 셈족 어근에서 나왔지만, 각기 다른 종교 공동체의 삶의 형식 속에서 고유한 의미를 획득한 것이다.
독일의 종교학자 루돌프 오토가 『성스러운 것의 이념』에서 제시한 '누미노제(numinous)' 개념도 여기서 중요하다. 두 신명 모두 인간이 신성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과 매혹을 언어적으로 구현하지만, 그 표현 방식은 서로 다르다. '엘로힘'의 복수성은 신의 측량할 수 없는 복합성을, '알라'의 단순성은 신의 절대적 통일성을 각각 부각시킨다.
현대 아랍 지역에서 '알라'는 종교를 초월한 일상어가 되기도 한다. "인샬라(Inshallah, 하나님이 원하신다면)"나 "알함둘릴라(Alhamdulillah,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같은 표현들은 무슬림이 아닌 아랍인들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이는 언어가 종교적 경계를 넘어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현대적 함의와 대화 가능성
21세기 종교간 대화에서 이 두 신명의 관계는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에서 기독교도들이 '알라'라는 단어 사용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은 언어와 종교적 정체성의 복잡한 관계를 드러낸다. 단순히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언어가 어떤 신학적 내용을 담을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 질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언어학적 관점에서 보면, '알라'와 '엘로힘'의 공통 어원은 아브라함 계통 종교들의 역사적 연관성을 입증한다. 동시에 각 언어가 발전시킨 고유한 의미 체계는 종교적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대화의 기초를 제공한다. 서로 다른 언어게임 속에서 작동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종교적 갈망이라는 공통 토대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알라'와 '엘로힘'은 단순한 번역 대상이 아니라, 각각의 종교 전통이 축적해온 신학적 지혜를 담은 언어적 보고다. 두 단어를 통해 우리는 언어가 단순히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종교적 경험과 신학적 사유를 형성하는 창조적 매체임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