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조건만 갖춰지면", "기회가 오면", "준비가 되면"이라는 전제 하에 삶을 유예한다. 하지만 헤겔의 유명한 격언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는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행동할 것을 촉구한다. 이솝 우화에서 따온 이 표현은 로도스 섬에서 멀리뛰기를 했다고 자랑하는 남자에게 "그렇다면 여기서 증명해 보라"고 말하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헤겔은 이를 통해 추상적 가능성이 아닌 구체적 현실에서의 실천을 강조했다.
현실 도피의 유혹과 조건부 삶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더 나은 조건"을 기다린다. 취업을 위해 스펙을 쌓고, 승진을 위해 야근을 하고, 행복을 위해 돈을 모은다. 하지만 정작 그 조건들이 갖춰졌을 때도 또 다른 조건을 찾는다. 대학생 A씨는 "토익 900점만 되면 취업하겠다"고 했지만, 900점을 받고 나서는 "경력이 없어서 안 된다"며 또 다른 핑계를 찾았다. 직장인 B씨는 "승진만 하면 여유로워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승진 후에는 더 큰 책임감에 짓눌려 있다.
헤겔이 비판한 것은 바로 이런 "조건부 실존"이다. 우리는 항상 어디엔가 있는 이상적인 조건이나 상황을 그리며 현재를 유예한다. 마치 로도스 섬에서만 멀리뛸 수 있다고 주장하는 남자처럼, 우리는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서만 진정한 삶이 가능하다고 착각한다.
추상에서 구체로, 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
헤겔 철학의 핵심은 추상적 사유에서 구체적 현실로의 이행이다.
절대정신은 추상적 보편에서 시작하여 구체적 개별을 거쳐 다시 구체적 보편으로 발전한다. - 『정신현상학』, 헤겔
이는 단순히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우리 삶의 구체적 지침이다.
예술가 지망생 C씨는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그는 끊임없이 준비하고 공부했지만 정작 작품 활동은 미뤘다. 하지만 어느 날 "일단 만들어보자"는 마음으로 습작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진정한 예술적 성장을 경험했다. 추상적 완벽함에 대한 추구가 아니라 구체적 실천 속에서 진정한 발전이 일어난 것이다.
변증법적 발전과 현재의 창조적 힘
헤겔의 변증법은 현재 상황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발전하는 과정이다. 우리가 처한 현실은 완벽하지 않지만,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창조된다. 결혼 5년차인 D부부는 권태로움에 빠져 "이혼하면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것은 도피가 아니라 현재 관계 속에서의 새로운 소통 방식이었다. 갈등과 모순을 피하지 않고 그것을 통해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헤겔이 말하는 "부정의 부정"이다. 현실의 한계를 인정하되, 그것을 단순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로도스 섬이 아닌 바로 여기서, 완벽한 조건이 아닌 지금 이 순간에서 뛰어야 하는 이유다.
지금 여기서 시작하는 용기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는 현실 도피에 대한 철학적 경고이자 실천적 격려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조건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갈 용기다. 창업을 꿈꾸는 E씨는 5년간 "자금이 부족하다"며 미뤘지만, 결국 적은 자본으로라도 시작했을 때 진정한 사업가가 되었다. 영어 공부를 미뤄온 F씨는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았다"는 핑계를 버리고 서툰 영어로라도 외국인과 대화를 시도했을 때 실력이 늘었다.
헤겔이 보여준 것은 현실이 아무리 불완전해도, 바로 그 현실 속에서 변화와 발전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이상적인 "로도스 섬"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지금 이 자리가 바로 우리가 뛰어야 할 무대이고, 현재 이 순간이 진정한 삶이 시작되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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