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 거울을 보며 "오늘은 어떤 내가 되어야 하지?"라고 생각한다. 카카오톡에서는 친근하고 유머러스한 모습을, 인스타그램에서는 세련되고 감각적인 모습을, 링크드인에서는 전문적이고 성취지향적인 모습을 연출한다. 직장에서의 나와 집에서의 나, 친구들 앞에서의 나와 가족들 앞에서의 나는 때로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이런 혼란은 단순히 현대 사회의 복잡성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이것은 지난 400여 년간 서구 철학사에서 벌어진 거대한 사상적 전환의 필연적 결과다. 20세기 철학자들이 수천 년간 서구 문명의 토대였던 '주체'라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해체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지적 반란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날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게 되었을까?
데카르트의 코기토, 근대 주체의 탄생
이야기는 1637년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에서 시작된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방법서설』"라는 유명한 명제로 근대 철학의 출발점을 제시했다.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지만,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데카르트가 상정한 주체는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 이 '나'는 통일되고 투명하며, 스스로를 완전히 알 수 있는 존재였다. 마치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내부를 완전히 들여다볼 수 있는 의식의 영역이 있다고 믿었다. 또한 이 주체는 외부 세계와 명확히 구분되는 독립적인 실체였다.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처럼,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고 판단하는 명확한 중심이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이런 주체 개념은 이후 근대 서구 문명의 토대가 되었다. 개인의 이성과 자유의지를 중시하는 계몽주의,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 개인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모두 이런 주체 개념을 전제로 한다. 스스로를 알고 판단할 수 있는 독립적인 개인이 있어야 자유롭고 합리적인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확고해 보이는 주체 개념에는 처음부터 균열이 있었다. 정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전히 알고 있을까? 어제 확신을 가지고 한 말을 오늘 부인하고, 술자리에서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에 스스로 놀라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는가? 사랑에 빠졌을 때 "내가 왜 이러지?"라고 자문하거나, 화가 났을 때 평소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프로이트의 무의식, 주체에 첫 번째 균열을 내다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데카르트적 주체 개념에 첫 번째 결정타를 가했다. 그는 의식적인 '나' 아래에 거대한 무의식의 영역이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아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정신적 활동은 의식의 밑바닥에서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프로이트의 발견은 충격적이었다. 우리의 행동과 생각, 감정의 대부분이 무의식적 욕동과 억압된 기억, 그리고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왜 특정 사람을 보면 이유 없이 불안해지는지, 왜 특정 상황에서 과도하게 흥분하거나 위축되는지, 왜 꿈에서 이상한 이미지들이 나타나는지를 의식적인 '나'는 알지 못한다.
더 나아가 프로이트는 자아(ego) 자체도 원초아(id)와 초자아(superego) 사이의 갈등 속에서 형성되는 불안정한 구성물이라고 봤다. 원초아는 쾌락 원칙에 따라 즉각적 만족을 추구하고, 초자아는 사회적 규범과 도덕적 명령을 내면화한 것이다. 자아는 이 둘 사이에서 현실 원칙에 따라 타협점을 찾아야 하는 중재자에 불과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데카르트가 그토록 확신했던 투명하고 통일된 주체는 환상이다. 실제로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의 어둠 속에서 다양한 충동들이 갈등하고 있을 뿐이다. 현대인들이 "내가 왜 이랬을까?"라고 자문하는 순간들은 바로 이런 무의식의 작동을 보여주는 증거다.
구조주의의 공격, 주체는 언어의 산물일 뿐
1960년대 프랑스에서 일어난 구조주의 운동은 주체 개념에 더욱 급진적인 공격을 가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롤랑 바르트, 자크 라캉 같은 사상가들은 주체가 언어와 사회 구조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것은 사실 언어가 만들어낸 효과라는 것이다.
구조주의자들의 핵심 통찰은 언어가 단순히 사고를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고 자체를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언어로 생각하고, 언어로 세계를 인식하며, 언어로 자아를 구성한다. 따라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하고 자아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경험할 때 그것이 순수하게 개인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구조주의자들은 이런 감정조차 사회적으로 구성된 언어와 문화 코드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봤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할리우드 로맨스 영화들이 없었다면 현대인들의 사랑 개념도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라는 식이다.
라캉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무의식 자체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도 결국 상징계의 질서, 즉 언어와 문화의 체계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체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존재하는 상징계 안으로 들어가면서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대인들이 SNS에서 다양한 페르소나를 연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스타그램의 시각적 언어, 트위터의 간결한 텍스트, 링크드인의 전문적 어조는 각각 다른 종류의 주체를 요구하고 생산한다. 우리는 플랫폼에 따라 다른 언어 게임에 참여하면서 다른 자아를 연기하게 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의 최후 일격, 주체의 완전한 해체
1970년대 이후 미셸 푸코와 자크 데리다로 대표되는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아예 주체의 죽음을 선언했다. 이들은 구조주의자들보다도 더 급진적으로 주체 개념 자체를 해체하려고 시도했다.
