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헬스장에서 땀을 흘리고, 주말엔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유튜브로 재테크 강의를 듣는다. 이 모든 활동 앞에는 "나를 위한 투자"라는 명분이 붙는다. 워라밸(Work-Life Balance)을 외치며 회사 밖 시간을 확보했지만, 정작 그 시간은 또 다른 노동으로 채워진다. 왜 우리는 쉬는 시간조차 생산적이어야 한다고 느끼는 걸까?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의 자기착취
한병철은 현대사회를 "성과사회"로 규정했다. 과거 규율사회가 외부의 강제로 인간을 통제했다면, 오늘날은 "할 수 있다"는 긍정의 메시지로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문제는 이 긍정성이 한계를 모른다는 점이다. "더 나은 나"를 위한 자기계발은 끝이 없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발적으로 자신을 착취한다. 퇴근 후 운동이 의무가 되고, 독서가 스펙이 되며, 취미마저 포트폴리오로 전락한다.
이러한 자기착취는 교묘하다. 상사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선택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SNS에는 "오늘도 자기계발 성공"이라는 인증 게시물이 넘쳐나고, 우리는 타인의 성실함에 자극받아 더 열심히 나를 갈아 넣는다. 워라밸을 외쳤지만, 결국 우리가 얻은 것은 일터를 벗어난 또 다른 일터였다.
쉼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
진정한 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이다. 생산성과 무관하게, 성과로 측정되지 않는 시간 말이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넷플릭스를 보면서도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멍하니 창밖을 보는 순간조차 "이럴 시간에 뭐라도 해야 하는데"라는 강박이 찾아온다.
이 강박의 뿌리에는 "최적화된 삶"에 대한 환상이 있다. 모든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고, 매 순간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믿음. 그러나 삶은 엑셀 시트가 아니다. 빈칸으로 남겨진 시간, 아무 계획도 없는 오후, 목적 없이 걷는 산책. 이런 '비생산적인' 순간들이야말로 우리를 진짜 인간으로 만든다.
생산성의 덫에서 벗어나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워라밸의 역설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쉼을 "투자"나 "재충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버려야 한다. 쉼은 다음 날 더 나은 성과를 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 자체로 목적이며, 삶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주말 아침 늦잠을 자면서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책을 읽다가 중간에 덮어도 괜찮다. 운동을 하루 거르면 어떤가. 중요한 것은 내가 정말 원하는 것과, 사회가 강요하는 "자기계발"을 구분하는 능력이다. 진짜 나를 위한 시간은 타인의 시선이나 성과로 증명할 필요가 없다.
현대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더 나은 자신"이 되라고 속삭인다. 그러나 더 나은 자신이 되려는 강박에 사로잡혀 지금의 나를 혹사시킨다면, 그것은 발전이 아니라 소진이다. 워라밸의 진정한 의미는 일과 삶의 균형이 아니라, 삶 속에서 진짜 쉼을 되찾는 것이다. 생산성의 잣대를 내려놓고, 그저 존재하는 시간을 허락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찾아야 할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