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스포티파이, 각종 SaaS 서비스들. 우리는 더 이상 CD를 사지 않고,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구매하지 않는다. 월 9,900원이면 수천 편의 영화를, 월 10,900원이면 수백만 곡의 음악을 '소유'할 수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이다. 이 미묘한 차이가 우리 시대의 소비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소유하지 않고 향유하는 시대
구독경제의 핵심은 '접근권(access)'이다. 물건을 내 것으로 만드는 대신,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구매한다. 자동차 공유 서비스를 생각해보자. 차를 소유하면 주차비, 보험료, 유지비 등의 부담을 안게 되지만, 필요할 때만 빌려 쓰면 그런 걱정에서 자유로워진다. 표면적으로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선택처럼 보인다.
20세기 초 발터 벤야민은 수집가들의 심리를 분석하며 흥미로운 통찰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진정한 수집가는 대상을 소유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과 맺는 관계를 통해 만족을 얻는다. 수집품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수집가의 기억과 경험이 투영된 세계다. 벤야민의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구독경제는 역설적이게도 '소유 없는 소유'의 극단적 형태처럼 보인다. 우리는 수많은 콘텐츠에 접근할 수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진정으로 우리 것이 아니다.
편리함의 이면, 통제권의 상실
문제는 접근권이 언제든 회수될 수 있다는 점이다. 구독을 해지하는 순간, 내가 즐기던 모든 것이 사라진다. 더 심각한 것은 서비스 제공자의 결정에 따라 콘텐츠가 임의로 삭제되거나 변경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디즈니플러스에서 일부 콘텐츠가 예고 없이 사라진 사건이 있었다. 구독자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그 결정을 받아들여야 했다.
소유의 본질은 통제권에 있다. 내가 산 책은 밑줄을 긋든, 귀퉁이를 접든, 낙서를 하든 자유다. 하지만 전자책 구독 서비스에서는? 서비스 약관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편리함을 얻는 대가로 통제권을 포기했다. 그리고 이 교환이 과연 공정한 것인지 질문하지 않는다.
관계의 희박화와 의미의 상실
구독경제는 우리와 사물 사이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소유한 물건은 시간이 지나며 나만의 이야기를 품게 된다. 대학 시절 사둔 헌책방의 낡은 철학서, 첫 월급으로 산 카메라, 이사할 때마다 함께 옮긴 LP판들. 이런 것들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우리 삶의 일부가 된다.
반면 구독 서비스를 통해 소비하는 콘텐츠는 대체 가능하고 일회적이다. 넷플릭스에서 본 영화 한 편은 다음 날이면 기억에서 희미해진다. 무한한 선택지 앞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깊이 음미하지 못한다. 풍요로움 속의 빈곤이다. 모든 것에 접근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진정으로 내 것이 아닌 상태. 이것이 구독경제가 만들어낸 새로운 소외의 형태는 아닐까.
진짜 자유를 향하여
구독경제를 무조건 거부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제공하는 편리함과 효율성은 분명 현대인의 삶을 개선했다. 다만 우리는 이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과 그것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을 의식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자유는 단순히 많은 것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관계를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다. 때로는 소유를 선택하고, 때로는 구독을 선택하되, 그 선택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 물건과의 관계에서도, 콘텐츠와의 관계에서도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 그것이 구독경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철학적 태도가 아닐까.