푸코는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18-19세기 근대에 발명된 것이며, 역사적으로 일시적인 구성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분석하면서, 근대적 주체가 사실은 감시와 훈육의 메커니즘을 통해 생산된 것임을 보여주었다. 학교, 병원, 감옥, 공장 같은 근대적 기관들이 개인들을 '정상화'하고 '주체화'하는 과정에서 오늘날 우리가 아는 주체 개념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우리가 자유롭고 자율적인 개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은 권력의 작동 방식이 바뀐 결과다. 과거에는 외부의 물리적 강제로 개인을 통제했다면, 근대에는 개인 스스로 자신을 감시하고 통제하도록 만드는 내재화된 권력이 작동한다. 푸코는 언젠가 인간이라는 개념이 "바닷가의 모래 위에 그려진 얼굴처럼 지워질 것이다 - 『말과 사물』"라고 예언했다.
데리다는 더 나아가 언어 자체의 불안정성을 파헤쳤다. 그는 '차연(différance)'이라는 개념을 통해 모든 의미가 끊임없이 연기되고 지연된다고 봤다. 어떤 기표(signifier)도 고정된 기의(signified)를 갖지 못하고, 다른 기표들과의 차이를 통해서만 임시적으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안정된 주체 개념도 불가능하다. '나'라는 기표도 다른 기표들(너, 우리, 타자 등)과의 차이를 통해서만 의미를 가질 뿐, 그 자체로는 공허한 기표에 불과하다. 결국 고정된 정체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끊임없이 의미가 연기되는 텍스트의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을 뿐이다.
현대 사회의 정체성 혼란, 그 철학적 뿌리
이런 철학적 전환들이 오늘날 우리의 일상에 미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현대인들이 경험하는 정체성의 혼란, 다중 페르소나, 유동적 자아는 모두 이런 사상사적 변화의 직접적 결과다.
먼저 디지털 미디어의 발달이 이런 변화를 가속화했다. 온라인에서 우리는 손쉽게 여러 개의 계정을 만들고, 다양한 정체성을 실험할 수 있다. 가상현실과 메타버스에서는 아예 다른 외모와 성별, 나이를 가진 아바타로 살아갈 수도 있다. 이런 기술적 가능성들은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 이론적으로 제시했던 '주체의 해체'를 일상적 현실로 만들어버렸다.
또한 현대 사회의 복잡성과 다원성도 고정된 정체성의 해체를 부추긴다. 과거 전통 사회에서는 태어난 신분과 지역, 직업이 평생 동안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지리적 이동성이 높고, 직업을 여러 번 바꾸며, 다양한 문화와 가치관에 노출된다. 이런 환경에서는 하나의 고정된 정체성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다.
소비 문화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대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을 생산하고, 소비를 통한 정체성의 구성을 부추긴다. 우리는 입는 옷, 사용하는 브랜드, 거주하는 지역, 취미 활동 등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정체성을 구성한다. 하지만 이런 소비 기반의 정체성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고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
정치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계급이나 지역, 이념에 따라 비교적 안정된 정치적 정체성이 형성되었다면, 현대에는 이슈에 따라 유연하게 변하는 정치적 연합들이 나타난다. 환경 문제, 젠더 이슈, 세대 갈등 등 다양한 이슈들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단일한 정치적 정체성을 갖기 어려워졌다.
주체의 해체가 가져온 새로운 가능성들
하지만 이런 변화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고정된 주체 개념의 해체는 더 유연하고 창조적인 자아 실현의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먼저 개인의 자유와 선택의 폭이 크게 확대되었다. 과거에는 태어난 조건에 따라 인생의 경로가 대부분 결정되었다면, 현대에는 훨씬 다양한 삶의 방식을 실험할 수 있다. 성별, 직업, 거주지, 라이프스타일 등 모든 영역에서 선택의 여지가 늘어났다. 이는 개인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타자에 대한 이해와 관용도 증진되었다. 고정된 정체성 개념이 해체되면서, 다양성과 차이에 대한 인정이 확산되었다. 성소수자, 다문화 가정, 비주류 문화 등에 대한 사회적 수용도가 높아진 것도 이런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자신의 정체성이 유동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타인의 다름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창의성과 혁신의 관점에서도 긍정적이다. 고정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한 사고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해결책을 만들어내는 데 유리하다. 다양한 정체성을 오가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그만큼 다양한 관점과 경험을 축적할 수 있다. 이는 복잡하고 변화가 빠른 현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자산이다.
문제는 이런 철학적 변화를 어떻게 건강하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느냐에 있다. 주체의 해체가 가져온 자유를 만끽하되,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혼란과 불안을 적절히 관리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완전히 고정된 정체성도, 완전히 해체된 주체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면서도 일정한 일관성과 연속성을 유지하는 균형감각이다.
결국 데카르트에서 시작되어 포스트모던까지 이어진 주체 개념의 변천사는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져준다. 확고한 주체의 시대는 끝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무정부 상태에 빠질 필요는 없다. 오히려 더 성숙하고 지혜로운 방식으로 자아와 타자,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를 사유해야 할 때다. 철학자들의 반란은 끝났다. 이제 우리의 실험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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